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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성립기념 사진 (1919. 10. 11)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성립기념 사진 (1919. 10. 11)
ⓒ 도산안창호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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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나라가 들썩였다. 광복 70년. 그리고 8월 15일 해방의 날. 하루종일 대한민국 곳곳에서 이 여름 날씨보다 더 뜨거운 감격이 용솟음쳤다. 일제 치하 친일파를 처단하는 영화 <암살>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광복절날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거리 곳곳에 높은 빌딩들은 여지없이 태극기를 걸어 광복절을 축하했다. 조금은 '오버'스럽다는 지적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이어지고 있는 일본의 위안부 망언, 독도 왜곡, 극우 총리 아베의 평화헌법 수정 등으로 고조된 반일 감정, 일부 인사들의 매국적 친일적 망언에 대한 반발이 뒤섞였다. 유난히 이번 광복절 70주년은 유난히 국민들 가슴을 뭉클하고 쫄깃하게 하는 날로 거대한 울림을 주는 느낌이다.

이 안에서 필자는 한 사람을 떠올린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오늘의 감격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우리가 지금 이 시대에 독립의 영웅이라고 칭송하는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의 사상적 지도자이자 독립운동의 체계적, 철학적, 실질적 방향을 제시하고 몸소 실천한 그야말로 해방의 견인차 역할을 한 바로 그 한사람. 바로 그가 도산 안창호다.

도산 안창호, 그는 누구인가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 안창호(1919)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 안창호(1919)
ⓒ 도산안창호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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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 선생(1878년 11월 9일~1938년 3월 10일)은 평남 강서군에서 출생했다. 한학을 배우다가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우리 땅에서 남들이 싸우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가 받는 처절한 광경을 보고 깨달은 바 있어 1895년 상경했다.

그는 구세학당(救世學堂)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운다. 1897년에는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평양에 지부를 설치하기 위한 만민공동회에서 그 유명한 쾌재정(快哉亭)연설로 대중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종교지도자이며 교육자인 남강 이승훈이 이 연설에 감명을 받고 독립운동을 하게 되었다고 하니 그 연설이 당시 민중들에게 얼마나 갚은 영향을 주었는지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도산 선생은 그 후 1907년 29세 때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를 결성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09년에 청년학우회, 1912년 대한인 국민회, 1913년에 흥사단, 1928년에 한국 독립당을 조직한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본격적인 반일 투쟁을 위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려던 도산 선생은 이듬해 일경에 의해 체포되어 국내로 끌려왔으며 두 차례의 옥고를 치른 끝에 결국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38년 3월 10일 세상을 떠난다. 

도산 선생은 대구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세워 출판 사업을 전개하는가 하면, 평양에 자기회사를 세우고 대성학교를 세워 민족의 지도자 양성에 헌신했다. 1913년에 흥사단을 창립하고 3·1운동 직후 중국 상해로 가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국무총리대리,·노동총장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의 해방을 위해 노력했다. 1926년에는 만주일대를 답사하며 이상촌 건설을 추진하고 1931년에는 흥사단보(興士團報)를 발행해 민족의 부흥과 발전을 위한 국민의 자질혁신과 청년인재 양성 등 흥사단 이념구현에 주력했다. 하지만 이 모두 그가 해왔던 일에 비하면 아주 일부분이다.

도산 선생은 지금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 가사를 만든 작사자라는 주장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그 외에도 윤치호, 민영익 등이 거론된다) 영화 <암살>에 등장하는 의열단, 이 의열단의 식민통치기구 파괴공작을 당시 안창호 선생이 지원한 것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드물다. 미국에서 흥사단원 김종림이 1920년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에 한인비행학교를 설립, 공군 조종사를 훈련시키는 데 도산 선생이 영향을 끼친 것도 우리가 잘 모르는 사실이다.

그를 기억하는 것이 후손의 사명

이처럼 도산 선생이 김구와 윤봉길, 안중근, 이승훈 등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사상적 독립투쟁 방향을 제시하고 영향을 주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단순히 이론에만 능한 지식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직접 몸으로 뛰어들어 60 평생 나라를 지키기 위한 무장투쟁론자로서의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더불어 그의 인품이 고결하고 깨끗하여 지도자로서의 귀감이 되었기 때문이리라.

동우회 사건으로 수감된 후 수형사진(1937)
 동우회 사건으로 수감된 후 수형사진(1937)
ⓒ 도산안창호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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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은 제 민족을 위해 일함으로 인류와 하늘에 대한 의무를 다한다"라고 애국 애족적인 인생관을 밝힌 바 있는 도산은 실제로 평생을 자신과 가정의 편안함을 돌볼 겨를도 없이 오로지 위기에 처한 나라와 겨레를 구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다.

그리하여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독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마침내 두 차례의 옥고를 치른 끝에 타계하였다. 그는 말로써가 아니라 몸으로 직접 앞장 서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준 진정한 애국적 지도자였다.

광복 70주년을 맞은 대한민국은 도산 안창호 선생과 같은 수많은 애국지사들은 물론이거니와 아직 규명되지 않은 수많은 독립영웅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렸던 여러 애국적 지도자들과 이름 없는 민중들의 투쟁이 있었기에 지금의 번영도 가능했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이 사실 앞에서 위대한 지도자, 애국의 상징인 도산 안창호 선생과 함께 위대한 독립투사, 이름 없는 독립영웅들의 뜨거웠던 애국심을 우리 가슴속에 비춰보는 것은 그야말로 가슴 뛰는 후손의 사명은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위키트리>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안창호, #흥사단, #지도자, #광복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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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와 대학원에서 모두 NGO정책을 전공했다. 문화일보 대학생 기자로 활동했고 시민의신문에서 기자 교육을 받았다. 이후 한겨레 전문필진과 보도통신사 뉴스와이어의 전문칼럼위원등으로 필력을 펼쳤다. 지금은 오마이뉴스와 시민사회신문, 인터넷저널을 비롯, 각종 온오프라인 언론매체에서 NGO와 청소년분야 기사 및 칼럼을 주로 써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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