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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00*8255*30*8282119'

'삐삐'를 사용해본 세대라면 대략의 의미를 알 수도 있겠다. 당시 한 협회에서 보급한 '삐삐 수첩'에 따르면 '72'는 발신자 이름, '00'은 지금, '8255'는 빨리 오세요, '30'은 부산역, '8282'는 빨리빨리, '119'는 무척 급하단 의미다.

꽤나 구체적이다. 전화번호를 호출하고 말로 하면 될 사안을 '왜 이렇게 전하지'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들은 '보조적'이 아닌 주요 의사소통 수단으로 숫자를 활용했다. 이들은 누굴까. 그리고 친절하게 해석을 도와준 협회는 어떤 이들이 모여 만든 걸까.

또 다른 언어, 수어로 말하는 사람들 <반짝이는 박수 소리>
▲ 책표지 또 다른 언어, 수어로 말하는 사람들 <반짝이는 박수 소리>
ⓒ 한겨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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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보다 먼저 당부 하나. 길 가다 서로 손을 이용해 대화하는 이들을 보거든 부디 그냥 지나치시라. 고요하지만 누구보다 꽉 찬 삶을 사는 이들이니 측은해 하지도, 궁금해 하지도 마시라. 책 <반짝이는 박수 소리>는 그들의 이야기다.

동명의 영화를 제작하기도 한 이길보라 감독은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삶을 들려준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묵묵히 걸어온 인생의 자취를 모아 펴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목한 가정의 이야기다. 다만 이를 특별하게 만드는 건 사회요, 우리다.

이길보라 감독은 청각장애 2급의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 낯선 이가 이 감독의 엄마에게 "웨어 아 유 프롬"이라고 물으면 그는 옆에서 "우리 엄마는 청각장애인"이라고 답해야 했다.

'청각장애'란 말을 듣는 사람은 으레 "고생이 많겠구나"라며 가여워한다. 마치 외국인이 '하우 아 유'라고 물으면 '파인 땡큐 앤드유'라고 답해야만 할 것처럼 반사적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런 말을 했단다.

'무슨 고생?'이라 묻고 싶었다. 하지만 어렸던 저자는 어른 말에 토를 달면 '버릇없는 아이'가 된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단다. 청각장애 부모를 둔 아이들이라면 흔히 겪는 일이다. 역시 청각장애 부모를 둔 한민지씨는 책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털어놨다.

'시골에서 자랐는데, 버스를 기다리고 있으면 할매들이 불쌍하네, 장하네, 대견하네, 뭐 이런 이야기를 해요. 듣기 좋은 꽃노래라도 계속 들으면 안 좋잖아요. 난 충분히 사랑받고 행복하게 잘 자라고 있는데 할머니가 뭔데 그런 이야기를 하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 <반짝이는 박수 소리>에서

'수어'란 언어를 사용하는 소수자들일 뿐

영화 <반짝이는 박수 소리>의 한 장면. 이길보라 감독의 가족사진이다. 이 감독은 태어나서 부모에게 '수어'를 세상으로부터는 음성언어를 배웠다고 했다.
 영화 <반짝이는 박수 소리>의 한 장면. 이길보라 감독의 가족사진이다. 이 감독은 태어나서 부모에게 '수어'를 세상으로부터는 음성언어를 배웠다고 했다.
ⓒ KT&G 상상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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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청각장애인들의 의사소통 수단을 한국 사회에 널리 쓰이는 '수화'가 아닌 '수어'로 표현하고 있다. 그 이유는 '수화'도 어엿한 언어 중 하나기 때문이다. 올바른 방향이다. 수어를 공식 언어로 제정하자는 내용의 '수어기본법' 운동이 시작되면서 국립국어원도 '수화' 대신 '수어'란 용어를 채택해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또 책은 청각장애 커뮤니티에서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이들을 '농인'이라 칭하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들을 '청인'이라 칭한다고도 소개했다. '청각장애인'이란 단어는 '장애'가 부각되지만 '농인'이라고 하면 듣지는 못해도 '수어'라는 언어를 사용하는 소수 집단이란 의미가 있단다.

저자는 어린 시절부터 농인 부모의 통역사가 돼야 했다. 드라마를 볼 때면 옆에 앉아 내용을 손으로 전달해야 했다. 특히 힘들었던 건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가 '보증금 1천에 월20'이란 단어를 이해하는 일이나 아빠의 현재 재정 상황과 신용을 묻고 은행 대출이 가능한지를 묻는 일이었다.

책에서 저자가 아빠와 함께 미국을 다녀온 이야기가 나온다. 이 부분을 읽으며 느낀 건, 예전보다야 낫겠지만 우리 사회에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는 사실이다. 미국으로 향하는 오랜 비행 시간 동안 아빠는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국적기를 탔는데 기내에서 영화 한 편 보질 못했다.

한국영화는 자막이 없었다. 외국영화 역시 더빙이 돼 있더란다. 오히려 프랑스어, 중국어, 영어, 스페인어 자막은 있는데 한글 자막은 없었다. 한글을 2차 언어로 사용하는 한국 농인은 국적기에서 영화를 볼 수가 없었다.

직원의 간단한 손짓, 엄청난 환대로 느껴졌다

영화 <반짝이는 박수 소리>의 한 장면. 이길보라 감독과 동생(오른쪽)은 청각장애인의 삶을 살아가는 어머니와 아버지(왼쪽)와 살면서 수화를 배우고 통역을 한다.
 영화 <반짝이는 박수 소리>의 한 장면. 이길보라 감독과 동생(오른쪽)은 청각장애인의 삶을 살아가는 어머니와 아버지(왼쪽)와 살면서 수화를 배우고 통역을 한다.
ⓒ KT&G 상상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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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부녀는 '농인의 천국'이란 미국에 도착했다. 미국의 위력(?)은 입국심사대에서부터 발휘됐다. 아빠의 입국 심사를 돕기 위해 저자가 사정을 설명하자 직원은 다가오지 말라는 듯 검지를 양옆으로 흔들었다.

입국심사대의 직원은 아빠에게 손짓으로 모든 걸 설명했다. 입국에 필요한 모든 절차가 끝나자 직원은 여권을 돌려주며 오른쪽 손을 턱에 대고 앞으로 내밀었다. 'Thank you(땡큐)'란 뜻의 미국 수어였다.

참고로, 수어는 나라마다 고유한 체계와 문법을 가지고 있다. 물론 전 세계 농인이 서로 교류하기 위해 만든 '국제수어'도 따로 있다고 한다. 저자는 '직원의 간단한 손짓에 꼭 엄청난 환대를 받은 것만 같았다'고 순간을 기억했다.

미국에서 수어에 관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는 현장도 찾았다. 이를테면 수어의 움직임과 얼굴의 표정을 문자 언어로 옮기기 위한 것들이었다.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을 넉넉히 품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리라. 참 부러운 문화다.

'한국에서 '청각장애'는 듣지 못하는 벙어리, 말 못하는 병신과 같은 말이었다. 그들의 언어인 수어는 청각이 결여된 사람들이 사용하는 미개한 언어로 취급받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농인을 다른 감각을 지닌, 또 하나의 문화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인식했다. 또한 그들의 언어인 수어를 '언어'라고 규정했다.' - <반짝이는 박수 소리>에서

그들에게 '평범'을 허하라

국립국어원은 인터넷을 통해 '한국수어사전'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수어사전의 '감사합니다' 검색 결과 화면 갈무리.
 국립국어원은 인터넷을 통해 '한국수어사전'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수어사전의 '감사합니다' 검색 결과 화면 갈무리.
ⓒ 국립국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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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 그런 거창한 '연구'를 시작하자는 게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 문화는 정말 사소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저자는 농인 부모 아래서 자란 외국인이 쓴 책을 읽었던 당시를 떠올렸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외국 서적 저자에게 끝없이 질문했다.

"너희 부모님은 아픈 거야? 정상이 아니야? 목소리가 왜 저래? 너도 손으로 말해?"

그 외국인은 책에서 '정말 신물이 났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똑같은 질문들'이라며 '왜 다들 날 내버려 두지 않았던 걸까?'라고 물었다. 이 책을 읽으며 저자는 펑펑 눈물이 났단다. 마치 자신의 일기장을 보는 느낌이었다고도 덧붙였다.

저자는 책을 쓴 과정이 '자신의 몸 안에 켜켜이 쌓인 생채기를 하나둘 꺼내어 보여주는 일'이었다고 평했다. 그들에게 '평범'을 허하라. 물론 농인들이 배려가 필요한 소수자란 사실을 부정하자는 게 아니다. 배려가 필요하다고 '평범'하고자 하는 소망이 짓밟힐 의무는 없다. 짓밟을 권리는 더더욱 없다.

'미국에 와서 제일 신기했던 게 바로 그것이었다. 아무도 우리를 쳐다보지 않는다는 것. 한국에서는 길을 걸으며 손을 움직이면 오가는 사람들이 대놓고 쳐다보거나 쳐다보지 않는 척하며 우리를 쳐다보곤 했다. 사춘기 시절, 그게 제일 싫었다.' - <반짝이는 박수 소리>에서

그러니 부디 그냥 지나치시라. 영어를 쓴다고, 불어를 쓴다고, 태국어를 쓴다고 그 사람들을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지 않듯 말이다.

○ 편집ㅣ박순옥 기자

덧붙이는 글 | <반짝이는 박수 소리> (이길보라 지음 / 한겨레출판사 펴냄 / 2015.11 / 1만3000원)



반짝이는 박수 소리 - 또 다른 언어, 수어로 말하는 사람들

이길보라 지음, 한겨레출판(2015)


태그:#반짝이는 박수 소리, #이길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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