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지막 호랑이를 다룬 영화 <대호>의 포스터.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를 다룬 영화 <대호>의 포스터. ⓒ NEW


내 조모는 1915년생, 외조모는 1920년생이다. 한국에서 호랑이가 마지막으로 포획된 게 1924년 겨울 강원도 횡성이었으니(동년 2월 1일자 <매일신보> 보도) 두 분은 호랑이와 동시대를 살아봤던 사람들인 셈이다.

요즘처럼 인터넷이나 케이블TV가 없었던 1970년대. 어린 아이들은 언제나 옛날이야기에 목말라 있었다. 당시 대여섯 살이던 나 역시 그랬다. 두 할머니가 먼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들려줬던 그 이야기들 중 최고봉은 누가 뭐래도 '호랑이 이야기'였다.

먼저 조모의 이야기를 떠올려본다.

"니 호래이(호랑이) 알제? 옛날 우리 뒷산에 동네 사람들하고 떨어져 살던 나무꾼이 산에서 호래이를 만났는기라. 그런데, 그 짐승이 어딘가가 아픈 표정이라 목구멍 안을 살피봤단다. 그런데, 거기 여자 비녀가 걸려있는 거 아이겠나. 그캐서 그걸 빼주니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저 깊은 산 속으로 가더란다. 근데, 그 이후로 해마다 겨울이 돼서 먹을 게 떨어지면, 나무꾼 사립문 앞에 노루고, 토끼고, 멧돼지고 이런 것들이 놓여있는 기라. 그걸 누가 가져다줬겠노? 그래. 바로 호래인기라. 호래이는 그냥 짐승이 아이데이. 영물이라 영물..."

다음은 외조모의 이야기.

"이거는 내가 동네 아지매한데 들은 이야긴데... 왜놈들이 조선 사람들을 사가꼬(고용해서), 오만 좋은 물건들을 가지고 부산으로 갔다카대. 그란데 해가 뉘엿뉘엿 할 때 산을 넘어가는데 범 한 마리가 딱 나타난기라. 스무 명도 넘는 장골(성인 남성)이 모조리 바지에 오줌을 지맀다카더만. 그날 딱 여섯 명이 죽었는데, 모조리 왜놈들인기라. 조선 사람들은 한 사람도 안 죽있다카데. 그 범이... 범은 다 아는 기라. 냄새만 맡아도 안다 안카나. 왜놈인지 조선 사람인지."

옛이야기가 영화로 부활하다

 <대호>에서 최민식은 조선의 명포수로 분해 열연한다.

<대호>에서 최민식은 조선의 명포수로 분해 열연한다. ⓒ NEW


최근 조선의 호랑이를 소재로 한 영화 한 편이 개봉했다. 박훈정 감독의 <대호>.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거대한 호랑이' 이야기다.

영화는 조선 호랑이를 잡아들이려는 일본군 고위관리와 조선인이기를 거부하는 젊은 친일파 관동군 장교, 그리고 당시 산짐승을 잡으며 삶을 영위하던 조선 포수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각각 인물들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복잡한 인생사의 의미를 찾고자 했다. 그간 유사한 소재를 다뤘던 이전 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진경을 선보이고 있다.

조선 최고의 사냥꾼 천만덕 역을 맡아 악전고투한 최민식의 연기는 조연 정만식과 김상호의 열연에 힘을 받아 눈밭에서도 빛을 발하고, 천만덕 아들 역의 성유빈은 겨우 열다섯 나이에 최민식에게 밀리지 않는 연기력을 선보여 극장을 찾은 이들을 놀라게 한다.

내 또래 40대 관객에게 <대호>는 할머니에게 듣던 옛이야기가 영상으로 장엄하게 부활한 격이다. 영화가 보다 사실적이고, 드라마틱하게 다가오는 건 탁월한 촬영기술과 빼어난 컴퓨터그래픽 때문이다.

<대호>에서 '지리산의 주인'으로 불리는 호랑이는 그 움직임과 포효가 실제의 범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사실적이다. 삭풍에 흔들리는 수염 한 가닥의 움직임과 피 묻은 입의 씰룩임까지 미시적으로 포착해낸 컴퓨터그래픽 기술이 놀랍다.

호랑이의 시점에서 숲과 바위를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카메라의 테크닉도 발군이다. 스포일러라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마지막 장면의 카메라 기법은 세련됨 속에 휴머니티까지 담아낸다. 무생물인 카메라에서 따스한 체온이 느껴질 정도다.

호랑이와 조선 포수가 선물하는 '그리움'

 <대호>의 한 축을 담당한 배우 김상호(좌측)와 정만식.

<대호>의 한 축을 담당한 배우 김상호(좌측)와 정만식. ⓒ NEW


 열다섯 살의 배우 성유빈은 <대호>에서 최민식의 아들 역으로 출연해 발군의 연기력을 선보인다.

열다섯 살의 배우 성유빈은 <대호>에서 최민식의 아들 역으로 출연해 발군의 연기력을 선보인다. ⓒ NEW


<대호>는 많은 부분을 사실에 기대고 있는 작품이다. 실제로 일제강점기이던 1917년 11월 일본의 부호 야마모토 타자부로를 수장으로 한 정호군(征虎軍)이 조선 호랑이 사냥에 나섰다. 조선 최고의 포수로 불리던 최순원, 강용근, 이윤회 등이 정호군에 참여했고, 이 때문에 그나마 몇 마리 남지 않았던 한국 호랑이는 씨가 마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인간이 만든 총이 없었다면 사방 1천리 밀림을 지배하는 왕의 지위를 수천 년 유지할 수 있었을 호랑이. 포효 한 번이면 백리 안의 늑대와 삵은 물론 하늘을 나는 까치와 까마귀조차 겁에 질리게 했다는 호랑이. 이틀이면 중국 흑룡강에서 강원도 화전민촌까지 종횡할 수 있었다는 호랑이. 150kg이 넘는 송아지의 멱을 물고 2m 50cm의 기와담장을 가볍게 뛰어넘는 400kg 거구의 호랑이. <대호> 속 '지리산의 주인'이 사라짐으로써 호랑이는 이제 남한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사실 호랑이만이 아니다. 그 호랑이만큼 용맹했던 조선의 포수들도 모두 사라졌다. 신식의 연발소총이 아닌 딱 한 발의 총알만이 장전 가능한 16세기 화승총으로 호랑이를 상대하던 강철의 심장들. 1920년대에 최신식 라이플로 무장하고 한국을 찾은 러시아 사냥꾼들은 스무 걸음 앞까지 다가온 푸른 안광의 집채만한 호랑이를 보고도 겁을 먹지 않는 조선 포수들에게 경악했다고 한다. <대호> 속 최민식이 연기한 천만덕은 바로 이 조선 포수의 모습이다.

옛이야기가 흥미로운 것은 그 안에 그리움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억만금을 주고도 돌아갈 수 없는 시대가 품고 있는 그리움. 영화 <대호>는 바로 이 그리움을 관객들에게 선물한다. 조선 호랑이와 조선 포수에 대한 그리움 말이다. 감히 단언할 수 있다. <대호>는 보기 드물게 '좋은 영화'다.


대호 호랑이 최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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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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