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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 사태 초기에 우리 정부는 대중의 공포심을 무시하는 태도를 취했다. '정부가 알아서 잘할 테니, 무조건 믿고 따르라'는 식의 권위주의적 인상도 좀 풍겼다. 제대로 대처하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따르라고 말하는 정부의 태도를 보고, 대중의 마음 속에서는 메르스에 대한 공포심 못지 않게 정부에 대한 불신도 함께 증폭됐다.

이런 상황을 지켜본 미국의 '공포 전문가'가 지난 15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정부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미국 오리건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폴 슬로빅은 "무조건 지시를 따르라고 하면 대중의 분노를 사게 된다"면서 "신종 전염병에 대한 공포를 비이성적 반응으로 깎아내리지 말고 사람들의 반응을 존중하라"고 주문했다.

올바른 정보의 유통에 힘쓰면 대중의 신뢰가 회복되고 그렇게 되면 공포심도 줄어들 거라고 폴 슬로빅은 덧붙여 조언했다. 외국 전문가의 눈에도 우리 정부의 대처법에 심각한 결함이 있었던 것이다.

그대로 방치된 메르스 '공포'

고대의 군대. 서울시 송파구의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찍은 영상.
 고대의 군대. 서울시 송파구의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찍은 영상.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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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 사태는 한국인과 메르스 바이러스 간의 전쟁이다. 인간 상호 간의 전쟁이건, 인간과 병원균의 전쟁이건 간에, 전쟁터에서는 적군의 전투력 못지 않게 아군의 공포심도 경계해야 한다. 적당한 공포심은 약이 되고 활력소가 되지만, 지나친 공포심은 전투에 지장을 초래한다.

공포심이 확산되면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전투에서 '필패'할 수밖에 없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최선이라면, 싸우지 않고 지는 것은 최악이다. 싸우지 않고 지는 비결은, 조직 내 공포심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대비해 군사 심리학에서는 각종 처방을 내놓고 있다. 그 중에는 공포심에 대한 교육을 사전에 시행하거나, 병사들이 신앙심을 갖도록 하거나, 위험 상황에 대처한 훈련을 평소에 실시하는 등의 방법이 있다.

또 공포의 원인을 놓고 공개 토론을 벌인다든가, 전투에서만큼은 공포심을 언행으로 표현하지 못하도록 한다든가, 극한 상황에서 유머를 통해 공포심을 희석한다든가, 적군도 우리처럼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든가, 공포심을 느끼는 병사들 간에 동료애를 강화한다든가, 전투에서 부상당할 확률이 높지 않다는 통계치를 보여준다든가, 동료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문제 사병을 사전에 격리한다든가 하는 방법도 있다(출처: 이재윤의 <특수작전의 심리전 이해>).

우리 역사에서 이런 방법을 가장 잘 활용한 인물 중 하나는 신라 김유신이다. 그는 다양한 기법을 동원해서 부하들의 공포심을 통제했다. 김유신이 승리한 전투의 대부분은 자기 병사들의 공포심을 유리한 방향으로 활용해 얻은 극적 결과였다.

역사학자 겸 독립투사인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김유신의 전투에 관한 기록에는 과장과 허위가 많다고 했다. 그가 그렇게 판단한 이유에는 김유신이 정공법으로 승리를 거두는 장수가 아니었다는 점도 포함됐을 것이다.

김유신은 작전을 잘 짜서 적군을 체계적으로 공략하는 장군이 아니었다. 공포심을 활용해서 병사들이 죽기 살기로 덤벼들도록 만드는 심리전의 명수였다. 그가 거둔 승리의 대부분은 그렇게 얻은 것이었다. <삼국사기>에 소개된 사례 중 세 건을 소개한다.

김유신의 '공포' 대처법

서울시 용산구의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김유신 흉상.
 서울시 용산구의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김유신 흉상.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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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이 왕위에 있을 때인 629년이었다. 김유신이 36세였을 때다. 이때 신라군이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했다. 낭비성은 지금의 청주시와 청원군 일대에 있었다.

신라군은 고구려군이 갑작스레 성에서 튀어나와 역습하는 바람에 큰 타격을 받았다. 사망자의 규모가 매우 컸다. 신라 병사들은 전의를 거의 상실했다. 신라 군영에서 고구려군에 대한 공포심이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이런 상태로는 전투를 수행할 수 없었다. 

이때 김유신이 행동에 나섰다. 그는 일부러 투구를 벗고 고구려군을 향해 돌진했다. 홀로 적진에 뛰어든 그는 적장의 목을 베고 귀환했다. 이 장면을 구경한 신라 병사들은 "우리가 승리할 수 있다"며 들떴다. 사기충천한 신라군은 성 밖에 있는 고구려군 5천 명을 죽이고 1000명을 생포했다. 성 안에 있던 고구려군은 이 장면을 보고 놀라 백기를 내걸었다.

김유신은 신라군에게 공포심을 주는 고구려 진영으로 몸소 뛰어든 뒤 투구도 없이 적장과 싸워 이겼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고구려군이 결코 무섭지 않다는 점을 부하들에게 보여줬다. 실제로는 무섭지만 심리적으로는 무섭지 않은 것처럼 느끼도록 한 것이다.

이 전투에서 김유신은,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는 솔선수범을 통해 또 공포심의 진원지로 달려들어 공포의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을 통해 병사들의 공포심을 제거했다. 유사한 사례는 이후에도 있었다.

또 다른 유형은 선덕여왕 때의 사례다. 선덕여왕 말년인 647년에 비담과 염종이 반기를 들었다. 여왕의 통치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며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반란군은 경주 명활성에 진을 쳤다. 지금의 경주 엑스포공원 왼쪽에 진을 친 것이다. 정부군은 경주 월성에 진을 쳤다. 월성은 명활성의 서쪽으로, 지금의 첨성대 쪽에 있었다.

두 군대는 10일간 격전을 벌였다. 하지만,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큰 별 하나가 월성 쪽으로 떨어졌다. 정부군 쪽에 큰 별이 떨어진 것이다. 비담은 이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이것을 여왕이 패할 징조라고 선전했다. 이 때문에 정부군은 물론 선덕여왕까지 공포에 떠는 상황이 벌어졌다. 공포심을 관리해야 할 최고 통치자가 도리어 공포심에 떨었으니, 이렇게 가다가는 비담의 천하가 열릴 수밖에 없었다.

이때도 김유신이 해결사로 나섰다. 그는 공포심이 전파되는 진원지로 들어갔다. 선덕여왕을 만나러 간 것이다. 김유신은 "길흉화복은 사람 하기에 달린 것이니 근심하지 마십시오"라고 여왕을 다독였다. 별이 떨어지는 현상에 의해 길흉화복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며 임금을 격려해준 것이다. 

이어 김유신은 불붙은 연을 하늘에 띄운 다음 "어젯밤에 떨어진 별이 도로 올라갔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런 다음, 별이 떨어진 장소에서 백마를 제물로 제사를 올렸다. 그가 낭독한 제문은, 신하가 임금을 배반하는 것은 천도를 어기는 것이므로 하늘이 비담을 응징할 것이라는 내용이 들었다. 천도를 어긴 비담을 응징하는 정부군이 전투에서 승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사기가 오른 정부군은 그 길로 전투에 나서 반란군을 제압해버렸다.

이 사례에서 김유신은 세 가지 기법을 구사했다. 공포에 떠는 임금과의 면담을 통해 공포심에 대한 교육을 시행하고 임금이 공포심을 퍼뜨리지 않도록 단속했다. 또 불붙은 연을 하늘에 띄우는 상징 조작을 통해 병사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어 그들의 공포심을 약화했다. 또 제사 의식을 통해 승리의 당위성을 주입함으로써 공포심을 제거했다. 이렇게 공포심이 제거되자마자 김유신은 반군에 최종 공세를 가했다. 공포심이 다시 생기기 전에 얼른 전투를 강행한 것이다.

메르스와의 전쟁, 정부 '정신 태세' 점검해야

김유신 시대의 전투. 전쟁기념관에 있는 이 그림은 662년 평양 인근에서 벌어진 고구려-당나라의 전투를 묘사한 정영렬 작가의 작품이다.
 김유신 시대의 전투. 전쟁기념관에 있는 이 그림은 662년 평양 인근에서 벌어진 고구려-당나라의 전투를 묘사한 정영렬 작가의 작품이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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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덕여왕 때인 649년, 백제군이 신라를 공격했다. 열흘이 지나도록 전투가 끝나지 않고 사상자만 속출했다. 죽은 시체가 들판에 가득할 정도였다.

지친 신라군은 도살성 즉 지금의 천안 쪽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때 하늘의 물새가 김유신의 군막 위를 지나갔다. 그러자 병사들이 불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시험 직전의 수험생이 사소한 것에도 민감하듯이, 위기에 처한 병사들은 사소한 것에도 불길함을 느꼈다. 병사들은 자신들이 패할 징조라며 수군거렸다. 신라군 내에서 공포심의 초기 징후가 싹튼 것이다.

병사들의 불길함은 본격적인 공포심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컸다. 김유신은 상황을 방치하지 않고 즉각 대처했다. 그는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며 부하들을 다독인 뒤, 곧바로 전투 개시를 명령했다. 전투는 신라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 사례에서 김유신은 공포심 발생 초기에 공포심을 통제했다. 그는 지휘관으로서의 자신감을 표출하고 병사들을 신속히 전투로 몰아넣음으로써, 그들이 물새 출현의 의미를 두고 한가하게 속닥거릴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공포심의 확산이 방지됐다.

김유신은 이런 경우에는 공포심에 대한 정신 교육을 시키기보다는, 아예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두 번째 사례와는 다른 방식으로 대처했던 것이다. 공포심을 통제하는 데 일종의 맞춤형 접근법을 구사했던 것이다. 

김유신이 명장이 된 것은, 승리할 수 있는 전투를 승리로 끝냈기 때문만은 아니다. 승리할 수 있는 전투를 승리로 끝맺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승리할 수 없는 전투를 승리로 종결하곤 했다. 패색이 짙은 전투를 뒤집는 기술이 있었던 것이다. 그 기술은, 공포심을 통제하고 군의 사기를 높이는 그의 노하우에서 나왔다. 그는 공포심 통제의 '달인'이었던 것이다. 이런 기술은 그의 부대가 패전 위기에서 벗어나 대승을 거두게 만들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 정부는 김유신 부대보다도 훨씬 더 체계적이다. 그런데도 메르스 사태에서 우리 정부는 김유신 부대보다 훨씬 더 못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대중의 공포심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대중의 공포심을 보고 도리어 당황하는 모습마저 보이고 있다.

공포를 느끼는 대중을 보고 당황하는 정부는 대중의 공포심에 대처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대중과 함께 메르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도 힘들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메르스에 대한 방역에 만전을 기해야 하는 것은 물론, 이 사태에 대한 정부 자신의 정신 태세부터 점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 다음 대중의 공포심에 대처하는 일에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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