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김당의 나까프'에서 '나까프'는 '나쁜X 까발리기 프로젝트'를 줄인 말입니다. 여기서 'X'는 '놈'일 수도 있고, '짓'일 수도 있습니다. '나까프'의 대상은 공인 중의 공인인 전-현직 국회의원과 장-차관급 공직자들입니다. 나아가 무력을 가진 군과, 공권력을 가진 이른바 4대 권력기관(검찰-경찰-국세청-국정원) 그리고 갈수록 힘이 세지는 대기업 회장들도 당연히 '나까프'의 대상에 포함됩니다. [편집자말]
헌정 파괴 지수로 뽑은 헌정 파괴 대통령들.
 헌정 파괴 지수로 뽑은 헌정 파괴 대통령들.
ⓒ 김당

관련사진보기


흔히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고 한다. 법을 어기면 범법자라고 부른다. 법을 어겨 감옥살이를 하면 보통 전과자라고 한다. 그렇다면 일반법보다 상위법인 헌법을 어기면 어떻게 될까?

그런데 헌법을 어긴다는 표현은 어색하게 들린다. 헌법을 어기는 것은 일상적인 양태가 아니다. '헌법을 파괴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헌법을 파괴하는 대표적 양태가 쿠데타다.

예로부터 정변(반란)은 실패하면 역적이고 성공하면 공신이라고 했다. 그 논리의 연장선에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해괴한 법 논리도 등장했다.

유승민 의원이 고마운 까닭

유승민 새누리당 전 원내대표. 사진은 지난 8일 사퇴 기자회견 당시 모습.
 유승민 새누리당 전 원내대표. 사진은 지난 8일 사퇴 기자회견 당시 모습.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일반법이든 헌법이든, 그것을 어기거나 파괴한 자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처벌이 따르는 게 법치주의다. 전두환·노태우 사례는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받는 선례를 보여줬다. 그것이 국민의 법 상식이다. 헌법은 주권자인 국민이 지향하는 근본 가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유승민 의원이 고맙다. 원내대표 사퇴의 변에서 '헌법 제1조 1항'을 인용해 헌법의 근본가치를 일깨워줬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헌법에 "대통령은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진다"(66조 2항)라고 돼 있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으로서 최악(最惡)은 집권을 위해 헌정을 파괴한 것이고, 차악(次惡)은 집권 연장을 위해 헌정을 위협한 것이다. 물론 국군 통수권자로서 쿠데타를 막지 못한 책임도 적지 않지만, 그것은 악행보다는 무능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대 대통령 중에서 최악의 헌정파괴범은 누구일까?

이 글을 쓰고 있을 때, 한홍구 교수(성공회대)가 가칭 <반헌법행위자 열전> 편찬을 공개 제안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반헌법행위자'들이란 대한민국의 공직자 또는 공권력의 위임을 받아 일정 직무를 수행한 자로서 내란·고문조작·부정선거 등 반헌법 행위를 자행한 자, 반헌법 행위를 지시 또는 교사한 자 등을 가리킨다.

이미 '악인열전'을 시작한 '나까프'의 필자로서 <반헌법행위자 열전> 편찬을 적극 환영하는 바이다. 그런데 <반헌법행위자 열전>에 전직 대통령들을 수록할지  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열전을 편찬하면서, 헌법에서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진다"라고 명시한 유일무이한 직책인 대통령을 제외한 것은 아니될 말이다.

그래서 준비했다. 제헌절을 맞이해 개헌 역사를 톺아보면서 역대 대통령의 헌법 파괴 정도를 지수화했다. 예를 들어 군사쿠데타는 3점, 총칼로 헌정을 중단한 집권 연장(친위 쿠데타)은 2점, 집권 연장을 위한 개헌은 1점으로 단순화해 점수를 매겼다. 다만, 쿠데타로 집권했더라도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당선됐을 경우(노태우 대통령) 1점을 감했다.

국민들이 개헌에 심리적 거부감을 갖는 이유

1954년 사사오입 개헌을 다룬 제1공화국 비화 연재 기사(동아일보 1973년 12월 25일자)
 1954년 사사오입 개헌을 다룬 제1공화국 비화 연재 기사(동아일보 1973년 12월 25일자)
ⓒ 동아일보 PDF

관련사진보기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1948년 7월 17일 제정헌법이 공포된 이래 60여 년 동안 모두 아홉 번의 개헌이 있었다. 이 가운데 소급입법을 위한 절차법 개정 성격을 띤 4차 개헌(1960년 11월 29일)을 제외하면 모든 개헌이 권력구조 개편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또한 헌정 사상 처음으로 합법적 절차에 의해 이뤄진 3차 개헌(1960년 6월 15일)과 헌정사상 최초로 여야 합의로 이뤄진 9차 개헌(1987년 10월 29일)을 제외하면 모든 개헌이 반합법 또는 비합법적으로 이뤄졌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정치권이 주도하는 개헌에 대해 심정적 거부감을 갖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우선, '발췌개헌'이라고 부르는 1차 개헌부터가 1952년 7월 전시 피난 수도인 부산에서 정치파동의 와중에서 이뤄졌다. 제헌국회에서 간선으로 선출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자신을 지지하는 의원수가 줄어 국회에서 선출될 가망이 없자, 신당(자유당)을 만들어 대통령 선출 방식을 국회의원 간선제에서 국민직선제로 변경을 꾀했다.

그 과정에서 의원들이 반발하자 이승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일부 의원들을 국제공산당 연루혐의로 체포하는 등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여당이 주장한 대통령 직선제와 야당이 주장한 내각책임제 요소(국무위원에 대한 국회 불신임 의결권)를 발췌·절충한 개헌이 이뤄졌다.

2차 개헌(1954년 11월 29일)은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으로 유명하다. 이 또한 이승만 정권 연장을 위해 초대 대통령에 한해 헌법의 중임제한을 철폐한 것이다. 문제는 그 이틀 전 국회 표결에서 개헌 찬성이 135표로 의결정족수(136표)에 1표 부족해 부결됐는데도 재적의원의 2/3는 약 135.33명이므로 소수점 이하를 '4사5입'하면 의결정족수가 135명이 맞다며 재투표로 개헌안을 가결시킨 것이다. 이승만은 이 개헌에 따라 3대 대통령에 당선돼 독재의 길을 걷게 된다.

3차 개헌(1960년 6월 15일)은 4.19 혁명 이후 구성된 허정 과도내각에서 추진된 내각책임제 개헌이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합법적 절차에 의해 개헌이 이뤄졌다. 내각책임제와 양원제 국회를 근간으로 지방자치제도를 실시하고 헌법상 기본권을 확대·강화하는 게 골자다. 이후 7월에 민의원·참의원 동시 선거로 집권한 민주당은 윤보선 대통령을 선출하고 내각책임제 국무총리로 장면을 인준했다.

4차 개헌(1960년 11월 29일)은 3.15 부정선거 관련자 및 부정축재자들을 소급해 처벌할 수 있도록 한 헌법 개정이어서 '소급입법 개헌'이라고 부른다. 헌정 사상 유일하게 대통령이나 내각제 총리 등 권력구조 개편이나 정권 연장과 무관하게 헌법 개정이 이뤄졌다.

개헌의 결말은... 독재자의 비참한 최후

5.16 쿠데타 당시의 박정희 소장(가운데)과 그를 경호하는 박종규 소령(왼쪽) 및 차지철 대위(오른쪽)
 5.16 쿠데타 당시의 박정희 소장(가운데)과 그를 경호하는 박종규 소령(왼쪽) 및 차지철 대위(오른쪽)
ⓒ 한국근현대사사전

관련사진보기


5차 개헌(1962년 12월 26일)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설치된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주도했다. 대통령 중심제 및 단원제 국회, 대통령 직선제와 헌법 개정에 대한 국민투표제 채택 등이 골자다.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대통령권한대행을 거쳐 육군대장으로 예편한 박정희가 이 헌법에 따라 1963년 12월 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6차 개헌(1969년 10월 21일)의 핵심은 3선 개헌이다. 1967년 5월 재선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의 3선을 위해 대통령의 임기를 4년 중임에서 3기 연임이 가능하도록 했다. 집권 공화당은 신민당 등 야당 의원들이 개헌 저지 농성을 벌이자 이를 피해 일요일 오전 2시 국회 별관에 모여 2분 만에 개헌안을 변칙 통과시켰다. 박정희는 이 헌법에 따라 실시된 1971년 4월 대선에서 3선에 성공해 독재자의 길을 걷게 된다.

7차 개헌(1972년 12월 27일)은 친위 쿠데타 성격을 띤 유신헌법 개헌이다. 박정희는 1972년 10월 '한국적 민주주의 실현'을 명목으로 국회를 해산하고 각종 정치활동을 금지시키는 '유신'을 단행한 뒤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강화한 유신헌법을 제정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선제로 6년 임기의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했다. 박정희는 유신헌법에 따라 8대(1972년 12월)~9대(1978년 7월) 대선에 단독 후보로 출마해 99.9%의 찬성으로 사실상의 '종신 대통령'에 선출됐다.

8차 개헌(1980년 10월 27일)은 박정희가 시해된 1979년 10.26 사건 이후, 12.12 군사반란과 1980년 5.17 쿠데타로 정권을 차지한 신군부 세력이 주도했다. 선거인단에 의한 7년 단임 대통령 간선제와 국회의원 비례대표제 도입, 환경권·행복추구권 신설 등을 골자로 했다. 1980년 8월 예편 후 11대 대통령에 선출된 전두환은 이듬해 2월 새 헌법에 따라 실시된 12대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실인 9차 개헌(1987년 10월 29일)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핵심이다. 5년 단임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 국정감사권 부활, 기본권 확대 등을 골자로 했다. 헌정 사상 최초로 여야 합의로 이뤄진 개헌이다. '10월 유신' 이후 처음으로 국민 직접선거로 치러진 1987년 12월 대선에서 12.12 군사반란의 주역 중 하나인 노태우가 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1987년 직선제 이후 역대 대통령 중에서 김영삼(14대)·김대중(15대)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결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노무현 대통령(16대)도 민주화 투쟁 경력이 있다. 그러나 김영삼은 이승만 대통령의 사사오입 개헌 당시 3선개헌 동의안에 서명한 전력이 있다(김당의 나까프 3회에서 다룰 예정). 이명박 대통령(18대)은 재임중 국가정보원의 부정선거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 선거를 통해 당선됐다.

결과적으로, 역대 대통령 중에서 '최악의 헌정 파괴범'은 5.16 군사쿠데타와 10월 유신 친위쿠데타 등으로 6점을 얻은 박정희이다. 그 다음은 이승만과 전두환이 각 3점으로 동률을 기록했고, 그 다음은 2점을 얻은 노태우다.

헌정 파괴 지수로 본 역대 대통령.
▲ 헌정 파괴 흑역사 헌정 파괴 지수로 본 역대 대통령.
ⓒ 김당

관련사진보기



○ 편집ㅣ손병관·김지현 기자

덧붙이는 글 | '나까프'는 나쁜X들 까발리기 프로젝트의 줄임말입니다.



태그:#헌정파괴, #박정희, #이승만, #전두환, #김영삼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