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송곳>

JTBC <송곳> ⓒ JTBC


"분명 하나쯤은 뚫고 나온다. 다음 한 발이 절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저 자신도 자신을 어쩌지 못해서 껍데기 밖으로 기어이 한 걸음 내디디고 마는 그런, 송곳 같은 인간이."

지난 11월 29일 종영한 JTBC 드라마 <송곳>의 가장 큰 강점은 간결하면서 정곡을 찌르는 대사다. 등장인물이 던지는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는 그야말로 송곳이 되어 보는 이들의 마음 한구석을 콕콕 찌른다.

<송곳>은 2003년 6월 어느 날 프랑스계 대형할인점 푸르미 일동 지점에서 벌어지는 가상의 이야기다. 보면서 마음이 아파진다. 송곳 같은 대사 때문이 아니다. <송곳>의 이야기는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우리의 이야기여서다. 그뿐만 아니다. 옛 속담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그러나 <송곳>을 보고 있노라면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아니,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뒷걸음질 쳤다.

<송곳> 최종회에서 주인공 이수인 과장(지현우)은 단식 투쟁에 돌입한다. 이러자 회사는 부담을 느꼈는지 대화를 제의한다. 지금은 어떨까? 노동자들이 크레인으로, 공장 굴뚝으로, 송전탑으로, 대형 전광판으로 올라가 농성에 들어간다. 인간으로서 하루 버티기도 힘든 곳에서 100일, 200일, 심지어 1년 가까이 농성을 벌이지만 자본은 꿈쩍도 안 한다. 그래서인지 주인공 구고신 부진노동상담소장의 대사는 마음 한구석을 찌르다 못해 후벼 판다.

"인간이 인간한테 어떻게 이렇게 독하게 구나 싶죠? 우린 인간 아니요. 그 사람들한테 우린, 책상에 앉아 더했다 뺐다 하는 종이에 박힌 숫자고 시키는 대로 하다가 새끼 낳아 길러서 머릿수만 채우면 되는 가축이요."

이렇듯 <송곳>은 자본에 의해 짓밟힌 인간성을 일깨운다. 아마도 이 점이 이 드라마, 그리고 원작 웹툰의 최대 강점일 것이다.

노동은 바로 인간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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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노동은 인간의 문제다. 곰곰이 생각해보자. 왜 우리가 일하는가? 먹고 살자고, 아픈 남편 병원비 대려고, 아이들에게 공부 한 시간이라도 더 시키려고 노동 시장에 나온 것 아니던가? 행여 일자리를 잃게 되면 삶 자체를 송두리째 잃어버리니 갑질, 진상질 참아가며 일하는 것 아닌가? 불행하게도 자본은 이런 절박한 심리를 파고들어 정당한 노동의 대가는 최대한 안주면서 인간의 노동력을 극한까지 착취하려 한다. 자, 이 지점까지는 누구나 다 안다. 그래도 아프다. 그러나 <송곳>은 더 아프게 찌른다.

푸르미 일동점에서 노조가 생기기까지 과정은 순탄하지 않다. 그런데 막상 노조를 조직해보니 조합원들끼리 내분이 생긴다. 편 가르기는 엄마 뱃속에서 배워 나오는 습성인 것 같다.

이수인은 숱한 우여곡절 끝에 파업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굳힌다. 어렵게 결정을 내렸지만, 파업마저 쉽지 않다. 조력자로 나선 노무사 주용태는 '적', '신자유주의', '초국적 자본', '투쟁' 등 무시무시한 낱말들을 쉴 새 없이 쏟아내며 초반부터 강경 자세로 나온다.

이수인은 주용태가 못내 미덥지 않다. 이수인의 관심은 조합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안위다. 반면 주용태는 푸르미 노조의 파업은 그저 더 큰 투쟁을 위한 불쏘시개일 뿐이다.

이수인과 주용태의 대립에서 다시 한 번 인간의 문제가 튀어나온다. 신자유주의도 좋고, 초국적 자본도 좋고, 투쟁도 좋고, 적을 타도하는 것도 좋다.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어떤 선험적 명분도 조합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벌이는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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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은 세상의 변화를 꿈꾸는 진보에게 고민거리를 던진다. 자본은 악하다. 그러나 좀 시시하다. 이에 맞선 노동자들 역시 시시하기만 하다. 구고신은 이수인을 이렇게 독려한다.

"선한 약자를 악한 강자로부터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거란 말이요."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일은 진보세력이 마땅히 해야 할 임무다. 그러나 무조건 상대를 악마화하는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시시한 약자들은 신자유주의니 초국적 자본이니 하는 거창한 명분 따위는 잘 모른다. 그저 일한 만큼 대가를 받고, 온갖 갑질과 진상의 횡포에서 자유로워지고, 궁극적으로 인간답게 살고 싶은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모아 놓고 '투쟁'이니 '파업역량 강화'니 과격한 구호를 들이밀어봐야 돌아오는 건 '과격노조' 딱지일 뿐이다.

차라리 자본이 인간의 본성을 더 잘 이해하고 있다. 자본은 시시한 약자를 극한까지 쥐어짜지만, 어느 순간 흘러나오는 '악' 소리엔 민감하게 반응한다. <송곳>에서도 노조가 생긴다고 하니까 지점장인 갸스통 이하 전 관리자가 총출동해 갖가지 혜택을 약속하며 직원들을 회유하니까 말이다.

또 다른 장면을 보자. <송곳> 10회 차에서 구고신은 청소용역 노동자 야유회를 연다. 이런 자리는 늘 술이 문제다. 구고신은 이때 꾀를 낸다. 노동자 가운데 제일 목소리 큰 사람에게 술 관리를 맡긴 것이다. 노조 조직 전 이 노동자는 다짜고짜 구고신의 멱살을 잡아챈 악연이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주변의 노동자들은 의아해한다. 구고신은 이런 말로 안심시킨다.

"못났다 못났다 할수록 더 못나고 싶은 게 사람이야. 잘 날 기회를 주고 믿어. 그럼 나아져."

구고신의 계산은 정확했다. 이 노동자는 특유의 카리스마(?)를 발휘해 자신의 과업을 완수한다.

현실로 눈을 돌려보자. 현 정부는 숱한 위기를 겪었다. 그런데 정부가 궁지에 몰릴 때마다 어김없이 어버이연합, 고엽제 전우회 같은 정부를 무조건 감싸는 집단들이 구원투수로 등판한다.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은 가족에게 버림받고 오갈 데 없이 떠돌거나, 베트남전 참전이 유일한 인생경력인 '못난' 사람들이다. 정권은 이런 사람들에게 접근해 '애국'할 기회를 주고, 덤으로 점심에 일당까지 쥐여준다. 이들로선 국가가 고마울 수밖에 없다.

자만한 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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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진보진영은 자만심에 가득한 모습이다. 그저 옳은 일이니까 '돌격 앞으로' 구호만 외치면 일제히 들고 일어날 것으로 착각한다. 이제 적을 구고신의 대사는 자만에 사로잡힌 진보주의자들의 옆구리를 콕 찌른다.

"사람들은 옳은 사람을 따르지 않아. 좋은 사람을 따르지."

이 나라 사람들 대부분은 노동자다. 입고 있는 옷이 작업복이냐 양복이냐, 기계를 다루느냐 컴퓨터를 다루느냐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노조' 하면 얼른 쇠파이프 들고 과격 시위를 벌이는 광경이 뇌리를 스쳐간다. 물론 일차적인 원인은 자본과 유착한 정권과 언론의 악선전이다. 그러나 인간 존재와 노동이 갖는 신성불가침의 가치를 이해 못 하고 오로지 '악한 강자 대 선한 약자'식의 이분법적 대결로 몰아가는 진보진영의 무능도 무시할 수 없는 원인이다.

이수인 역의 지현우, 구고신 역의 안내상 등 배우들의 연기는 그야말로 '끝내줬다.' 특히 <왔다! 장보리>, <내 딸 금사월>에서 조연으로 얼굴을 비치던 안내상은 <송곳> 구고신에서 제대로 끼를 발산했다. 정민철 부장으로 분한 김희원의 연기도 찬사가 아깝지 않다.

<송곳>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웹툰이 계속 연재 중이란 뜻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우리 사회 이곳저곳에서 <송곳> 같은 비인간적인 노동착취가 횡행하고 있다는 말이다. 참 힘겨운 싸움이다. 자본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 센 지금이다. 그러나 기죽지 말자. 그보다 살아 있으려 노력하자.

"살아 있는 인간은 빼앗으면 화내고 맞으면 맞서서 싸웁니다."

○ 편집ㅣ곽우신 기자


송곳 구고신 지현우 안내상 이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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