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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포세대, 헬조선, 흙수저에 이르기까지... 청년세대의 절망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넘쳐납니다. 청년들이 참 할 말 많은 세상입니다. 하지만 '어린 것이 뭘 아느냐', '사회문제에 신경 끄고 네 앞가림이나 해라'라는 '꼰대'의 말에 하고 싶은 말을 삼킬 때가 많습니다. '할많하않', 이 신조어는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의 줄임말입니다. '할많하않'이 아닌, 할 말이 많으니 하겠다는 청년들을 만나봤습니다. [편집자말]
"으음... 안녕하세요. 기무상입니다. 잠 좀 깨고 올 게요."

어느 팟캐스트 라디오 방송의 첫 멘트다. 알람 소리로 시작해서 일을 하고, 친구를 만나고, 애인과 야식을 먹고 끝나는 아주 '평범한 하루'. 그 하루의 소리와 짧은 내레이션을 담아낸 것뿐이다. 'Lite : 라이트'는 기무상(활동명, 32세)씨가 만드는 팟캐스트 라디오 방송이다.

Lite는 'Lesbian Is The E'의 줄임말. 'Lite : 라이트'는 레즈비언의 삶과 사랑, 그리고 일상의 이야기를 전한다. 앞서 소개한 내용처럼 기무상씨의 하루를 그대로 보여주기도 하고, 게스트를 초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이에 맞춰, 방송마다 'Lesbian Is The Enlightenment', 'Lesbian Is The Extraordinary' 등의 부제목이 붙는다. 지난 2015년 10월부터 시작한 이 방송은, 특별편을 포함해 총 21편이 나왔다. 지난 12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기무상씨를 마주했다.

대한민국 30대 레즈비언 기무상입니다  기무상씨의 본업은 토익 강사다. 대학 방학기간엔 쉴 새 없이 바쁘지만, 팟캐스트 채널과 함께 '대한민국 서른 살 레즈비언, 기무상입니다'라는 이름의 블로그와 유튜브 채널도 운영한다. 스마트폰의 영상은 그가 강의하는 모습.
▲ 대한민국 30대 레즈비언 기무상입니다 기무상씨의 본업은 토익 강사다. 대학 방학기간엔 쉴 새 없이 바쁘지만, 팟캐스트 채널과 함께 '대한민국 서른 살 레즈비언, 기무상입니다'라는 이름의 블로그와 유튜브 채널도 운영한다. 스마트폰의 영상은 그가 강의하는 모습.
ⓒ 김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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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일상을 방송에 담는 이유

"그냥, 사람 사는 이야기죠. 사회에서 '레즈비언'이라는 단어 자체가 평범하지 않잖아요. 평범하지 않은데, 평범함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레즈비언은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슬퍼할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뻐할 일도 아닌, '그냥 평범한 어떤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죠."

기무상씨의 본업은 토익 강사다. 대학교 방학 기간엔 쉴 새 없이 바쁘지만 팟캐스트 채널과 함께 '대한민국 서른 살 레즈비언, 기무상입니다'라는 이름의 블로그, 유튜브 채널도 운영한다. 이를 통해 자신의 삶과 사랑, 그리고 일상의 이야기를 전한다.

기무상씨가 만드는 팟캐스트 방송의 내용은 그리 대단치 않다. 게스트가 등장할 때도 있지만, 인터뷰나 대담이라기보다 친한 언니와 신나게 수다 떠는 느낌이다. 첫 여자친구, 성 정체성을 깨닫기 전 '구남친'과의 연애담, 이상형에 대한 이야기까지. 한바탕 떠들다 보면, 그게 방송이 된다.

유튜브 채널을 활용해 기존의 노래를 랩으로 바꿔 부른 커버(cover, 다른 밴드나 가수의 곡을 리메이크하는 것) 영상을 올리기도 한다. 얼마 전 숙명여대, 서울예대에서 성소수자 혐오 포스터가 연이어 발견됐을 때는, 에픽하이의 <본 헤이터(born hater)>를 개사해 랩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모두 기무상씨가 별다른 장비 없이 스마트폰을 활용해 제작한 것들이다.

팟캐스트 방송을 시작한 뒤, 기무상씨는 <허핑턴포스트 코리아>에 에세이를 기고하는 등 활동 반경을 넓혔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알음알음 방송을 찾아 듣고 글을 읽는 사람이 있다. 유튜브 채널 구독자만 607명(2016년 1월 14일 기준)에 이른다. 미국의 한 레즈비언 커플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Lesbian Love'의 구독자 수는 약 16만 명. 이에 비할 순 없지만, 누군가에겐 기무상씨의 활동이 '비빌 언덕'이 된다.

"팟캐스트 SNS 계정으로 (독자들이) 고민 상담 메시지를 보낼 때가 가장 놀라워요. 내용도 엄청 길어요. '어디서도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정말 끙끙 앓다가 메시지를 보냅니다'라고... 저도 당사자이지만, 이 일을 하면서 새롭게 만나는 성소수자들이 많아요. 직업도 다양하고요."

지금 고3이라는 한 학생은 '대학에 가면 여자친구와 이런 방송을 해보고 싶다'며 기무상씨의 유튜브 채널에 댓글을 남겼다. 토익 강사인 기무상씨의 옛 제자가 방송과 글을 접하고 메시지를 통해 커밍아웃(자신이 성소수자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밝힘)을 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 이렇게 연이 닿아 팟캐스트 방송의 게스트로 참여한 이도 있다.  

"매일 느끼고 있어요. 성소수자는 정말 많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있는 평범한 사람이다(라고)."

활동명을 '김'의 일본어식 표기인 '기무상'으로 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마침 일본어 공부를 하고 있었고, 음식 '김'을 좋아하기 때문에 정한 이름이기도 하지만 다른 뜻도 담겨있다. 한국에서 가장 흔하고 평범한 성인 '김'씨처럼, 레즈비언을 비롯한 성소수자도 그저 '보통의 존재'라는 의미다. 어디에나 있는 보통의 존재. 성소수자를 낯설거나 불편하게 바라보는 눈빛 때문에, 혹은 다른 이유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성소수자가 TV에 등장하면 언제나 사회적 문제 같은 느낌이 들고, 부정적으로 그려지잖아요. 그래서 저도 계속 등지고 살았던 거 같아요. 한 10년 정도 '난 (레즈비언이) 아닐 거야'라고 생각했어요. 인정하니까 별거 아니더라고요. 홀가분한 기분이에요."

기무상씨는 "모든 사람에게 직접 커밍아웃을 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아직, 부모님을 비롯한 몇몇 지인들에게 그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영상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모두 드러낸 것 또한 최근의 일이다. 목소리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자신의 직업과 얼굴을 밝혔다. 그러면서도 '기무상'이라는 활동명만은 놓지 않았다. 그는 이 활동명이 "배트맨의 조그만 가면과 같다"고 설명했다.

"두려움이 있긴 있으니까요. '기무상'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그리고 제가 기무상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져서, 직접 말하지 않아도 제3자의 입을 통해 부모님이 저에 대해 아시는 게 목표예요. '그 정도면 저를 인정해주시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죠. 영화 <배트맨>에서 브루스 웨인과 배트맨의 관계라고 할까? 이중생활이죠."

lite 8편 아름다운 우리들의 성, 클리토리스  lite 8편 아름다운 우리들의 성, 클리토리스. 기무상씨는 팟캐스트 방송을 통해 여러 주제를 다룬다. lite 8편에선 여성의 음핵, '클리토리스'에 대해 게스트와 이야기를 나눴다.
▲ lite 8편 아름다운 우리들의 성, 클리토리스 lite 8편 아름다운 우리들의 성, 클리토리스. 기무상씨는 팟캐스트 방송을 통해 여러 주제를 다룬다. lite 8편에선 여성의 음핵, '클리토리스'에 대해 게스트와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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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비언,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곳에서 조그만 가면을 벗어던지는 일은 아직 쉽지 않다. 기무상씨의 에세이가 각각 영어와 한국어로 <허핑턴포스트>와 <허핑턴포스트 코리아>에 올라가면, 똑같은 내용이라도 다른 반응이 온다. <허핑턴포스트>엔 '환영한다'는 댓글이 달리고, <허핑턴포스트 코리아>엔 동성애 '찬반' 논쟁이 불붙는다.

"사실 댓글 하나하나에 엄청 신경을 써요. 최대한 신경 안 쓰려고 해도, 계속 생각이 나죠. 악플이나 욕 같은 거. 그렇지만 욕을 먹든 안 먹든, '내가 활동을 계속하는 것'이라는 더 큰 목표가 있으니까요. 욕을 먹는다는 건, 그만큼 저의 글을 읽는 수신자가 있다는 거잖아요."

그는 "기무상으로 활동하는 것에 대해 '괴로움'이라는 단계를 넘어선 거 같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마치 배트맨이 죽을 각오를 하고 고담시를 지키는 것과 같다"고 웃으며 덧붙였다.

"그래도 이렇게 말을 하게 됐다는 거 자체가, 많이 발전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플보다는 악플'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게 제가 더 이런 일을 하는 이유인 거 같아요. 게이 같은 경우엔, 사회적으로 커밍아웃하신 분들이 많잖아요. 그만큼 욕도 많이 먹지만, 유명인도 많고.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 사람도 몇 있고요. 그런데 레즈비언을 떠올렸을 때,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기무상씨는 목표가 많다. '여자 홍석천'되기, 다양한 레즈비언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책 내기, 음원 발매하기, 유튜브 구독자 10만 명 넘기기, '파워 블로거' 되기. 그저 관심만 끄는 유명인이 되고 싶은 건 아니다. 실제로 그는 "팟캐스트 방송을 하긴 하지만, 원래는 내향적인 성격"이라고 설명했다. 모든 것을 다 밝히면서도 '기무상'이라는 작은 가면을 놓지 않는 건, 어쩌면 이 때문인지 모른다.

그의 여러 꿈은 "'레즈비언'이라는 네 글자의 무게를 줄이고, 아무렇지 않은 단어로 만드는 것"이라는 목표로 수렴된다. '레즈비언'의 존재가 낯선 이들에게 끊임없이 가닿고, 익숙함을 주는 것. 그래서 "절친, 회사동료, 선생님, 제자, 딸, 어머니, 이모, 고모"인 레즈비언을 아무렇지 않게 상상할 수 있게 되는 것. 기무상씨가 바라는 것이다.
 
"... 난생처음 굴을 먹었을 때, 누드 사진을 봤을 때, 포르노를 봤을 때, 그때 느끼는 그 이상함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강하게 다가온다. 기존의 고정관념이 더욱 강하게 자리 잡혀 있을수록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까 레즈비언의 사랑에 대해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역시 당연한 일인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사정이다. 여자와 여자의 사랑을 거부하고 반대하고 'HIV 퍼지니까 큰일 난다'고 헛소리하는 건 그들의 사정이다. 나는 서른이 다 되어 진정한 내 자신을 발견하고 하루하루 의미 있게 살고 있으며 망설이지 않고 당당하게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여자 그 여자의 사정, 기무상, 네이버 블로그 '대한민국 서른 살 레즈비언, 기무상입니다')

기무상씨에게 '레즈비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저 레스보스 섬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간단한 답이 돌아왔다. '레즈비언'이라는 단어는 에게 해의 레스보스 섬에서 유래됐다. BC 7세기, 이곳에서 활동하던 여성 시인 사포는 시를 통해 여성에 대한 사랑을 노래했다.

"'레즈비언'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의미를 벗어나서, 개개인이 갖는 감정적인 의미 때문에 굳이 그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싫어하거나 증오할 필요는 없잖아요. 레즈비언은 레스보스 섬에 사는 사람, 코리안은 코리아에 사는 사람, 아메리칸은 아메리카에 사는 사람. 이런 것처럼 그냥, 다 같은 사람이라는 걸 말하고 싶어요."

자신의 팟캐스트 방송 제목, 'Lite : 라이트'에 담은 의미처럼, 기무상씨는 낯선 존재를 불편하게 바라보는 이들 사이에서 불을 밝히고(light), 마음을 가볍게(light) 하며, 라이트(wright) 형제처럼 비행하는 중이다. 그가 방송을 시작하며 밝힌 취지처럼, "나와 당신을 위해서".

"그냥, 저는 이런 일을 하고 있고, 평범한 사람이에요."

기무상과 손을 맞잡은 또 다른 한 여인  기무상과 손을 맞잡은 또 다른 한 여인.
▲ 기무상과 손을 맞잡은 또 다른 한 여인 기무상과 손을 맞잡은 또 다른 한 여인.
ⓒ 기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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