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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나눔의 집 전경.
▲ 광주 나눔의 집 광주 나눔의 집 전경.
ⓒ 변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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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군 위안부, 정신대, 일본군 성노예........ 그네들을 어떻게 불러야 맞는지. 숱한 논란이 있어왔으나(일본군 '위안부'가 맞는 표현이라고 한다.), 그 어떤 언어도 그녀들의 상처를 고스란히 담아내기엔 역부족인 것처럼 보였다.

나라 잃은 서러운 역경의 현대사로 인해, 사과를 강력하게 요구하지 못한 소극적인 정부로 인해, 매주 수요일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친 채 그들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일본 당국에 의해, 마지막으로 알고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우리 방관자들로 인해 상처받은 영혼들이 머무는 곳. 나눔의 집은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조용한 마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눔의 집 한켠에 자리잡은 피 맺힌 외침들.
▲ 광주 나눔의 집 나눔의 집 한켠에 자리잡은 피 맺힌 외침들.
ⓒ 변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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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롭고 조용한 마을에 피맺힌 한이 흐르고 있었다. 평생을 일본 당국의 사과를 요구하시다가, 끝내 용서할 기회조차 박탈당한 채 잠이 드신 분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죽어서도 피 끓는 심정으로 일본군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었다.

"일왕은 사죄하라! 일본은 배상하라!" -故 김외한
"타국만리 끌려가 밤낮없이 짓밟혔네. 오늘도 아리랑 눈물 솟는 소녀 아리랑. 내 꿈을 돌려주오. 내 청춘을 돌려주오." -故 배춘희
"한 많은 생을 살다가 여기 잠들다." -故 박두리
"'못 다 핀 꽃'의 주인, 연꽃되어 잠드시다." -故 김순덕
"전생 없는 세상으로 나비 되어 가소서." -故 지돌이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공식 사죄하라." -故 김화선
"나는 일본의 전쟁범죄를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故 이용녀

광주 나눔의 집
▲ 광주 나눔의 집 광주 나눔의 집
ⓒ 변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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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직까지 분노를 가슴에 담고 생을 이어가고 계신 할머니들도 이곳에 계셨다. 몇몇은 몸을 가누지도 못할 정도로 노쇠하셨고, 그중 몇은 산책을 다니며 담소를 즐길만큼 정정하셨다.

몸을 가누지 못하시는 분들은 단순한 목욕도 여러 사람의 손을 필요로 했다. 남학우 몇몇이 그들을 휠체어로 옮겨 태우면, 우리가 받아 옷을 벗겨드리고, 기저귀를 빼고, 목욕을 시켜드렷다. 옷을 갈아 입는 것도, 로션을 바르는 것도 그들에겐 벅찬 일이다. 의사소통도 쉽지않았다. 물이 뜨겁기라도 하면,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뜨........"라는 외마디 뿐이었다.

발을 씻겨드릴 차례가 오면, 우리는 거친 수세미를 집어들어야 헀다. 잔뜩 움츠린 발은 모진 세월만큼 딱딱하게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명랑했던 10대의 소녀가 거동도 힘든 백발 노인이 되기까지 도대체 그들은 얼마나 큰 분노와 설움을 가슴에 안고 살아왔던 걸까.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빼빼하게 말라 있어서 뼈마디가 모두 느껴졌다. 이 작은 몸으로 그녀들은 역경의 한국 현대사를 견뎌냈다. 그리고 몸도 마음도 피투성이가 된 채 고국으로 돌아왔을 땐, 책임자도 조력자도 없었다. 모르쇠로 일관하는 가해자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 방관자만 있을 뿐이었다.

피해자는 피투성이가 되어 벌건 눈으로 소리치는데, 가해자는 없단다. 자기들은 모르는 일이란다. 고국은 자신의 무능이 부끄럽지도 않은지 소극적인 자세로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바짝 마른 그녀의 손을 다시 한 번 꼭 잡았다. 그녀의 손에는 아무런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반면, 다소 정정하신 분들은 식사를 끝내고 함께 산책을 했다. 그러고는 벤치에 앉아 이런 말을 하셨다.

"학생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다시는 일본 놈들이 우리 나라를 무시하지 못하게 해야 혀."

아, 머리가 하얗게 센 소녀는 아직까지 나라 걱정뿐이다. 또 다시 나라를 잃으면 어쩌나 우려하고 있었다. 해방 후, 그녀들을 따뜻하게 품어주지 못한 민족일지라도, 적극적으로 일본 당국의 사과를 요구하지 않는 방관자일지라도, 상권과 미관을 이유로 소녀상 설립을 반대하는 사회일지라도, 대통령의 누이가 일본으로 건너가 "계속되는 사과 요구는 부당"하다고 인터뷰 한 나라일지라도, 백발이 된 소녀는 아직까지 가슴 따뜻하게 조국을 향한 짝사랑을 지속하고 있었다.

"저는 책임감을 느껴요." 같이 갔던 후배는 이런 말을 남겼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12일의 토요일엔 예보에 없던 비가 내렸다. 바야흐로, 나뭇잎도 피를 토하는 한 많은 가을이다.


태그:#일본군 '위안부', #위안부, #일제치하, #수요집회, #나눔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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