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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서른넷 어느덧 벌써 30대 중반 나에겐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30대 중반 미친 듯이 일만 하며 살아온 10년이 넘는 시간 남은 것 고작 500만 원 가치의 중고차 한 대 사자마자 폭락 중인 주식계좌에 500 아니 휴짓조각 될지도 모르지 대박 or 쪽박

2년 전 남들따라 가입한 비과세 통장 하나 넘쳐나서 별 의미도 없다는 1순위 청약통장 복리 좋대서 주워듣고 복리적금통장 몇% 더 벌려고 다 넣어둬 CMA통장 손가락 빨고 한 달 냅둬도 고작 담배 한 갑 살까 말까 한 CMA통장 이자 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놈 가끔 연락이 와 자기는 노가다 한대 노가다해도 한국 대기업 댕기는 나보다 낫대 이런 우라질레이션 평생 일해도 못 사 내 집 한 채"(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노랫말 중)

양손에 짐을 들고 찾아간 회사는 모 대기업의 협력업체들이 모여있는 단지안에 있었다
▲ 공장 양손에 짐을 들고 찾아간 회사는 모 대기업의 협력업체들이 모여있는 단지안에 있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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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나는 두 번째 출가를 결심했다. 구미 공단에 있는 전자회사 중에 '병역 특례'가 가능한 회사를 찾아 취업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인터넷을 통해 열심히 병역 특례를 받을 수 있는 회사를 찾다가 구미3공단에 있다는 중소기업에 입사를 하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무 살의 나는 참 어리석었다. 취업을 한다면서 그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한 번 가보지도 않은 채 무작정 짐을 싸서 집을 나왔다. 면접 절차도 없이 당장 취업 시켜준다고 말하는 정도의 회사인데 얼마나 열악한 환경일지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그저 열아홉에 고등학교 실습사원으로 취업했던 '내 첫 직장과 비슷하겠거니..' 라고만 생각했다.

양손 가득 짐 가방을 들고 취업한 회사로 갔다. 그 회사는 모 대기업의 협력업체로 그 대기업의 협력업체들이 모여있는 단지내에 있었다. 회사에 도착 하자마자 조그만 사무실 한켠에 내 짐을 놔둔 채 나는 바로 현장에 투입됐다.

처음 입사한 나에게 신입 사원에 대한 교육이나 급여 설명, 병역 특례를 언제 시켜줄 건지, 기숙사는 어딘지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그저 부족한 사람 한 명 왔으니 어서 생산 라인에 투입시켜 일을 시킬 생각만 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와 가슴 아픈 두 번째 이별을 하며 구미로 올라와 버렸는데 이제서야 뭔가 잘못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렇게 반나절이 흐르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점심은 단지 안의 협력 업체들이 모두 함께 이용하는 구내식당에서 먹었다. 화장실을 잠시 들렀다가 식당으로 가니 벌써 줄이 길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점심시간도 40분 밖에 되지 않아서 밥 먹고 돌아서면 다시 생산라인으로 투입돼 일을 해야 한다.

첫 날이라 안 그래도 어색한 나에게 살갑게 말을 붙여 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나를 현장에 밀어 넣은 그 관리자 조차도 나를 챙겨주지 않았다. 혼자 점심을 먹으면서 생각했다.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는 건지. 그리고 따뜻한 우리 집이 그리워졌고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자유로운 환경에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던 이전 직장도 그리웠다. 그렇게 나는 밥을 먹고 사무실 한켠에 놔뒀던 내 짐을 챙겨 도망을 나와 버렸다.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타지에서 외톨이가 되다

양손에 짐을 들고 반나절만에 도망쳐 나와 한참을 걸었다. 하지만 걸어도 걸어도 계속 공장들만 보였다.
▲ 도망 양손에 짐을 들고 반나절만에 도망쳐 나와 한참을 걸었다. 하지만 걸어도 걸어도 계속 공장들만 보였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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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나온 그곳은 공단지역이라 한참을 걸어도 온통 공장들 뿐이었다. 양손에 짐 가방을 들고 공장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길가를 30분쯤 걸었을 때야 비로소 나는 갈 곳이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의기양양하게 집을 나와 여기까지 왔는데 반나절만에 도망나와 버렸다는 이야기를 하며 집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타지에서 외톨이가 되어 버렸다.

한참을 길 한가운데 짐을 들고 서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집을 나올 때 내 수중엔 이전 직장에서 받은 내 마지막달 월급 80만 원이 있었다. 이 돈으로 당분간 버티면서 다른 회사를 알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묵을 곳이 필요했다. 방을 구할 돈은 없으니 당분간 저렴한 모텔을 이용하기로 했다.

타지에서 집도 없는 백수상태로 모텔에서 생활하며 매일 같이 생활정보지를 뒤져 일자리를 구했다. 당장 먹고 살 걱정을 하다보니 병역 특례 회사를 구하는 건 뒷전이 되어 버렸고 일단은 일할 곳이 필요했다. 하지만 내가 당장 취업을 할 수 있는 곳은 아주 환경이 열악한 소기업들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내 수중에 남은 돈은 거의 다 떨어져 가고 있었다. 그 무렵 한 용역업체에 이력서를 들고 찾아갔다. 그때는 '용역'의 개념도 잘 모를 때였다. 구인광고를 보다가 대기업 같이 좋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다는 걸 보고 찾아간 곳이었는데 그곳은 공장이 아닌 한 사무실이었고, 사람을 뽑아 다른 회사로 인력 파견을 해주는 곳이었다.

그렇게 그 용역업체 소속으로 한 중소기업에 취직을 했다. 그 회사는 환경이 꽤 괜찮은 곳이었다. 기숙사로 아파트를 제공해주기까지 했으니 모텔을 전전긍긍 하던 나에게는 제일 반가운 일이었다.

나는 용역 회사 소속 사원이었지만 그 아파트 기숙사에 입주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내 모텔 생활은 끝이 났다. 하지만 내 방황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그 용역 회사가 내 월급의 일정비율을 떼어간다는 사실도 몰랐다.

덧붙이는 글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듣는 곳
http://www.bainil.com/album/365



태그:#병역특례, #취업, #공단, #중소기업, #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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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콘텐츠 대표 문화기획과 콘텐츠 제작을 주로 하고 있는 롯데자이언츠의 팬이자 히어로 영화 매니아, 자유로운 여행자입니다. <언제나 너일께> <보태준거 있어?> '힙합' 싱글앨범 발매 <오늘 창업했습니다> <나는 고졸사원이다> <갑상선암 투병일기> 저서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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