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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거꾸로 있네요" 임신 7개월 초음파 검사실. "이러다 돌아오기도 하니까 기다려 봅시다" 의사는 말했지만 아이는 끝내 돌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자연분만의 기쁨'을 알 수 없는 몸이 되어 예정일 2주 전, 수술해서 아이를 낳았다.

마취에서 깨어나 처음 아이를 봤을 때, '내가 이 아이를 낳았다니' 믿기지 않았다. 딸인데 하나도 예쁘지 않았다. 태지가 덕지덕지 묻은, 퉁퉁 부은 아기 얼굴이라니. "처음 애기 태어나서는 원래 그래,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져." 친정엄마의 말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를 보러 오는 사람마다 왜 나를 쏙 빼 닮았다고 하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이를 먹이고 재우는 게 '이런' 건지도 몰랐다.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이며' 어머님 은혜 노랫말은 괜한 게 아니었다. 아이는 잘 먹고, 잘 싸고, 잘 잤지만 나는 못 자서 힘들고 아이랑 단 둘이 하루 종일 있는 것도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자연히 남편 퇴근 시간만 기다리게 되고, 남편이 갑자기 약속이 있어 늦는 날이면 그렇게 속상할 수가 없었다.

아이가 먹고 자기만 할 때는 그래도 좀 나았다. 본격적으로 스스로 먹으려고 하고 기고, 서고, 걷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매일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애 낳으니까 좋아?" 묻는 친구들에게 긍정의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이런 나와 달리 제 자식 예뻐서 그야말로 물고 빨고 하는 친구들을 보면 신기하기까지 했다. 내 모성이 좀 부족한 건가? 걱정도 됐다.

말하고 글쓰기,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다

최숙희 쓰고 그린 <너는 어떤 씨앗이니?> 겉표지.
 최숙희 쓰고 그린 <너는 어떤 씨앗이니?> 겉표지.
ⓒ 책읽는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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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였다.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할 무렵, 나는 비로소 엄마가 되었다. 오물오물 하는 입술 모양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었다. 우리 아이는 이런 목소리를 가졌구나. 말 한 마디 할 때마다 입 안에서 보석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 모성에 불이 붙기 시작한 건. 지금도 누군가 "애 낳으면 좋아요?" 하고 물으면 망설임 없이 "응, 말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가 진짜 예뻐"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보다 더 굉장한 일이 생길 줄이야. 그건 바로 글쓰기다. 최숙희가 쓰고 그린 <너는 어떤 씨앗이니?>를 읽고, 아이가 적어 놓은 글을 봤을 때 '내가 낳은 애가 맞나?' 다시 생각했다.

바람에 흩날리던 씨앗이 민들레꽃이 되고, 쪼글쪼글 못 생긴 씨앗이 수수꽃다리가 되고, 꽁꽁 웅크린 씨앗이 당당한 모란으로 피고, 툭 건드리면 울 것 같은 씨앗이 봉숭아꽃을 피우고, 느긋하게 꿈꾸던 씨앗이 긴 잠에서 깨어나 연꽃이 되고... 이 마법 같은 변화를 단 몇 줄의 문장과 그림으로 담아낸 책도 참 좋았지만, 마법에 빠진 듯 '못 생긴 씨앗도 꽃이 피면 예쁘다'라고 적은 아이 글도 좋았다. "멋지다, 멋지다... 엄마가 쓴 어떤 문장보다 좋다"고 말해주었다.

한때는 수줍음이 너무 많은 게 걱정이 되어 불안할 때도 있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겠구나. 예쁘지 않은 씨앗도, 늦게 피는 씨앗도, 수줍어 숨은 씨앗도 결국엔 싹을 틔우고 꽃잎을 활짝 피울 테니까. 네 속에 든 씨앗이 어떤 꽃을 피울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ps. 씨앗 이야기를 하다가 아이들에게 "네 씨앗은 어디서 왔니?"라는 우주적인(?) 질문까지 하게 됐다. "당연히 엄마"라고 말하는 아홉 살 큰애와 "아냐, 아빠야"라고 말하는 아빠 껌딱지 다섯 살 둘째. 어리다고 무시하지 말자. 알 건 다 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베이비뉴스>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너는 어떤 씨앗이니?

최숙희 글.그림, 책읽는곰(2013)


태그:#최숙희, #너는 어떤 씨앗이니?, #책읽는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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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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