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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서른넷 어느덧 벌써 30대 중반 나에겐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30대 중반 미친 듯이 일만 하며 살아온 10년이 넘는 시간 남은 것 고작 500만 원 가치의 중고차 한 대 사자마자 폭락 중인 주식계좌에 500 아니 휴짓조각 될지도 모르지 대박 or 쪽박

2년 전 남들따라 가입한 비과세 통장 하나 넘쳐나서 별 의미도 없다는 1순위 청약통장 복리 좋대서 주워듣고 복리적금통장 몇% 더 벌려고 다 넣어둬 CMA통장 손가락 빨고 한 달 냅둬도 고작 담배 한 갑 살까 말까 한 CMA통장 이자 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놈 가끔 연락이 와 자기는 노가다 한대 노가다해도 한국 대기업 댕기는 나보다 낫대 이런 우라질레이션 평생 일해도 못 사 내 집 한 채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가사 中

지난 2000년 열아홉에 취직한 나의 첫직장은 경북 칠곡군 북삼면에 있었다. 북삼 중에서도 조그만 중소기업 공장들이 모여 있는 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회사 근처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곳은 조그만 구멍가게 하나뿐이었다. 그 덕에 여기서는 돈을 쓰고 싶어도 쓸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취직을 하면 돈을 버니까 사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사고 맛있는 것도 마음대로 사먹고 재미있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런 환경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됐다.

이 회사 생산직에 근무하는 구성원들은 대부분 고등학교 실습사원과 20대초중반까지의 젊은 사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고등학교 실습사원을 뽑으면 일반사원 급여의 80%정도만 책정해서 지급하면 되니까 싼맛에 매년 실습생을 받고 있었다. 실습 나온 고등학생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실습생 신분이 끝나면 대부분 회사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갔다. 남은 사람들은 그 회사가 좋아서라기보다 군대를 가는 대신 회사에 근무를 하면 되는 '산업기능요원'이 되기 위해 남곤 했다.

기숙사는 회사 식당 건물 2층과 3층 그리고 옥상에 추가로 지은 가건물까지 해서 총 3개층이었다. 나와 같은 조에 배정된 친구와 나는 3층 가건물에 있는 방 하나에 함께 배정이 되었다. 그 방에는 이미 우리 말고도 2명의 주인이 더 있었는데 우리와 반대조에 일을 하는 형들이었다. 형들과는 조가 반대조라 부딪힐 일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교대근무가 바뀌는 주말에는 주간과 야간 근무자 모두가 기숙사로 들어오기 때문에 친구와 나는 방을 뺏기고 거실에 나와 자곤 했다.

그 형에게 안 맞은 실습생이 없었다

폭력 무서운 형에게 맞지 않은 실습생이 없었다
▲ 폭력 무서운 형에게 맞지 않은 실습생이 없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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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회사에 고등학생 실습사원은 10여 명 정도 있었다. 우리 학교 이외에도 부산경남, 대구경북 근교 학교들에서 실습을 나온 학생들이었다. 우리보다 몇달 일찍 실습을 나온 같은조 친구가 있었는데 같은 부산 출신이라 우리와 가깝게 지냈다. 그 친구가 말하길 형들 중에 조심해야 하는 형이 있는데, 실습생들 중에 그 형에게 불려가서 안 맞은 친구가 없다고 했다.

그 형은 우리와 같은 옥상 가건물 기숙사를 썼는데 다행히 우리 옆호실이었다. 하지만 형들끼리는 워낙 친하고 여기가 밖에 나가도 할 게 없는 동네라 술도 구멍가게에서 사와서 기숙사에서 마시곤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그 형과도 마주칠 일이 잦아졌다.

한두 달이 지나면서 우리학교에서 추가로 더 학생들이 왔다. 2+1으로 다른 곳에 취업을 했다가 못 버티고 튕겨져 나온 친구들이었는데 그들은 다시 학교로 복귀할 수 없기 때문에 또 다른 직장으로 실습을 나가야 한다. 그런 친구들이 우리 회사로 온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친구들 중에 여러 명이 그 무서운 형에게 불려가 불미스러운 일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회사를 그만둘 때까지 나와 같은 방 쓰던 친구는 그 형에게 한 번도 따로 불려가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인데 나와 같은 방을 쓰던 친구가 그 무서운 형이 어릴 적부터 아주 좋아하던 친구와 닮았다고 한다. 그 덕에 그 형은 그 친구와 나에게 잘 대해 주었고 유일하게 그 형에게 맞지 않은 인물들로 남을 수 있었다.

하루 일당 10만 원짜리 24시간 철야근무

돈 몸 축나는 줄 모르고 24시간 철야근무를 하곤 했다
▲ 돈 몸 축나는 줄 모르고 24시간 철야근무를 하곤 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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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화 라인의 '오퍼레이터'라는 업무는 육체적으로 그리 힘든 노동은 아니다. 자동으로 돌아가는 장비에 자재가 떨어지면 자재창고에서 자재를 찾아와 걸어주고 장비에 에러가 발생해서 멈추면 조치를 하고 다시 가동하는 일을 한다. 그리고 앞공정에서 나온 제품을 장비에 투입하고 내 장비를 거친 제품을 다음 공정 대기하는 곳에 가져다 놓으면 된다.

문제는 일의 힘듦이 아니라 생활 패턴이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이런 교대근무를 해본 적이 없던 내가 하루에 12시간씩을 공장에서 일을 해야 했다. 그마저도 일주일에 한 번씩 주야간이 바뀌니 몸이 적응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당시 우리 회사의 주 거래처는 '삼성SDI'와 '오리온전기'였는데 CRT(브라운관) 모니터가 한창 잘 팔릴 때라 주말에도 거의 매주 특근이 잡혀 있었다. 주말 특근을 하고 정상적으로 교대근무를 바꾸게 되면 주간조는 일요일 저녁 8시에 퇴근을 해서 월요일 저녁8시에 출근을 한다. 그리고 야간조는 일요일 아침 8시에 퇴근을 해서 월요일 아침 8시에 출근을 한다. 이렇게 되면 공장은 일요일 저녁 8시에서부터 월요일 아침 8시까지 가동을 멈추게 된다.

일요일 야간 8시간도 공장을 쉬게 하지 않으려고 가끔 철야근무를 강요하기도 했다. 철야근무를 하면 주간조가 일요일 아침에 출근을 해서 24시간 근무를 하는 거다. 그러면 월요일 아침 8시에 퇴근을 하는데 다음 주는 야간근무라 월요일 저녁 8시에 근무에 들어가면 되니까 잠을 잘 시간이 있긴 하다.

당시 철야근무를 하면 특근에 야간수당까지 계산해서 하루에 10만 원 정도 됐던 것 같다. 당시 내 월급이 12시간씩 2교대로 한 달 일하면 80만 원 정도가 내 손에 들어왔으니 적은 돈은 아니었다. 야간에는 장비가 자동으로 돌아갈 때 앉아서 꾸벅 꾸벅 졸기도 할 수 있었으니까 할 만했다. 하지만 그게 다 내 몸 축내는 건데 그 땐 그걸 몰랐다.

덧붙이는 글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듣는 곳
http://www.bainil.com/album/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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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콘텐츠 대표 문화기획과 콘텐츠 제작을 주로 하고 있는 롯데자이언츠의 팬이자 히어로 영화 매니아, 자유로운 여행자입니다. <언제나 너일께> <보태준거 있어?> '힙합' 싱글앨범 발매 <오늘 창업했습니다> <나는 고졸사원이다> <갑상선암 투병일기> 저서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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