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에게 기쁨과 희망을 선사해야 할 한국 스포츠계가 2016년 새해 초부터 불미스러운 폭행 사태로 화제에 오르며 오점을 남겼다. 한국 역도의 간판스타로 꼽히던 사재혁이 폭행 논란에 휩싸이며 물의를 빚고 있다.

사재혁은 지난달 31일 한 송년회 모임에서 합석한 후배 선수 황우만을 폭행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도마에 올랐다. 황우만은 수술 포함 전치 6주의 중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역도연맹은 사실 파악 후 징계를 논의할 예정이다. 과정을 떠나 폭행 자체가 명확한 사실로 밝혀지면 징계는 불가피하다. 대한체육회 규정에 따르면 폭력 행위를 저지른 선수는 최대 3년 이상 선수 자격정지 또는 영구제명 징계를 받는다. 최악의 경우 사재혁의 선수인생이 이대로 궁지에 몰릴 가능성도 있다.

체육계의 뿌리 깊은 폭력 문화

'역도 메달리스트' 사재혁에게 폭행당한 역도 후배  2008년 베이징올림픽 남자 역도 금메달리스트 사재혁(31)이 폭행 사건에 휘말렸다. 사재혁은 지난달 31일 춘천의 한 술집에서 역도 후배들과 송년회를 했고, 그 자리에 또 다른 후배 A와 말다툼을 하다 폭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춘천의 한 병원에 입원한 A씨의 모습.

▲ '역도 메달리스트' 사재혁에게 폭행당한 역도 후배 2008년 베이징올림픽 남자 역도 금메달리스트 사재혁(31)이 폭행 사건에 휘말렸다. 사재혁은 지난달 31일 춘천의 한 술집에서 역도 후배들과 송년회를 했고, 그 자리에 또 다른 후배 A와 말다툼을 하다 폭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춘천의 한 병원에 입원한 A씨의 모습. ⓒ 연합뉴스


사재혁 사건은 한국 체육계의 잘못된 선후배 관행과 뿌리 깊은 폭력 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여 뒷맛이 더 씁쓸하다. 사재혁과 황우만 사이에서 발생한 폭력은 술자리나 길거리에서 생면부지의 타인과 우발적으로 시비가 붙어서 발생하는 폭행사건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다. '운동 선후배 관계'라는 한국적 특수성에서 가능한 일방적 폭력이기에 더욱 심각한 문제다.

선후배 간의 위계질서와 예의범절을 핑계로 한 군기 잡기는 체육계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오래된 고질병 중 하나다. 상명하복을 강조하는 수직적 선후배 관계에서 선배의 권위는 그 자체로 하늘보다 무서운 절대권력이자 법이 된다.

특히 폐쇄적인 구조 속에서 철저한 생존경쟁이 펼쳐지는 엘리트 체육계 내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스포츠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불과 지난해 9월에도 쇼트트랙에서 훈련 도중 고참급 선수인 신다운이 훈련 도중 후배 선수를 폭행하는 일이 발생하여 물의를 일으킨 경우가 있다. 빙상연맹은 신다운에게 경고와 2015~2016시즌 국제 대회엔 나서지 못하도록 처벌하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올해 상반기부터 시작되는 대표 선발 경기부터는 바로 복귀가 가능하여 결과적으로 또 솜방망이 징계라는 지적이 일었다.

이 밖에도 체육계를 둘러싼 폭행 파문은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다. 2009년 남자배구 국가대표팀에서는 당시 이상열 코치가 박철우를 구타해 무기한 자격정지를 받기도 했다. 2004년에는 여자 쇼트트랙 선수들이 코치진의 잦은 폭언과 폭력에 시달리다가 선수촌을 집단으로 이탈하기도 했다. 체육계 사정에 밝은 관계자들은 지금까지 공론화된 사건들은 사실상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더 큰 문제는 거듭되는 폭행 사건에도 불구하고, 정작 체육계 내부에서는 그 근본 원인이 일그러진 선후배 문화가 빚어낸 구조적 모순이라는 문제 인식 자체가 없다는 점이다.

거듭되는 폭행 파문, 근본 원인은 일그러진 선후배 문화

예전보다는 체벌이나 폭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체육계에서는 위계질서를 빌미로 한 폭력적 문화가 모양새만 바뀔 뿐 제대로 근절되지 못하고 있다는 시각이 많다. 심지어 체벌을 가장한 폭력이 위계질서는 물론이고 '경기력 형상'에도 도움이 된다는 식으로 인식하고 있는 체육인들이 아직도 곳곳에 적지 않다.

기성세대가 된 체육인들이 흔히 하는 레퍼토리가 바로 "우리 때는 맞으면서 운동했다"는 이야기다. 지도자의 선수에 대한 폭력이나, 선배가 후배에게 행사하는 폭력이 지도나 기강유지 차원에서 필요한 '체벌' 정도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행은 세월이 흘러서도 계속해서 세습된다. 맞으면서 운동을 배운 체육인들은 지도자가 되어서도 다시 때리면서 가르치는 법밖에 모른다. 체육계 특유의 폐쇄적인 구조 때문에 문제 인식을 느끼고 있더라도 어쩔 수 없이 집단의 분위기나 룰에 끌려가기 일쑤다.

실제로 이런 사태가 발생할 때마다 관련 연맹이나 협회는 근본적인 재발방지 대책보다는 눈 가리고 아웅식의 솜방망이 처벌로 논란을 덮으려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역시 파벌과 학연으로 묶여있는 체육계의 '제 식구 감싸기'라는 한국식 선후배 문화의 또 다른 부작용이다.

체육인들의 폭력 불감증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례로 왕기춘(유도)의 '체벌 옹호' 발언은 자주 회자된다. 왕기춘은 2014년 자신의 SNS에 선배가 후배에게 정당한 이유라면 폭력을 행사해도 무방하다는 식의 발언을 올려 누리꾼들의 뭇매를 맞았다. 왕기춘은 당시 운동부의 체벌문화를 비판하는 글에 대하여 "자신도 후배 시절에 많이 맞아봤다"라고 언급하며 "이유 없이 폭력을 가했다면 안타깝지만, 맞을 짓을 했으면 맞아야 한다. 선배를 욕하기 전에 본인이 뭘 잘못했는지 생각해 보라"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누리꾼은 '맞을 짓의 기준을 누가 정하나?' '법치국가에서 선배는 후배를 때려도 되냐'며 왕기춘의 경솔함에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많은 이들이 더욱 실망을 느낀 것은, 국내 유도계의 간판스타이고 후배들의 롤모델이라고 할만한 왕기춘 같은 선수도 이처럼 폭력문화에 아무런 거부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세뇌되어 있다면 그만큼 체육계에 그간 얼마나 일상적으로 폭력에 의한 위계질서가 만연해있는지를 반증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폭력 범죄자는 국가대표 자격 없다

사재혁, 송년회 자리서 역도 후배 폭행 물의 2008년 베이징올림픽 남자 역도 금메달리스트 사재혁(31)이 폭행 사건에 휘말렸다. 사재혁은 지난달 31일 춘천의 한 술집에서 역도 후배들과 송년회를 했고, 그 자리에 또 다른 후배 A와 말다툼을 하다 폭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지난 2014년 9월 24일 오후 인천 송도 달빛축제정원 역도경기장에서 열린 2014 인천 아시안게임 남자 역도 85Kg 급 경기에서 용상 2차 시기에 도전하기 위해 입장하는 사재혁

▲ 사재혁, 송년회 자리서 역도 후배 폭행 물의 2008년 베이징올림픽 남자 역도 금메달리스트 사재혁(31)이 폭행 사건에 휘말렸다. 사재혁은 지난달 31일 춘천의 한 술집에서 역도 후배들과 송년회를 했고, 그 자리에 또 다른 후배 A와 말다툼을 하다 폭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지난 2014년 9월 24일 오후 인천 송도 달빛축제정원 역도경기장에서 열린 2014 인천 아시안게임 남자 역도 85Kg 급 경기에서 용상 2차 시기에 도전하기 위해 입장하는 사재혁 ⓒ 연합뉴스


이번 사재혁의 폭행사태도 다름 아닌 그가 사재혁이었기에 더 충격적이고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사재혁은 여자 부문의 장미란과 함께 한국 역도계를 대표하는 간판스타였다. 2008 베이징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2012년 런던올림픽에선 팔꿈치 부상을 당하는 아픔을 극복하고 현역으로 재기에 성공하며 오뚝이 같은 투혼의 화신으로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사재혁의 근성이 노력보다 폭력을 통하여 단련된 독기라면, 사재혁은 더 이상 감동적인 미담의 주인공이 아니라 노예근성에 길들여진 불쌍한 운동기계에 불과하다. 사재혁은 이번 폭행 사건으로 리우올림픽 출전은 물론이고 자신이 역도 선수로서 평생 쌓아온 명성을 하루아침에 모두 날릴 위기에 처했다. 어떤 이유에서건 선배라는 권위를 앞세워 후배를 일방적으로 구타하고 중상을 입힌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행위다.

어쩌면 사재혁 역시 어린 시절부터 폭력적 지도방식에 길들여진 또다른 희생양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덧 선배가 되고 성인이 되어서 무엇이 잘잘못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은 누구에게나 동등하다. 분명한 사실은 아무리 기량이 뛰어나거나 큰 업적을 남긴 메달리스트라고 할지라도, 폭력 행위를 저지른 범죄자는 '국가대표가 될 자격'이 없다는 점이다. 사재혁이 유명선수이고 올림픽이라는 특별한 이벤트를 핑계로 솜방망이 처벌이나 면죄부를 받는다면 그것은 바로 한국체육계와 태극마크라는 가치를 모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모든 체육인들이 왕기춘이나 사재혁 같은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축구가 낳은 대표적인 스타인 박지성은 자서전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 운동 선배들에게 구타당했던 경험을 소개하며 "나를 때린 이들에게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얻어맞는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선배가 되면 결코 후배들을 때리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라고 밝혔다.

아울러 박지성은 "선배의 진정한 권위는 실력과 인품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라고 덧붙였다. 사재혁과 왕기춘, 그리고 아직도 폭력이 정당한 수단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는 체육인들이 한번쯤 곱씹어보야할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스포츠
댓글5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