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88>의 성보라(류혜영 분)은 서울대학교에 다니는 운동권 학생이다. '동지가'를 따라 부르기도 하고, 민정당 당사 점거에 참여하기도 하는 그녀는, '지식인'으로서의 자각을 가지고 사회를 바꾸고자 했던 당시 대학생을 대변한다.

<응답하라 1988>의 성보라(류혜영 분)은 서울대학교에 다니는 운동권 학생이다. '동지가'를 따라 부르기도 하고, 민정당 당사 점거에 참여하기도 하는 그녀는, '지식인'으로서의 자각을 가지고 사회를 바꾸고자 했던 당시 대학생을 대변한다. ⓒ tvN


요즘 인기리에 방송되는 <응답하라 1988>, 그 드라마 속 성동일의 장녀 성보라는 운동권 여학생으로 등장한다. 그 당시 성보라 같은 운동권 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해서 제일 먼저 읽는 책 중에 하나는 바로 장 폴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었다. 대학 입학 초기 교양 강의에서도 종종 권장되었던 이 책에서는, 중간자로서의 지식인 정체성에 대해 논하고 있다.

장 폴 사르트르는 어떤 분야의 전문적 지식이나 기술을 가진 사람이 곧 지식인은 아니라고 말한다. 전문가들은 한 사회의 지배 체제를 이끌어 가는데 필수불가결한 존재이다. 이들은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중간자 위치에서 지배 계급 유지의 '집 지키는 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르트르는 대신 '자신의 권한 밖에', '자신과 무관한 일에 참여하는 귀찮은 존재'로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와 싸우는 특수성을 강조한다.

<지식인을 위한 변명> (장 폴 사르트르 지음 / 박정태 옮김 / 이학사 펴냄 / 2007.10. / 8000원)

▲ <지식인을 위한 변명> (장 폴 사르트르 지음 / 박정태 옮김 / 이학사 펴냄 / 2007.10. / 8000원) ⓒ 이학사

그래서 1970·1980년대의 대학생들은 '선택받은 자'로서의 지식인의 사명과 고뇌를 대학 입학의 '세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를 시대적 숙명으로 여겼다. 1988년의 시대상을 그려내는 대중적 드라마에서, 대학생 성보라는 고뇌하는 지식인의 표상, 운동권 학생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지식인은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 사이에서 자신의 사상적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고뇌하던 지식인은 자본주의의 발전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발현과 더불어 지배 계급 체제 속으로 흡입된다. 한때 운동을 했던 선배들이 대기업을 다니며 자연스레 소시민이 되어갔고, 그다음에는 IMF와 무한 경쟁의 사회 속에서 각자도생의 삶에 침몰당하였다.

그 과정에서 재벌과 관료, 법조의 커넥션이 대한민국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입시 전쟁을 마치고,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은 지식인으로서의 고민 이전에 불경기 안에서 그 관계 속에서 어떻게든 한 자리를 쟁취하기 위해 다시 취업 전쟁 속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청년 실업률이 치솟은 나라에서 <지식인을 위한 변명>은 사치가 되어갔다.

1988년에서 27년이 흐른 오늘 2015년

 드라마 <송곳> 속의 이수인. 장교 출신에 회사 간부직을 맡은 그는 카르텔 속 '내부자'이다. 그러나 체제에 편입되는 대신 그는 송곳 처럼 되기로 결심한다.

드라마 <송곳> 속의 이수인. 장교 출신에 회사 간부직을 맡은 그는 카르텔 속 '내부자'이다. 그러나 체제에 편입되는 대신 그는 송곳 처럼 되기로 결심한다. ⓒ JTBC


그렇게 모두가 저마다의 밥그릇조차 찾아먹기 버겁다고 외치는 세상에서 2015년에 등장한 영화와 드라마들은 저 오래된 지식인의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낸다. 물론 2015년의 그들을 지식인이라고 칭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바로 재벌과 관료, 법조 커넥션 속의 '내부자들'로, 혹은 참을 수 없는 '송곳' 같은 존재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지난 11월 29일 12부작으로 종영한 JTBC의 <송곳>, 이 드라마의 주인공 이수인은 프랑스계 유통 대기업 푸르미의 과장이다. 간부인 만큼 그는 카르텔의 내부자이다. 하지만 드라마 속 그는 재벌의 밥그릇을 지켜주는 대신 정리해고를 당할 푸르미 직원들의 편에 선다. 드라마는 그런 그를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중간자적 위치의 지식인'이라 말하지 않는다. 대신, '세상에 걸림돌 같은 인간들, 삐죽 튀어나오는 송곳 같은 인간들'이라며 인간의 존재론에서 접근해 들어간다.

드라마 속 지현우가 분한 이수인의 '송곳론'은 사르트르의 '지식인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의 존재를 고민하고, 앞잡이가 되는 대신 자신과 무관한 일에 참견하려 드는 귀찮은 존재를 드라마는 송곳형 인간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런 자신의 송곳 같은 심성을 어쩌지 못해 결국 노조를 만드는 데 앞장서는 이수인이 그 이전 세대의 운동권으로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는 노동상담소장 구고신과 연대한다. 세대와 세대를 이은 지식인의 상징적 만남이다.

 영화 <내부자들>의 검사 우장훈은, 권력의 커넥션 속에서 좌절한 후 반기를 든다. 그는 '내부자'가 되어 이 고리를 끊고자 한다.

영화 <내부자들>의 검사 우장훈은, 권력의 커넥션 속에서 좌절한 후 반기를 든다. 그는 '내부자'가 되어 이 고리를 끊고자 한다. ⓒ (주)쇼박스


그렇게 내부자에서 피지배계급으로 들어간 이수인이 드라마 <송곳>에 있었다면, 영화 <내부자들>은 대놓고 내부자들의 각성을 이야기한다. 대한민국을 확고하게 쥐고 흔드는 재벌-언론-법조의 커넥션 속에서, 결국 그 커넥션을 궤멸할 가능성은 그 내부자에서 찾을 수 있다고 드라마는 말한다.

그래서 영화 속 손을 잃은 안상구(이병헌 분)는 조국일보 주필 이강희(백윤식 분)의 똘마니였고, 조폭 이병헌 대신 내부 고발의 총대를 멘 우장훈(조승우 분)은 검찰 카르텔의 또 다른 똘마니였다. 내부자로 입신양명해보려 했던 그들이 토사구팽 당한 후 자신들이 들었던 칼의 향방을 바꾸어 카르텔의 궤멸에 나선다. 이 한바탕 신명나는 판타지 영웅극이 바로 영화 <내부자들>이다.

드라마 <송곳>은 지배 계급의 카르텔에 동조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적 객관자로서의 지식인, 즉 송곳 같은 이들의 고뇌에 집중했다. 반면 영화 <내부자들>은 그 카르텔의 개로서 내부자들의 숙명에 대한 서사에 집중한다.

송곳 혹은 내부자가 되어

 드라마 <애인있어요>의 주 이야기는 '사랑'에 관한 순애보이다. 하지만 제약 회사 내의 비리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도 이 드라마의 중심을 이루는 주요 스토리이다.

드라마 <애인있어요>의 주 이야기는 '사랑'에 관한 순애보이다. 하지만 제약 회사 내의 비리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도 이 드라마의 중심을 이루는 주요 스토리이다. ⓒ SBS


그런가 하면 이혼한 남녀의 다시 만난 사랑 이야기로 화제가 되는 <애인있어요>에는 또 다른 지식인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다. 이 드라마에서 드러난 이야기의 주된 줄기는 4년 전 불륜으로 아내를 저버렸던 남자 최진언(지진희 분)이 이끌어간다. 그는 여전히 아내를 잊지 못하고 기억을 잃은 아내 도해강(김현주 분)을 찾아 다시 사랑을 이루고자 하는 순애보를 그린다. 하지만 그런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타고 저변에 흐르는 이야기의 본질은 결이 좀 다르다.

제약 회사 회장의 아들이었지만 아버지의 부도덕한 사업 방식에 불편해하며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있던 최진언. 그는 아내를 치워달라며 아버지에게 매달렸다. 대신 회사로 돌아갈 것을 아버지와 약속했다. 그 약속에 맞추어 불륜녀와 유학을 마친 그는 아버지 회사의 중역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기억을 잃은 아내 도해강을 만나면서, 그는 아버지 회사의 변호사로 온갖 궂은 일 처리를 마다치 않았던 아내의 기억을 찾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부도덕한 제약 회사의 '헬게이트'로 들어선다. 회사는 신약 개발 과정에서 벌어진 부작용을 덮기 위해 살해 등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 부도덕한 경영의 현실을 알게 된 그는, 진실을 찾기 위해 뛰어든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결백하다'라며 외면했던 그 진실에 뛰어든 최진언의 각성. 백석이란 인물을 만나 정의로운 변호사로 거듭난 도해강. 이 둘은 '천년 제약'의 개로 살았던 지난날을 회개하며 후반부에 들어섰다. 사랑과 별개로, 이 이야기 역시 <애인있어요>의 주요 줄거리 중 하나이다.

이렇듯 우리 사회의 정의를 논하는 드라마나 영화들은 이제 굳건하게 자리 잡은 대한민국의 재벌-언론-법조-관료의 카르텔의 내부자들로부터 시작된다. <복면 검사>의 의로운 주인공은 검사였고, 남은 생의 마지막을 정의롭게 펼친 <펀치>의 박정환 역시 검사였다.

변화하는 사회 체제 속에서 편입됐던 1970·1980년대의 지식인. 2015년의 대중문화는 이처럼 체제에 흡입된 지식인이, 새로이 각성하는 면모를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게 아닐까? 강고한 체제 속에서 새로운 '지식인의 존재론'을 모색하는 건 아닐까?

지배 체제가 강고해지는 반면 그에 저항하는 대체 세력의 무기력이 내부자나 내부 고발의 소극적 표현으로 등장하는 건 안타깝다. 하지만 현실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내부자나 송곳으로 돌출한 영화나 드라마 속 지식인의 선택이, 매번 판타지적인 영웅 서사로 마무리되어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 편집ㅣ곽우신 기자


덧붙이는 글 <지식인을 위한 변명>(장 폴 사르트르 지음 / 박정태 옮김 / 이학사 펴냄 / 2007.10. / 8000원)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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