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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 박스 몇 개에 나눠 담을 수 있도록 인생을 정리한다는 것. 원치 않지만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 도시에서 안정적으로 공간을 빌릴 자본이 없는 청년은 잠재적 난민이다."(p.268)

이삿짐이라곤 여행용 캐리어 하나와 손으로 들 수 있는 박스 몇 개가 전부인 청년은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무심하게 정면을 응시한다. 지난 12월 31일 발간된 <청년, 난민 되다>(저자 미스핏츠, 코난북스)의 표지 사진이다.

이 책은 "불안과 상실을 대가로 꿈을 좇을 기회를 얻고, 질 낮은 생활을 감수"하는 이 시대의 청년을 "잠재적 난민"이라고 명명한다. 과장이 아니다. 당장 서울만 해도, 주거 빈곤(최저주거기준 미달 주택이나 지하, 옥탑, 고시원 등에 거주) 상태의 청년(만 19~34세)이 52만 명에 이른다(2015년, 민달팽이유니온).

<청년, 난민 되다>는 타이베이, 홍콩, 도쿄 그리고 서울에서 어렵게 방을 구해 살아가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20대 독립 언론 <미스핏츠>는 지난 2014년 12월부터 포털사이트 다음 뉴스펀딩(현 스토리펀딩)에서 "'노답청춘' 집 찾아 지구 반 바퀴"라는 제목의 기획기사를 연재했다. 이를 통해 모인 취재 비용을 바탕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들이 취재를 시작한 건, "월세에 생활비가 묶이고, 이웃이 내는 듣기 거북한 소리가 이어지고, 숨죽이는 데 익숙해지고, 쉬어도 쉰 것 같지 않은 날이 이어"지는 것이 과연 청춘의 통과의례인지 묻기 위해서다. 어쩌다 청년들이 이런 삶을 '당연히' 여기게 됐는지, "근거리에서만 이유를 찾으면 하숙집 주인과의 싸움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아 시야를 넓혔다.

우리나라와 사회․경제적 배경이 비슷한 타이베이, 홍콩, 도쿄를 취재지로 뽑았다. 무작정 기사와 책, SNS를 뒤져 취재원을 찾았다. "사전조사를 할 때는 질문지 하나를 보내려 해도 번역기를 수차례 돌려야" 할 정도로 낯선 나라지만, 이들이 보고 온 그곳 청춘들의 삶은 우리와 닮아있다.

일본의 맨션 일본의 맨션. 청년들이 도시에서 집을 구하기 힘든 건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 청년들은 질 낮은 방에 살 거나 부모와 함께 사는 것을 택한다. 이도 아니면, 넷카페와 맥도날드를 전전하는 '난민'이 된다.
▲ 일본의 맨션 일본의 맨션. 청년들이 도시에서 집을 구하기 힘든 건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 청년들은 질 낮은 방에 살 거나 부모와 함께 사는 것을 택한다. 이도 아니면, 넷카페와 맥도날드를 전전하는 '난민'이 된다.
ⓒ 김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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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을 꿈꾸는, 우리와 닮은 그들

"(중략) 집을 쉽게 구할 수 없는 문제를 두고 젊은 사람들이 고생하고 싶어 하지 않아서 집을 못 구하는 거라 말하는 건 좀 화가 나. 악의적인 부동산 투기는 계속해서 수수방관해 놓고, 이제 와서 그만큼 거품이 끼어버린 집값을 나더러 부담하라고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인 걸."(p.58)

어느 타이베이 청년이 한 말이다. 한국 청년이 한 말이라고 바꿔 생각해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아파트 한 채를 불법 개조해 조각조각 나눠놓은 타이베이의 '타오팡'은 합판으로 방을 여러 개로 쪼개는 한국 대학가 하숙집, 고시원과 비슷하다. 불안정한 주거와 위태로운 노동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일본 청년들의 사례도 낯설지 않다. 

아무리 '노오력'해도 민간주택은 물론 공공임대주택조차 얻기 힘든 홍콩 청년들이 타국으로의 이주를 꿈꾸는 대목에선, '탈조선'을 말하는 이곳의 청년들이 떠오른다. 이들에게 집은 더 이상 '안식처'가 아니다. 그저 참고, 살아내는 곳 혹은 영영 소유하지 못할 공간일 뿐. 책은 묻는다.

"우리는 집을 선택하거나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살아가는 공간이라고만 생각한다. 그래서 적응하고, 견디고, 그냥 지낸다. 혹은 집을 집이 아니라 부동산으로만 본다. 재산, 평수. 그렇지만 정말 그뿐인가."(p.218)  

책을 읽어 내려가다, 이 문장에서 멈춰 섰다. 어느 기억이 떠올라서다. 내 첫 자취방이 될 집을 보던 날, 아빠는 집 앞에서 말없이 담배를 태웠다. 방을 둘러보던 엄마의 표정이 굳어졌다. 방을 보고 돌아오는 길, 엄마는 "차라리 하숙이 낫지 않겠느냐"고 넌지시 물었다. 그때까지 별 말이 없던 아빠는, 차에 올라타며 "더 좋은 집을 구해줄 능력이 안 돼 미안하다"고 했다.

두 분을 배웅하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 마침 룸메이트가 방에 없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기숙사 문을 열자마자 펑펑 울었다. 나'만'의 방이 아닌 곳에서 숨죽이지 않고 울어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유 없이 서로 미안해하고 서글퍼하는 상황. 이건, 우리의 잘못이 아니었다.  

어떤 원룸 기숙사에서 나온 나는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야만 했다. 대단치 않은 7평짜리 원룸을 구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 어떤 원룸 기숙사에서 나온 나는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야만 했다. 대단치 않은 7평짜리 원룸을 구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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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기숙사는 단 1년만 살고 나가야 했다. 수요에 비해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 학교의 기숙사 수용률은 8.7%였다. 수도권 소재 대학의 기숙사 수용률(13.8%, 2014년, 대학교육연구소)보다 한참 뒤처졌다. 신입생이 기숙사에 들어오기 위해선 재학생이 나가야 했다.

뛰어나게 공부를 잘 하지도, 가난하지도, 멀리 살지도 않는 내게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이 드는 지역 학사, 대학생 공공 기숙사 등은 조건이 맞지 않았다. 몇 없는 선택지 중에 자취를 택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자식 둘을 대학에 보내느라 이미 허리가 휠대로 휜 부모님에게 보증금 1000만 원에 다달이 나가는 월세 50만 원은 절대 가벼운 돈이 아니었다. 애석하게도 학교 앞의 '평범한' 원룸 임대 시세는 그 정도였다. 그 비용을 감당할 여유가 없는 나는 더 싼 곳을 찾았다.

싼 만큼 학교와 멀어지고, 삶의 질이 낮아지는 곳. 가파른 언덕을 오르내리고, 좁은 골목에 들어서야 닿을 수 있는 곳. 습기와 곰팡이를 걱정하고, 한줌 햇빛이 반가워지는 곳. 그 대단치 않은 7평짜리 공간을 찾는 과정은 이러했다. 이 과정과 공간 자체에, '집'에 대한 나의 바람은 온전히 담기지 못했다.

청춘의 집이 '삶을 담는 공간'되기 위한 '정치'

 '나도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 청년예술활동가 홍승희가 국회 앞에 설치한 종이박스집. 홍씨는 청년 주거 문제를 알리기 위해 종이집을 설치하는 퍼포먼스를 했다.
 '나도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 청년예술활동가 홍승희가 국회 앞에 설치한 종이박스집. 홍씨는 청년 주거 문제를 알리기 위해 종이집을 설치하는 퍼포먼스를 했다.
ⓒ Bezzangi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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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집'은 어떤 모습일 수 있을까? 나는 이 고민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모습은 단순히 복층 원룸이라거나, 이케아 가구를 들여놓은 인테리어 공간을 말하는 건 아니다. 우리가 찾고 싶은 '청춘의 집'은 삶을 담는 그릇, 온전한 그릇으로서의 집이다."(p.218)

<청년, 난민 되다>는 서울과 타이베이, 홍콩, 도쿄 청년들의 집이 '그저 살아가는 곳에 그치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온전한 그릇으로서의 집"을 만드는 가능성을 찾기 위한 움직임을 소개한다. 2014년 10월, 청년세대와 기성세대가 함께 고급 아파트 앞에서 노숙을 벌인 대만의 '새둥지운동'이 대표적이다. 이 운동은 그해 말 치러진 지방선거에 '공공임대주택 건설'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월세 지원 등으로 대학생들의 주거 안정을 보장하는 홍콩의 대학, 안정적인 주거 환경 구축과 더불어 인적 관계의 회복을 고민하는 일본의 긱(Geek)하우스, K2 인터내셔널의 사례도 있다.

<청년, 난민 되다>는 이를 기반으로 청년 주거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한다. '청년 주거 문제는 단순히 개인이 더 많은 돈을 벌고 좋은 집을 사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기숙사비 인하 운동, 주거 장학금, 사회 주택, 공유 주거 등. 방법은 여러 가지지만, 이건 결국 '정치'의 문제라고 정리한다.

"녹록지 않은 현실을 뚫을 수 있는 건 결국 정치다."(p.291)

이들이 '정치'가 문제 해결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청년들의 "'사적'인 공간은 그 무엇보다 '공적'"이기 때문이다. 청년들의 방, 그 안에 담긴 삶이 망가지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불행에 그치지 않는다. '가능성을 잃은 청춘'은 '미래를 잃은 나라'로 이어진다.  

"청년 주거 문제는 '청년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의 청년이 다음 세대로 이행할 '기회'를 주는 사회인지를 보여주는 문제다. (중략) 지금의 도시가 청춘에게 빼앗고 있는 건 그저 '월세'가 아니다. 기회와, 다시 돌아오지 않을 젊음과 내일에 대한 상상이다."(p.310)

책의 말미엔 '흙수저 게임'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청년, 난민 되다>는 이 게임의 핵심이 "매 턴마다 흙수저와 금수저가 자신들을 위한 '법안'을 발의하고, 그에 따라 이 모든 선택의 질서를 바꾸는 데 있다"고 말한다. 선택지가 있다. 게임의 법칙을 바꿀 것인가, 순응하며 살 것인가. '내일에 대한 상상'을 위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덧붙이는 글 | <청년, 난민 되다> 미스핏츠(조소담, 박진영, 정세윤, 구현모) 지음, 코난북스, 1만5000원



청년, 난민 되다 - 미스핏츠, 동아시아 청년 주거 탐사 르포르타주

미스핏츠 지음, 코난북스(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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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에디터. '에디터만 아는 TMI'를 연재합니다. 그림책을 좋아합니다. 2017년 그림책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 2019년 성교육 전문가와 함께 하는 대화집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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