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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서른넷 어느덧 벌써 30대 중반 나에겐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30대 중반 미친 듯이 일만 하며 살아온 10년이 넘는 시간 남은 것 고작 500만 원 가치의 중고차 한 대 사자마자 폭락 중인 주식계좌에 500 아니 휴짓조각 될지도 모르지 대박 or 쪽박

2년 전 남들따라 가입한 비과세 통장 하나 넘쳐나서 별 의미도 없다는 1순위 청약통장 복리 좋대서 주워듣고 복리적금통장 몇% 더 벌려고 다 넣어둬 CMA통장 손가락 빨고 한 달 냅둬도 고작 담배 한 갑 살까 말까 한 CMA통장 이자 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놈 가끔 연락이 와 자기는 노가다 한대 노가다해도 한국 대기업 댕기는 나보다 낫대 이런 우라질레이션 평생 일해도 못 사 내 집 한 채"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노랫말 중에서

눈앞의 이익을 버리고 용기를 냈더니 정말 내가 원하던 곳에서 '산업기능요원'이 되었다
▲ 용기 눈앞의 이익을 버리고 용기를 냈더니 정말 내가 원하던 곳에서 '산업기능요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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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조립 라인의 백 커버 공정 보조로 근무한 지 한 달이 지났다. 한자리에서 똑같은 일을 아무런 생각 없이 계속 반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래 일해보진 않았지만 그렇게 생산직에서 근무를 해보았기 때문에 나는 절대 라인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는다. 얼마나 힘들고 고된 지 알기 때문이다.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하면서 한 달을 버틸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곧 라인에서 빠져 '수리사'가 될 거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친하게 지내던 수리사 형이 계속 새로운 정보를 업데이트해서 알려주었기 때문에 그 날만 기다리면서 버티고 또 버텼다. 그렇게 수습 기간 한 달을 버텨냈더니 회사에서는 병무청에 나를 '병역 특례병'으로 복무 신고를 했다. 그렇게 간절히 원하던 '산업기능요원'이 된 거다.

나는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전자과'를 졸업했다. 그리고 내가 가진 자격증 역시도 '전자기기 기능사'다. 만약 눈앞에 이익만을 쫓았더라면 아마 나는 내 전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샌드위치 판넬 제조회사에서 스펀지 가루 먼지와 싸우며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용기를 내서 진정으로 원하는 길을 찾다 보니 이렇게 내 전공과도 잘 맞는 회사에 취직해서 좋은 분들을 만나 내 역량을 더 키울 기회까지 생기게 되었다.

병역 특례 신고서가 접수되고 일주일가량이 지나니 신고한 날로부터 병역 특례 복무가 시작되었다는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쯤 나는 생각지도 못하게 부서를 옮기게 되었다. 내가 백 커버 공정에서 일하던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품질경영팀 신 과장님은 생산팀장님께 나를 자기네 부서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생산팀장님은 나를 대형 라인의 수리사로 키울 거라며 거절을 했고 그렇게 한 달을 실랑이하다가 결국 같은 고등학교 출신인 신 과장님이 계신 품질경영팀으로 보내는 걸로 결정을 했다고 한다. 나는 학창시절에도 공부는 뒷전이었고 사고만 치고 다니던 '꼴통'이었는데 단지 '고향 후배' 그리고 '고등학교 후배'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이렇게 챙겨주려고 하신 선배님들께 매우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지금에 와서 내 인생을 거꾸로 돌아본다고 해도 나의 인생에 있어 전환점은 그 두 분을 만나면서였던 것 같다. 두 분 덕에 적성에 맞지 않는 생산라인을 탈출할 수 있었고 학교 다닐 때 그렇게 하기 싫던 공부가 뒤늦게 재미있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훗날 더 큰 자리로 도약할 수 있었던 발판이 되기도 했다.

선임이 생산라인으로 돌아간 이유... 대리님의 '노총각 히스테리'

대리님의 노총각 히스테리에 못이겨 자리를 박차고 다시 생산 라인으로 가버린 형이 있었다
▲ 스트레스 대리님의 노총각 히스테리에 못이겨 자리를 박차고 다시 생산 라인으로 가버린 형이 있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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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옮긴 품질경영팀은 크게 '수입검사'와 '출하검사' 2개의 파트로 구성이 되어 있었다. 수입검사는 외부 업체에서 들어오는 자재나 임가공 제품들의 입고 품질을 관리하는 곳이었고 출하검사는 TV 조립라인을 거쳐 완제품으로 판매될 TV 완성품의 품질을 관리하는 곳이었다. 그중에서 나는 수입검사 파트에 배치가 되었다.

품질경영팀 사무실 바로 옆방이 수입검사실이었다. 수입검사실에는 이미 2명의 기능직 사원이 근무하고 있었다. 원래는 총 3명의 기능직 사원이 근무를 했는데 근무하던 1명이 자기 적성에 맞지 않는다며 생산라인으로 보내달라고 했고 그렇게 빈자리에 내가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수입검사실에서 근무하는 3명의 업무분담은 회로, 기구, 디자인으로 나누어 졌다. 나는 그중에 회로물을 담당하게 되었다. 기구류를 담당하던 형은 나보다 3살이 많았는데 그 형의 고향도 부산이었고 특례를 받는 중이었다. 게다가 그 형은 내가 부산에서 다니던 회사에서 친하게 지내던 형과도 같은 고등학교 출신으로 서로 아는 사이라고 했다. 그 덕에 그 형과 나는 금방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리고 디자인 쪽을 담당하던 여사원은 나보다 1살이 많은 누나였다.

또한, 우리팀에는 '검사원'의 직무를 가진 기능직 사원들 이외에 품질경영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관리직' 사원들이 있었다. 그 관리직 사원들도 수입검사 쪽과 출하검사 쪽으로 업무가 나누어져 있었다. 나를 품질경영팀으로 데리고 간 신 과장님은 수입검사 쪽을 총괄하고 계셨고 그 밑에 대리님이 한 분 계셨는데 그분은 우리 회사 영상사업본부장님의 친동생이라고 했다. 그 대리님은 남자인데도 여성스러운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 대리님은 아주 꼼꼼한 성격이라 '수입검사'라는 일에 아주 잘 맞는 분이었다. 하지만 '노총각 히스테리'를 부하 직원들에게 자주 풀곤 했다. 나도 수입검사실에서 일하는 시간이 지날수록 대리님을 대하기 힘들어졌다.

가끔 투입된 자재의 품질 점검차 생산라인에 들어가 보곤 하는데 친해진 현장분 중에 수입검사실에서 일했던 형이 그 대리님 때문에 너무 힘들었었다며 마음속에 큰 앙금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앞으로의 내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못 버티면 또 내가 싫어하는 생산라인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버텨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덧붙이는 글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듣는 곳
http://www.bainil.com/album/365



태그:#병역특례, #산업기능요원, #품질경영팀, #수입검사, #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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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콘텐츠 대표 문화기획과 콘텐츠 제작을 주로 하고 있는 롯데자이언츠의 팬이자 히어로 영화 매니아, 자유로운 여행자입니다. <언제나 너일께> <보태준거 있어?> '힙합' 싱글앨범 발매 <오늘 창업했습니다> <나는 고졸사원이다> <갑상선암 투병일기> 저서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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