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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서른넷 어느덧 벌써 30대 중반 나에겐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30대 중반 미친 듯이 일만 하며 살아온 10년이 넘는 시간 남은 것 고작 500만 원 가치의 중고차 한 대, 사자마자 폭락 중인 주식계좌에 500 아니 휴짓조각 될지도 모르지 대박 or 쪽박

2년 전 남들따라 가입한 비과세 통장 하나 넘쳐나서 별 의미도 없다는 1순위 청약통장 복리 좋대서 주워듣고 복리적금통장 몇% 더 벌려고 다 넣어둬 CMA통장 손가락 빨고 한 달 냅둬도 고작 담배 한 갑 살까 말까 한 CMA통장 이자 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놈 가끔 연락이 와 자기는 노가다 한대 노가다해도 한국 대기업 댕기는 나보다 낫대 이런 우라질레이션 평생 일해도 못 사 내 집 한 채"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노랫말 중에서

연봉이 400만원 올랐다

새로운 회사는 더 높은 연봉을 제시했다. 하지만...
 새로운 회사는 더 높은 연봉을 제시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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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넷. 35개월간의 산업기능요원 복무를 마치고 이제 진정한 '사회인'이 됐다. 지긋지긋한 이 생활만 끝나면 내 앞길은 탄탄대로일 거라고,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고 이 악물며 버텼는데…. 막상 복무만료가 돼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왠지 모를 허무함이 밀려왔다.

산업기능요원 복무를 일주일 남겨둔 상태에서 나는 구미1공단에 위치한 조그만 중소기업에 면접을 보게 됐고, 그 회사 품질관리팀에 합격했다. 복무가 만료되고 일주일 휴가를 보낸 뒤 그 다음주 월요일부터 출근하기로 했다. 그 회사에 합격하면서 내 연봉은 산업기능요원으로 복무하던 시절보다 400만 원 더 올랐다.

면접을 보던날 그 회사를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다. 당시 총무팀장과 품질관리팀장을 겸임하고 있던 팀장님께서는 새로운 사옥이 건설 중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 사옥에는 축구장도 있고 농구장도 있다는 자랑도 잊지 않았다. 알아보니 이 회사 회장님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 CEO와 친인척 관계였다. 내가 소속된 이곳은 '대기업 가족회사'였던 것이다.

입사 전인데... "회사 와서 얼굴 익히라"

면접을 보고 회사에 첫 출근하기까지는 2주일간의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그 2주 사이에도 팀장님은 가끔 내게 전화를 걸어서 입사하기 전이라도 시간이 날 때마다 회사에 와서 미리 팀원들 얼굴도 익히고 가까워질 수 있는 시간을 가지라고 조언했다. 처음엔 그 연락이 '가족'같이 잘 챙겨주는 회사의 이미지였지만 나중에 돌이켜 보면 '군대'의 느낌이 더 강했다.

그 연락에도 나는 소중한 내 시간을 즐기기 위해 '시간이 나면 가겠다'고 답하고는 첫 출근날까지 회사에 찾아가지 않았다. 그렇게 꿀같은 일주일간의 백수 생활을 끝내고 신기한 그 회사에 출근했다. 새로운 조직에 처음으로 출근을 하면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덩그러니 홀로된 기분이 든다. 더군다나 한 회사에서 2년이 훨씬 넘도록 근무를 해와서 그런지 오랜만에 느끼는 어색함에 어쩔 줄을 몰랐다.

회사의 출근 시각은 오전 8시 30분까지였다. 나는 일찍 나와 8시쯤 도착했는데 회사 마당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 사실을 안 팀장님은 첫 출근해서 어색해 하는 내게 "내일부터는 회사 안에 주차하지 말라"고 하셨다. 알고 보니 회사 안에 있는 주차장은 높으신 분들과 외부 손님들만 주차하는 곳이라고 했다. 주차장이 너르게 비워져 있어도 일반 사원들은 회사 안에 주차하면 안 됐다.

새로 취직한 회사는 대기업 통신사에 납품되는 이동통신 중계기를 개발 생산하는 회사였다.
 새로 취직한 회사는 대기업 통신사에 납품되는 이동통신 중계기를 개발 생산하는 회사였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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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함과 동시에 나는 팀장님의 소개로 품질관리팀 사무실에 입성했다. 당시 팀의 구성원들은 10명 내외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거래하는 대기업에 상주하고 있는 직원도 있고 외부에 있는 업체로 출근한 직원도 있어서 사무실에 몇 명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사무실에 있던 팀원들과 어색하게 인사를 나눈 뒤 한 선배사원에게 인계됐다.

PC 앞에 앉아 업무를 보는 선배사원 옆에 붙어서 어색하게 두리번 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가끔 담배를 피우러 가자고 하면 따라나가 함께 담배를 피우며 어색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회사에 처음 취직하면 그 회사에 대해 궁금한 게 많다. 월급은 언제 나오는지, 퇴근은 일찍 하는지, 주말엔 잘 쉬는지 온통 궁금한 것 천지였다.

당시 구미에 있던 중소기업 중에 입사를 하기 전 그런 부분을 명확히 알려주고 사람을 채용하는 회사는 거의 없었다. 궁금하지만 물어볼 수도 없었다. 돈을 벌기 위해 회사에 취직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지만, 그런 걸 대놓고 물어보면 '계산적인 놈'이라는 이미지가 생기지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런 부분에 대해서 아무런 정보 없이 입사했다. 단지 면접을 볼 때 '이전 직장에서 벌던 돈보다 400만 원 더 많은 금액을 벌게 해주겠다'는 것과 '입사하면 품질관리팀에서 근무를 한다'는 것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이렇듯 중요한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나누지 않고 사람을 뽑는 회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 회사들은 초기 '이직률'이 높은 편이었다.

참 좋은 조건이었지만... 내겐 '자유'가 더 중요했다

첫날 오전엔 선배 사원을 따라 함께 담배 피우러 다니고 오후에는 외주 생산업체에 제품검사를 하러 따라 나갔다. 당시 회사의 주력 제품은 통신사에 납품되는 '중계기'였다. 공장의 부지가 협소했기 때문에 당시 중계기를 만드는 생산 라인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회사는 흩어져 있는 사업체를 하나의 사옥으로 이전시키기 위해 새 사옥을 짓고 있는것이었다.

온종일 그 선배를 따라다니며 회사에 대한 정보를 캐냈다. 그렇게 알아낸 정보 중에 가장 암울한 것은 '퇴근'과 '휴일'이 없다는 점이었다. 당시 스물넷의 내겐 회사가 아주 튼튼하다거나, 직원 복지가 좋다거나 따위는 크게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단지 이 회사에 계속 근무를 하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자유'가 없겠구나라는 생각만 들었다.

지난 몇 년간 여러 회사를 다녔다. 그중엔 아주 환경이 열악한 곳도 있었다. '복지'라는 엄두도 못 낼 만큼 아무런 혜택을 못 받고 일한 곳도 있다. 또한 회사가 휘청거리면서 몇 개월치 월급을 받지 못해 생활고에 시달리던 적도 있었다. 그런 시절을 돌이켜 보면 나는 아주 좋은 회사에 취직을 한 게다.

이 회사는 대기업의 '가족회사'라 그런지 복지 수준은 그 대기업의 그것과 같은 수준이었다. 그리고 이 정도 회사면 쉽게 망하거나 월급이 안 나와서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등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내게 있어 그런 좋은 조건들도 '자유'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결국 나는 나의 철학과는 맞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하루 만에 그 회사를 계속 다니지 않기로 했고, 다시 백수로 돌아갔다.

이후 그 회사는 구미공단 요지에 '공장'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만큼 세련되고 멋진 사옥을 완공했고 회사 이름 또한 다른 이름으로 바꿨다. 그 사옥 바로 옆에는 대기업 공장이 있었는데, 사옥만 놓고 보면 내가 그만둔 회사가 더 나아보였다.

어차피 인생은 선택의 연속

인생은 B와 D사이의 C다.
▲ 선택 인생은 B와 D사이의 C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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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회사를 포기한 뒤 나는 지금까지 세 군데 회사를 거쳤다. 마지막에 다니던 대기업을 제외하고 그 앞에 다녔던 두 곳의 중소기업은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기업이 됐다. 하지만 내가 포기했던 멋진 사옥을 가진 회사는 지금도 여전히 잘 나간다. 그리고 여전히 그 회사의 사원들은 '퇴근'과 '휴일'이 없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후회도 오롯이 자신이 떠안아야 한다. 그렇다고 그 선택이 잘못된 건 절대 아니다. 나는 그 회사를 포기하고 지금은 역사속으로 사라져버린 두 곳의 회사에서 근무하면서 또 다른 무언가를 얻었고, 조금 더 큰 사람이 됐다.

철학자 사르트르는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다'라고 말했다. 어차피 우리는 죽을 때까지 수많은 선택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 어떤 선택을 한다해도 후회는 당연히 따라오기 마련이다. 단지 그 선택을 할 때 진정으로 내가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 어떤 선택을 해야 옳은 건지 잘 판단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 좋은 회사를 포기할 때 '안정'보다 '자유'가 내게는 더 큰 가치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 선택을 하고 처음 몇 년은 후회하기도 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그때를 돌이켜 보면 내 선택은 좋은 선택(Good Choice)이었다고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듣는 곳
http://www.bainil.com/album/365



태그:#대기업, #취업, #선택, #이동통신, #중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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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콘텐츠 대표 문화기획과 콘텐츠 제작을 주로 하고 있는 롯데자이언츠의 팬이자 히어로 영화 매니아, 자유로운 여행자입니다. <언제나 너일께> <보태준거 있어?> '힙합' 싱글앨범 발매 <오늘 창업했습니다> <나는 고졸사원이다> <갑상선암 투병일기> 저서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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