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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마당극을 볼까 싶었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세상과 거기에 맞추기 위해 안간힘 쓰는 일상은 극장에 가서 영화 한 편 보기도 어렵게 했다. 그래서 공연을 보러 와 주겠느냐는 요청에 약간의 피로감을 느낀 터였다.

지난 8월의 어느 날 오후 8시. 대전예술의전당 야외공연장. 어둠이 내린 지상에 공연을 알리는 조명등이 곳곳에 켜지고, 천 석 규모의 공연장은 어느새 빽빽하게 사람들로 채워졌다. 부모님과 함께 온 꼬마, 청년, 중장년 그리고 노인까지 세대와 계층을 아우르는 관객이 마당극이 펼쳐질 공간을 둥글게 둘러싸며 자리 잡았다. 나도 그 판에 끼어 앉았다. 이 밤, 이곳에서 무엇을 보게 될까? 

덩덩 쿵더쿵 덩덩 쿵더쿵, 시작을 알리는 풍물소리가 시원하게 뿜어졌다. 관객 사이에서 짙은 분장을 한 배우들이 마당 한가운데로 뛰어나왔다.

덕만이 결혼원정기
 덕만이 결혼원정기
ⓒ 우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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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만이 결혼 원정기.'

배우는 관객 사이에서 천연덕스럽게 연기를 한다. 그러다 관객과 거리낌 없이 대화도 나눈다. 농촌 총각 덕만이는 베트남 처녀 흐엉을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고 가족이 된다. 마을 주민은 그런 그들을 아끼며 돕는다.

공연장을 울리는 배우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서, 능숙한 연기에서, 우리의 혼례 춤을 추는 몸짓에서 오랜 노력의 시간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덕만이결혼원정기
 덕만이결혼원정기
ⓒ 우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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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프로다. 너른 마당을 자유롭게 휘저으며 풍물의 장단에 맞춰 춤추고 노래하며 웃음을 주는 프로. 배우는 몸으로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자, 봐라. 우리는 이렇게 당신들과 함께 있다'라고.

관객은 자주 웃었다. 배우의 너스레와 익살에 크게 웃었다.

덕만이결혼원정기
 덕만이결혼원정기
ⓒ 우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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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혼자 하는 게 익숙해진 내게, 어디를 가나 스마트폰만 줄곧 보고 있는 사람뿐인 이 사회에서, 서로를 마주한 채 보는 공연. 그 풍광이 낯설기 그지없다. 하지만 웬일인지 어색하지 않은 건 다 저 능청스런 배우들 때문이리라.

이날 밤, 파편화된 기계의 부품 같은 차가운 삶에서 배우의 열기와 관객의 열기가 만나 사람을 데우는 마당극을 봤다. 사람을 한데 모으는 마당극이다. 마당극은 살아 있었다.

마당극패 우금치를 찾아가다

대전광역시 중구 대흥동, 마당극패 우금치 연습실. 한눈에 봐도 열악한 텅 빈 공간에 커다란 거울 두 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배우들은 다음 날 공연 '청아 청아 내 딸 청아'를 연습 중이다. 배우이자 극작가이며, 연출가인 류기형 대표가 홀로 의자에 앉아 배우의 연기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 무엇 때문인지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심 봉사와 뺑덕 어멈 그리고 심청이를 데려가는 상인이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며 대사를 한다. 심청이는 인당수에 빠졌다가 살아나 왕비가 되고 우여곡절 끝에 심 봉사와 다시 만나며 연습이 끝났다.

류기형 대표가 "잔소리시작 한다"고 하자, 배우들이 모두 바닥에 앉아 볼펜을 잡고 수첩을 꺼내 든다. 대표는 배역 하나하나를 분석하며 직접 연기를 해 보인다.

"다들 전체적으로 약해. 정성을 더 해야지. 표정도 몸 동작도 더 크게 과장되게 해야 해. 여기서 죽어라 해야, 그렇게 해야 관객에게 조금이라도 전달되는 거야… 약해졌어, 다들. 초심으로 돌아가야지, 초심을 잃지 말자고!"

흰머리가 드문드문 한 중년의 단원이 고개를 끄덕인다. 엊그제 한 일도 기억나지 않는 속도의 시대에, 초심을 강조하는 연출가와 수긍하는 배우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1990년 창단했고 지금은 2015년이다. 이들은 25년 동안 무엇을 놓치지 않으려 애써왔던 것일까?

회의가 끝나자 모두 식사를 준비한다. 연습실 바닥에 여러 개의 상을 붙이고 함께 둘러앉는다. 점심은 밥 당번이 마련한 돈가스가 주 반찬이다. 예술공장 두레에서 보내 준 마늘 장아찌도 상에 오른다. 소박한 밥상은 허리띠를 팍 조른 살림을 엿보게 했다.

식사를 마치고 이날 이곳에 온 목적, 마당극장 '별별마당'으로 간다. 어떤 곳인지 보고 싶었다. 별별마당을 마련하기 위해 우금치 단원들이 큰 빚을 냈다는 소문만 들은 까닭이다.

길 안내는 막내 배우 김연표님이 맡아준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대전의 오래된 거리를 걷고 있다. 한때는 번창했을 구 도심으로 보였다.

별별마당
 별별마당
ⓒ 우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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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상당히 낡아 보였다. 1973년에 지어 교회로 사용했던 것으로 최근 10여 년은 비어있었다. 굳게 잠긴 문을 열어 내부로 들어가 본다. 허름한 외관과 달리 골조가 튼튼하다. 공간도 넓어 연습장과 공연장으로 사용할 수 있겠다. 위치도 도심에 있어서 이만하면 괜찮다는 뜻밖의 생각이 든다. 빈 교회를 이렇게 활용할 수 있다니 참신하다.

별별마당
 별별마당
ⓒ 우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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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마당
 별별마당
ⓒ 우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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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극장. 소극장은 여러 개 있지만 마당극을 연습하고 후대에 전수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 그래서 지금 우금치는 별별마당을 만들고 있다. 자타공인 베테랑 마당극단이지만 지금껏 터를 잡지 못해 이곳저곳을 떠돌며 공연해 왔다.

창립 후 단원들이 푼푼이 모아 마련한 지하 연습실, 계속하는 풍물연습으로 주민 항의에 쫓겨 마음껏 연습할 수 있는 곳으로 옮긴 산속에서 10여 년을 보냈다. 기량은 쌓였지만 그곳에서는 시민과의 교류가 어렵다며 나온 도심, 비싼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어 시골 폐교로 갔다. 그래도 시민과 함께해야 한다며 다시 나온 대흥동. 이러기를 수차례, 20대의 청년들은 이제 중년이 됐다.

그동안 우금치는 창작극 40여 편, 전국 2500회 공연을 하며 인정받는 극단이 됐다. 상도 수차례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떠돌이 생활 중이다. 중년의 선배는 후배가 자신보다 좋은 여건에서 마당극을 펼칠 수 있기를 바란다. 꼭 그렇게 해주고 싶다고 한다. 사라져 가는, 잊혀 가는 마당극을 터를 굳힘으로써 뿌리내리게 하려 한다.

건물 매입비 6억 원. 선배 단원들 개개인이 집 담보로 대출받은 돈 4억 원에 건물 담보대출 2억 원을 합쳐 마련했다. 하지만 내부 리모델링 비 2억 원을 마련할 길이 없다. 현재 상황은 그렇다. 그래서 우금치를 응원하는 이들이 '별별마당 건립 시민추진위원회'를 꾸리고 후원금을 모금하는 중이다.

별별마당을 완공하면, 마당극의 지속과 문화공간으로써 의미가 클 것이다. 멋있는 계획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자기 소유의 자산을 구매하는 것도 아닌데 마당극을 위해서 빚까지 지는, 쉽지 않은 선택을 스스럼없이 하는 이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해졌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 편집ㅣ김준수 기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다음 뉴스펀딩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마당극, #우금치, #별별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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