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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호프 거리의 코프(Coop) 협동조합 대형마트 -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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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쿱에 빵 사러 가죠."

취리히에 사는 아그네스는 아파트 단지 입구의 협동조합 슈퍼마켓에서 일과를 시작한다. 아그네스의 집에 머무는 3일 동안 손님인 나의 아침도 마찬가지였다. 집주인과 '쿱'에 가서 아침 장을 보는 것으로 새로운 날을 시작했다.

매장에는 주식인 빵과 치즈, 햄은 물론 지역에서 생산되는 신선한 과일, 채소 등 유기농 지역 식품이 가득하다. 포장 봉투에는 '지역으로부터, 지역을 위해'라는 협동조합의 지역 정책이 새겨져 있다. 바로 협동조합의 존립 목적과 존재 가치이다.

집 앞에 동네 협동조합이 있으니 굳이 멀리 대형마트에 갈 필요가 없다. 한꺼번에 많이 사서 냉장고에 미리 채워둘 필요도 없다. 취리히 시민들이 가는 길목마다, 소비자가 사는 동네마다 어김없이 협동조합 슈퍼마켓이 동지처럼, 이웃처럼 기다리고 있다.

'쿱'은 동네 아파트 단지 입구에 자리 잡은 협동조합 슈퍼마켓을 흔히 부르는 말이다. 아그네스가 사는 볼리스호펜 동네에는 미그로(Migros)와 코프(Coop)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미그로든, 코프든 '쿱에 가자'는 말은 우리 식으로 하면 '장 보러 가자'는 말 정도가 되겠다.

아침에 아침 끼니를 장만하러 쿱으로 걸어갈 때마다 한국 국민의 아침 출근 전 상황이 자꾸 겹쳤다. 날을 잡아 재벌 기업이 주인인 대형할인마트 매장에서 원산지 불문, 원료 미상의 '원 플러스 원'을 다투어 골라 꾸역꾸역 냉장고에 채어놓은 한국인들의 대형 냉장고가 떠올랐다. 도시는 물론, 농촌 지역에서도 대형할인마트의 상권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는 한국 소비자들의 고충과 애로가 새삼 느껴졌다.

평소 생활환경이 위험하고 소득기반이 불안정한 한국에서 탈 없이 살아가는 일에 대해 걱정이 많은 편이다. 특히 '마을에서 제대로 사람 구실을 하며 먹고 사는 방법'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한다. 결국, 그런 걱정이 노동이나 업무가 되었다. 이제 거의 모든 연구의 주제나 발단은 곧 어떤 일에 대한 걱정에서 반드시 시작된다. 요즘 주로 하는 걱정거리 가운데 하나가 바로 협동조합이다.

한국의 협동조합도 스위스처럼 잘할 수 있을까

협동조합 같은 사회적 경제가 우리 경제와 사회의 대안임은 분명해 보인다. 이미 동력과 수명을 다한 것으로 보이는 재벌중심 수출형 성장 방식은 한계에 이르렀다.
 협동조합 같은 사회적 경제가 우리 경제와 사회의 대안임은 분명해 보인다. 이미 동력과 수명을 다한 것으로 보이는 재벌중심 수출형 성장 방식은 한계에 이르렀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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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협동조합법이 시행된 지 2년 반이 지났다. 무려 7천5백여 개에 달하는 협동조합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협동조합의 양적 팽창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불안하다. 제대로 돌아가는 협동조합은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협동조합을 만드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잘 꾸려나가는 게 숙제다.

어쨌든 협동조합 같은 사회적 경제가 우리 경제와 사회의 대안임은 분명해 보인다. 이미 동력과 수명을 다한 것으로 보이는 재벌중심 수출형 성장 방식은 한계에 이르렀다. 민생을 국가나 공공이 다 책임질 수도 없다.

결국, 부자는 자꾸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이는 더 가난해지는 상황이 지속하고 있다. 민생은 점점 더 고단해지고 있다. 급기야 심각한 양극화, 그로 인한 사회계층 간 대립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기형적이고 폭력적인 한국형 경제구조는 이 사회를 위험사회로 자꾸 몰아간다. 어서 그런 구조 악에서 벗어나야 한다. 행정이든 민간이든 협동조합 같은 사회적 경제가 유력한 수단이자 도구로 작동하기를 기대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협동조합주의자를 비롯한 우리는 좀 더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사고나 행동이 좀 더 합리적일 필요가 있다. 다들 너무 조급하고 들 떠 있다. 1844년 세계 최초의 협동조합 '로치데일공정선구자조합' 이래, 협동조합의 성공사례는 일부 국가, 일부 사례에 불과하다. 일부의 주장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다.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의 폐해와 부작용을 대신할 대안이라는 선험적, 과학적 물증 조차 아직 불확실하거나 미약하다.

나처럼 세상사의 매 순간, 사안마다 기대보다는 걱정을, 덕담보다는 비판을 먼저 하는 입장에서는 기대보다는 우려가 앞선다. 자칫 '협동조합'이 지난날 숱한 벤처기업, 사회적 기업의 불행한 전철을 밟는 건 아닌지. 다행히 참고할만한 시행착오와 오류는 주변에 적지 않다.

무엇보다 협동조합을 해서 돈이나 벌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경제적으로 지속 가능할 수 있을지 불안하다. 먹고나 살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협동조합을 잘하는 선진국에서 굳이 협동조합을 '협동하는 기업(cooperative enterprise)'으로 부르려는 이유가 마음에 와 닿는다.

더군다나 한국의 협동조합이 소규모 영세자영업 서비스가 주종을 이루다 보니 근본적으로 외형이나 수익성도 빈약하다. 본의 아니게 협동조합의 사회적 명분에 가려진 노동자의 저임금, 장시간 노동이 일상화되는 우울한 숙명에 몰릴 수도 있다. 협동조합주의자가, 민주주의자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악덕 기업주 처지로 전락할 수도 있다.

한국의 협동조합은 그 태생적 특수성과 수동성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의 협동조합기본법 제정은 전적으로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결정이 아니다. 2012년 '세계협동조합의 해'를 맞아 협동조합 관련 법제를 정비하라는 UN과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의 권고에 따른 것이다.

물론 생협 등 기존 협동조합 운동가들의 노력이 없지 않았으나 '자의 반 타의 반'의 선택이라는 게 보다 적합한 평가일 것이다. 그래서 그만큼 앞으로 풀어야 할 미제와 난제가 산적하다는 말이다. 취리히의 협동조합 마트에서 아침 장을 보면서, 협동조합을 연구하러 간 게 아닌데도 한 장면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이유다.

까르푸 물리치고 백화점을 자회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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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그로(Migros) 협동조합 슈퍼마켓 -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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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리히를 비롯한 스위스의 소매시장은 협동조합이 장악하고 있다. 미그로(Migros)와 코프(Coop)가 양분하고 있다. 한국으로 치면 아이쿱생협과 한 살림생협이 삼성 홈플러스나 이마트를 제압한 셈이다. 하지만 한국은 도시지역에서는 두 대형할인마트, 농촌 지역에서는 농협의 하나로마트가 소매시장을 독과점하고 있다.

소매유통시장 업계 1위는 미그로다. 스위스 인구 8백만 명 중 250만 명이 미그로 조합원이다. 연간 매출액은 30조 원이 넘는다. 상시 고용인력만 8만 명이 넘어 스위스 최대의 일자리 창출기업이다. 세계에서 7번째로 큰 협동조합이다. 외형이나 규모로 보면 대기업이지만 우리의 그 대기업과는 속성이나 정체성, 목적 자체가 다르다.

특히 스위스의 협동조합은 소매나 농업 분야에서 일반 상업적 기업보다 시장 경쟁력이 우월하다. 세계적 유통업체 까르푸가 속절없이 밀려났을 정도다. 조합원들의 자발적 출자와 참여로 건설된 협동조합의 특징과 장점이 제대로 발휘된 결과다. 조합원의 힘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고용, 다양한 사회공헌 사업도 적극적으로 펼칠 수 있다. 그게 또다시 협동조합의 시장경쟁력으로 되돌아오는 조합원과 협동조합의 선순환 구조다.

1925년에 취리히에서 창업한 미그로는 원래 협동조합이 아니었다. 스위스 국민이 아인슈타인 다음으로 중요한 역사적 인물로 꼽는다는 고트리브 두트바일러(Gottlieb Duttweiler)의 개인기업이었다. 시작은 미미했다. 스위스의 험난한 알프스 산골 마을을 찾아다니며 커피, 설탕, 소금 등 식료품을 판매한 트럭행상에 불과했다. 이렇게 도매와 소매의 중간단계 역할을 한다고 미그로(Migross)라고 이름 지었다. 프랑스어 demi(절반)와 gros(도매)를 합친 말이다.

미그로의 성공전략은 단순하다. 양심적이었다. 중간 유통 수수료를 줄였다. 싸고 좋은 상품을 사지 않는 소비자는 없다. 1941년에는 창업자는 개인 소유였던 미그로 주식 거의 전액을 협동조합 출자금으로 전환했다. 누가 시킨 게 아니다. 개인기업을 국민 모두에게 기부한 셈이다. 이후 미그로는 조합원의 소유가 됐다. 조합원이 선출한 소비자 대표가 이사회에서 공동으로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한다.

미그로 매장에 없는 상품 3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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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그로의 지역화 정책(‘지역으로부터, 지역을 위해’)이 새겨진 봉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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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그로 매장에는 없는 것 빼놓고 다 있다. 그냥 한국에서 보는 일반 생협매장 정도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동네 슈퍼마켓 같은 미그로는 동네에만 있을 뿐이다. 취리히 중앙역 앞 반호프 거리의 미그로 매장은 백화점이나 대형할인마트의 형태이고 규모다. 페스탈로치의 동상이 있는 글로버스(Globus) 백화점도 미그로의 자회사일 정도다.

단 미그로 매장에는 3가지 상품이 없다. 술, 담배, 성인잡지는 팔지 않는다. 1920년대 노동자들이 술과 담배에 돈을 쓰는 모습을 본 창업자가 판매를 금지했다. 스위스 노동자들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지키겠다는 설립자의 기업가 정신이 아름답다.

미그로에 이어 스위스 소매유통업계 2위 코프(Coop)도 5만 명이 넘는 직원에 연간 매출액이 30조 원에 이른다. 조합원은 2백만 명에 달한다. 미그로와 함께 스위스 소매시장의 40% 이상을 점유한다고 한다.

2008년 까르푸가 스위스에서 철수하고 매장 12곳은 코프가 인수했다. 한국에서 까르푸를 인수한 경우와는 달리 매장 노동자들의 고용도 승계했다. 철수 원인도 한국과 스위스는 다르다. 카르푸의 실패가 한국에서는 현지화 때문이었다면 스위스에서는 미그로와 코프라는 두 소비자협동조합과 시장경쟁에서 당당히 승리한 결과다. 공공시장도 아닌 일반 상업시장에서 협동조합이 대기업 주식회사를 실력으로 이긴 것이다.

조합원이 주인인 협동조합 미그로와 코프의 경쟁력의 원천은 당연히 조합원 고객에서 나온다. 고객의 신뢰와 충성도라는 고객과 오래 거래를 주고받으며 쌓아온 사회적 자본을 바탕으로 한다. '상품의 질도 좋고 값도 적절하다'고 믿는 고객들의 신뢰가 힘이 되었다.

거래를 지속할 수록 고객 충성도의 증가도 비례했다. 협동조합과 고객 사이에는 갑과 을의 거래관계가 아니라 '우리는 하나'라는 신뢰와 규범이라는 굳은 사회적 자본력이 축적되었다. '돈 놓고 돈 먹는' 주식회사 경영기법으로는 도저히 협동조합의 협동과 연대의 정신을 따라올 수 없다.

지역사회 없이는 협동조합의 미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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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호프 거리의 대형 미그로 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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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협동조합 미그로는 세계시장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오로지 지역 전략에 집중한다. 조합원들은 해외시장에 나가 돈을 더 벌어오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배당을 더 해달라고 주문하지 않는다. 오직 가까운 매장에서 좋은 품질의 물건을 더 값싸게 살 수 있기만 바란다. 세계화 전략, 외형 성장전략이 불필요한 이유다.

미그로의 협동조합 경영전략은 한마디로 '지역화 정책'으로 집약된다. '지역으로부터, 지역을 위해(Aus der Region, Fuer die Region)'. 이에 따라 지역협동조합을 중심으로 은행, 주유소, 여행 등 지역사회 조합원들의 일상생활에 더 밀착된 사업에 집중한다.

그래서 지역사회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원칙을 철저히 고수하고 실천하고 있다. 해마다 매출액의 1%(약 1천억 원 이상)을 지역의 교육과 문화사업에 투자한다. 이 돈으로 지역협동조합에서 미그로 클럽 학교를 운영한다. 일종의 평생학습센터 역할이다. 연간 50만 명 정도가 수강료 지원 등 혜택을 받고 이용한다.

미그로의 조합 운영방식도 다분히 지역 분권적이다. 전국의 지역본부마다 자체적으로 결정 권한을 가진다. 다양한 위원회에 조합원들이 참여해 의사 결정에 참여한다. 창업자 두트바일러의 협동조합 전환 결단 후, 일반 조합원, 지역 조합, 연합회 3단계의 의사결정 구조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한국의 미그로와 코프, 소비자 생활협동조합

한국에도 미그로와 코프같은 생활협동조합이 지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한국의 미그로와 코프라 부를만한, 한 살림과 아이쿱이 각각 수십만 명의 조합원, 수천억 원의 연간 매출액으로 업계 성장을 이끌고 있다. 유럽은 소비자협동조합, 일본은 생활협동조합으로 부르지만, 한국은 '소비자 생활협동조합'으로 부른다. 1998년 생협법이 제정될 때 '소비자 생활협동조합법'이란 명칭을 법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중 아이쿱생협에서 운영하는 '구례 자연 드림파크' 사례는 주목할 만 하다. 일반 분양이 안 돼 유휴 시설화되었던 구례군의 용방 농공단지 약 4만 5천 평의 부지에 국내 최초의 친환경 유기식품클러스터를 조성했다. 지역사회에 밀착해, 지역사회 공동체에 이바지하려는 소비자 생활협동조합의 올바른 방향성을 실천하고 있다.

여기에는 아이쿱생협 조합원을 위한 식품을 생산하는 라면, 김치 등 각종 제조 공방들, 그리고 조합원뿐 아니라 구례군민도 이용할 수 있는 레스토랑, 체험실, 영화관, 카페, 사우나, 방문자 숙소 등 각종 편의시설이 운영되고 있다. 이른바 지역사회 복합문화단지라 할만하다.

성과는 고무적이다. 지난해 결혼이주여성을 포함한 구례군민 등 300개가 넘는 지역 일자리를 창출했고, 수익금의 일부인 2억 원을 기부해 구례보건소 산부인과 개설에 지원했다. 지금은 구례군 지역청소년을 위해 청소년수련원을 준비하고 있다.

구례 자연 드림파크는 스위스의 미그로의 정책이 그러하듯, 한국에서도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가 왜 지역사회에 기반을 두어야 하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사회적 경제가 지속 가능하게 발전하려면 왜 지역사회 공동체의 지지가 필수적인지 성공적으로 실증하고 있다. 나아가 최소한 지역사회에서는 국가와 정부가 하지 못하는 일도 협동조합은 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 편집ㅣ김준수 기자



태그:#취리히 , #사회적 경제, #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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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연구소(Commune Lab) 소장, 詩人(한국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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