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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만하면 한 번씩 나오는 '기자 드라마'를 볼 때마다 내 손발은 오그라든다.

"네 캡.(사회부 사건팀 지휘기자)" 대개 이 대사 쯤에서 오그라듦은 절정에 다다른다. 그리고 다음날 회사에 출근해 "선배 어제 그 대사 봤어요?"로 점심시간 문을 연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자 드라마에도 현실성이 더해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너무 곱다. 안 씻어도 곱고, 괴로워도 곱고, 피곤해도 곱다. 무엇보다 드라마 속 기자에겐 찌질함이 없다.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고민과 생활의 냄새가 없다.

사람 냄새 나는 '청춘' 기자들의 이야기

풋내기 신입기자들의 솔직궁상 사는 이야기 <난지도 파소도블레>
▲ 책표지 풋내기 신입기자들의 솔직궁상 사는 이야기 <난지도 파소도블레>
ⓒ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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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연봉을 더하면 '1억'이라는 놈, 아니 '분'들은 얼마짜리 예물을 하는지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반지 한 쌍에 '700만 원'이란다...(중략)...'18K 반지 한 쌍에 50만 원이나 하더라'는 얘기를 하려 했던 나는 그 얘기를 듣고 가만 입을 다물었다...(중략)...

2012년 현재 평균 결혼 비용이 1억7000만 원대란다. 한 달에 200만 원 겨우 버는 내가 밥 한 술 안 먹고 숨만 쉬고 살면 85개월, 꼬박 7년 하고도 한 달을 더 모아야 하는 돈이다.' - <난지도 파소도블레> '보통 결혼'에 1억7000만 원, 이거 너무 잔혹해

20, 30대 젊은 기자 넷이 모여 쓴 <난지도 파소도블레>에는 드라마에 없는 사람 냄새가 있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기자'들도 보통 청춘들처럼 결혼 준비에 허리가 휘청이고(상황을 잘 모르는 친척들은 기자인 내가 큰 돈을 버는 줄 알지만), 잘 나가는 친구의 한 마디에 기가 죽는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 출근 버스에 끼어 땀을 뻘뻘 흘리는 것으로 매일 아침을 시작하고, 해외 취재차 찾은 미국에선 영어 울렁증 때문에 이것 저것 선택해야 하는 게 많은 커피 대신 레모네이드를 주문하기도 한다(좀 '찌질'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사람 사는 게 다 그렇듯 기자도 그렇다).

'풋내기 신입기자들의 솔직궁상 사는 이야기'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젊은 기자 네 명은 '새내기 기자'로 살면서 겪은 취재 뒷이야기와 마음 속 고민, 생활 이야기들을 읽기 쉽게 풀어썼다(혹, '현실의 부대낌' 없는 깔끔한 이미지의 기자를 상상한 분들은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내 기사 보고 욕한 분을 찾습니다

'언론이 쓰면, 대중은 읽고, 포털이 인기 검색어를 만들면, 다시 언론이 쓴다. 그러니까 이런 순환 구조 안에서 포털이 보우하사 밥 먹고 살고 있는 나는 언젠가부터 좋은 기사라는 게 조회 수 많이 올릴 수 있는 기사인지, 아니면 애초 내가 연예기자가 되기로 다짐한 이유처럼 재미와 의미를 추구하는 기사인 건지 아리송해졌다.' - <난지도 파소도블레> 나도 '좋은' 연예 기사를 쓰고 싶다.

'정치부 기자들은 의원, 당직자, 보좌관 대부분을 선배라고 부르곤 한다. 취재원과 나이 또는 역직 관계가 애매해질 때의 상황을 모면하고자 생긴 이 바닥 관습이라나..(중략)...관습을 알고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상황도 간혹 있었다.

70세를 넘긴 조부모님과 연세가 비슷한 국회의원을 '선배'라고 부르는 20대 기자들을 볼 때다...(중략)...화장실에서 아버지뻘 되는 당직자 얼굴을 떠올리며 "선배! 점심 먹어요^^"라고 수십 번 연습도 해 봤다. - <난지도 파소도블레> 막내 기자, 화장실에서 '선배' 수십 번 부른 사연

책 속엔 기자로 일하면서 하게 된 근본적인 고민들도 무겁지 않게 담겨 있다. 저자들은 "언시생들한테 하등 쓸모가 없는 책"이라고 말하지만, 실제 기자가 된 후 겪게 될 작지만 중요한 고민들을 엿볼 수 있으니 꼭 그렇다고 할 수도 없다.

전국에 생중계되는 방송에서 스스럼 없이 질문을 던지는 기자들을 보고 '저 사람들은 타고 났나' 싶겠지만, 불행하게도(?) 그런 '철면피 기능'은 타고나는 게 아니다. 70대 국회의원을 선배라고 부르기 위해 화장실에서 수십 번 "선배"라고 부르는 연습을 하는 게 현실이다.

<난지도 파소도블레> 저자 최규화, 이현진, 김지현, 이주영 기자(오른쪽부터)
 <난지도 파소도블레> 저자 최규화, 이현진, 김지현, 이주영 기자(오른쪽부터)
ⓒ 한국기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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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누군가는 나에게 친히 '쌍년'이라고 쪽지를 보냈다. 콕 집어 어떤 것인지도 가늠할 수 없는 내 기사가 그 사람을 로그인하게 만들었다.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적고 내 이름을 눌러 쪽지를 쓰고 전송까지 누르는 수고스러움을 마다하지 않은 사람의 마음은 어땠을까.' - <난지도 파소도블레> '기레기'는 당신을 만나고 싶다

사람들이 '기레기'라고 욕하면 씁쓸하고, 애써 쓴 기사에 악플이 달리면 '내가 이 기사를 왜 그렇게 열심히 썼나' 싶다. '당연히 기자도' 기사에 달린 악플, 자신에게 날아온 욕설이 담긴 쪽지를 보고 고민을 하고 상처를 받는다. 악플없는 기사가 드물다지만, 몇 년이 지나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게 또 댓글이다.

같은 이름의 블로그에 2년 동안 쓴 글을 모아 낸 <난지도 파소도블레>에는 이렇듯 기사로는 말하지 못한 기자들의 속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동안 드라마가 보여준 게 수면 위 백조라면, <난지도 파소도블레>는 물 속을 보여준다. 그것도 아주 투명하고 적나라하게. 현실은 드라마도 동화도 아니니 '행복하고 우아하게 잘 살았습니다' 같은 건 없다. '직업이 기자인' 생활인으로 살아가려면 열심히 물 속에서 발버둥치는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책을 통해 질풍노도 청춘으로서의 '기자'를 만날 수 있다.

물론 '드라마 보다 더 드라마같은 현실'도 있다. '집 같은 사람'인 한 신입기자는 '바다 같은 사람'인 다른 신입기자를 '난지도 파소도블레'에서 만나 글로 청혼을 했고, 둘은 부부가 됐다.

대기자도 스타기자도 없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책. 기자들이 퇴근 후 침대에 누워 이불킥을 날리게 된 이야기가 궁금한 분들께 적극 추천한다.

○ 편집ㅣ최은경 기자



난지도 파소도블레 - 풋내기 신입기자들의 솔직궁상 사는 이야기

이현진 외 지음, 작은책(2015)


태그:#난지도 파소도블레, #김지현, #이주영, #이현진, #최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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