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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칭다오 올림픽 요트 경기장에서 본 5.4광장, (아래) 칭다오의 별명 ‘중국속의 작은 유럽’을 볼 수 있는 구시가지 중산루
 (위)칭다오 올림픽 요트 경기장에서 본 5.4광장, (아래) 칭다오의 별명 ‘중국속의 작은 유럽’을 볼 수 있는 구시가지 중산루
ⓒ 김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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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말, 2년 반 만에 다시 찾은 칭다오 국제공항은 여전했다.

입국 심사장 여기저기서 "아이, 왜 이렇게 느려!" 들려오는 한국말도 그랬다. 몇 번씩 여권 사진과 얼굴을 대조해야 스탬프를 찍는 공항 직원들도 그랬다. 그날도 어김없이 몇몇 한국 남성은 입국 심사에 걸려 근처 사무실로 갔다. 짐을 다 찾고 나서도 공안이 콕 집으면 다시 짐을 푸는 모습도 여전했다.   

변함이 있다면, 그것을 지켜보는 내 마음이었다. 2008년 난생처음 중국에 왔을 때 긴장되던 그 광경들은 이제 소소한 일상처럼 가벼워졌다. '사회주의 중국'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와 낡은 편견들도 하나씩 떨어져 나갔다.

함께 어울려 살다 보니 나와 별다를 바 없는, 다 같은 사람들이었다. 언제부턴가 한국인, 중국인, 한국 학생, 중국 학생의 경계도 달리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외신에서 보도하는 중국의 사회 문제도 대륙적인 스케일만 빼면, 실상 과거 한국이 압축적인 경제 성장기에 겪었던 성장통이나 후유증과 뭐 다를까 싶기도 했다. 그렇게 나를 변화하게 한 칭다오를, 이번에는 일이 아닌 휴가를 보내기 위해 다시 찾았다.

화창한 5월의 이공대 캠퍼스는 애틋했다. 여학생 기숙사 창틀에서 펄럭이는 속옷도, 1950년대 소련식 건물과 안 어울리는 중국식 붉은 출입문도, 어두침침한 복도도, 심지어 문고리가 떨어져 나간 화장실마저 애틋했다. 눈에 보이는 형태와 색이 아닌, 추억이 만들어낸 그리움 탓이었다.

낯선 것이 있다면 다름 아닌 학생들이었다. 예전처럼 "진라오스(金老师, 김 선생님)!" 부르며 인사하거나 달려와 장난치는 학생이 없었다. 복도를 지나가는 어느 학생도 나는 알지 못했다.

"진 라오스, 노래! 노래!"

아침 8시면 저쪽 복도 끝 창문에서 헐레벌떡 뛰어오던 아이들을 내려다보며 손을 흔들곤 했는데... 3층 남향 설계실에선 08학번과 얼마나 멋진 시간을 보냈던가. 그 옆 설계실에선 09학번을 다그치느라 진이 빠졌고... 4층 북향 설계실은 첫 번째 중국 학생인 06학번을 만난 장소였지. 그 맞은편 설계실에서는 07학번과 실랑이를 하며 1년을 보냈고... 장소마다 학생들의 얼굴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그런데 그들이 벌써 다 졸업을 했다니! 뻔히 아는 사실인데도 막상 눈으로 확인을 하고 나니 그렇게 허전할 수 없었다. 추억만 덩그러니 남은 공간은 쓸쓸했다. 잠깐 낮잠을 잤는데 순식간에 수십 년의 시간이 흘러가버린 어리둥절함이 이럴까. 오랜만에 와본 고향이 댐 공사로 수몰된 것을 알게 된 순간의 기분이 이럴까. 학생들과 함께 보낸 기억들이 텅 빈 공간 속으로 튀어나왔다.

"진 라오스, 노-래! 노-래!"

칭다오 이공대학교 건축관 전시공간
 칭다오 이공대학교 건축관 전시공간
ⓒ 김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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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학번들의 붉게 상기된 얼굴이 보였다. 손으로는 박수로 재촉을 하고, 입으로는 한국 아이돌 그룹 이름을 불러댔다. 아이돌 가수의 노래는커녕 노래 자체가 쥐약인 나는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그때 한 여학생이 빈 맥주병에 숟가락을 턱 꽂더니 내 앞에 놓았다. 한국 드라마에서 이렇게 하더라며.

첫해, 첫 학기, 첫 종강 파티에서 본 학생들은 여느 때와 달랐다. 커피, 콜라 대신 찻통을 필수품으로 챙기던 학생들이 종강 파티에선 칭다오 맥주를 박스 채로 놓고 마셨다. 반장을 선두로 한 명씩 돌아가며 내 잔에 술을 채우고 한마디씩 한 후 원샷을 권했다. 그 한마디야 '고맙고 수고했고 다들 고생 많았다'로 뻔했지만, 어투와 몸짓에는 힘이 빳빳하게 들어가 있었다.

평소 설계실에서 조단조단 말하던 그들이 술자리에서 한 명씩 벌떡 일어나 말할 때는 하나같이 선동가처럼 보였다. 앉아 있는 학생들의 추임새와 박수 소리도 절도 있게 딱딱 끊어졌다. 소학교 학생들이 홍링진(红领巾, 붉은 스카프)을 두르고 오성홍기를 향해 각 잡아 거수경례하는 모습이 절로 연상됐다.

그래도 술판은 역시 술판. 무슨 출정식에라도 나가는 듯한 분위기는 빈 맥주병이 늘어날수록 풀어졌다. 일단 내가 학생들이 권하는 술을 주는 대로 받아마시자 다들 환호했다. 나중엔 옆 자리에 앉은 W가 "주는 대로 다 마시지 말고 시늉만 내세요" 귓속말을 했다. 그것을 본 학생들은 술을 조금씩 따랐고, 술잔을 채운 후에도 엄지와 검지 손가락을 딱 붙이며 "조금만"이라고 말했다. '이제 너도 우리 편'이라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종강 파티에서 졸지에 신고식을 치른 기분이었다.

그렇게 술이 몇 순배 돌고 나자 테이블마다 왁자지껄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 학기 내내 얌전하던 학생도, 설계를 못 해 주눅 들었던 학생도 함박 웃음꽃을 피웠다. 긴장의 껍데기를 훌훌 벗고 20대의 발랄한 기운을 마음껏 표출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한 명씩 일어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칼날 같은 성격의 Q가 오페라의 아리아를 애절하게 불렀고, 설계실에서 도통 말이 없던 L은 과장된 몸짓으로 악악대며 노래를 불렀다. 평상심의 달인처럼 굴던 학생들이 파릇파릇 끼를 발산하고 있었다. 서로 흥을 돋우고 발을 굴러가며 까르르 웃는 그들을 보며, '이 아이들에게 이런 모습들이 있었구나...' 새삼 놀라고 있는 찰나!

"진라오스, 노-래! 노-래!" 함성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나는 그저 숟가락이 꽂힌 빈 맥주병을 보며 난감해할 뿐이었다. 학생들은 "정 안 되면 아리랑이라도 불러 달라"며 재촉을 했다. 나는 '에라 모르겠다' 싶어 그냥 "아리랑~"을 시작했다. 고저 장단의 차이가 없는 내 노래는 내 귀에도 영 아니었다. '계속 더 불러야 하나' 한숨이 나왔다.

그 때였다. 옆자리에서 "아리랑~아리랑~아라리오~"가 들려왔다. 다른 학생들도 따라 불렀다. 가사 부분은 허밍으로 대신했다. '어떻게 중국 학생들이 아리랑을 알지?' 생각도 잠깐, 어느새 아리랑은 합창이 됐다. 합창이 끝났을 때 그들은 모두 활짝 웃으며 내게 박수를 보냈다.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다고 했던가. 눈앞에 있는 그들 하나하나가 내 마음 속으로 쑥 들어왔다.

한중 합작 교육 초기, 마음만은 편했다

돌이켜보면, 처음 중국에 와서 아무것도 모르던 그 때가 마음만은 제일 편했다. 한중 합작 교육 초창기답게 중국 학생들의 기대, 국제학원 직원들의 의욕, 중국 교수들의 한국에 대한 호기심, 여기에 한류 바람까지... 당시 이공대는 매년 '한국 문화의 날'을 열었다. 교내 홍보도 확실했고 참가하는 중국 학생들도 열성적이었다.

그런 분위기가 주춤거리기 시작한 것은 얼추 2010년부터였다. 어느새 중국은 G2로 불리기 시작했다. 위안화가 한창 오르자 칭다오의 한국인들은 외곽 지역으로 빠져나가거나, 아예 귀국해버렸다. 캠퍼스에서도 소소한 갈등과 경쟁이 일어났다. 고학년이 생기자, 한국과 중국 교수들 사이에 설계 수업과 졸업 조건에 대한 입장 차이가 생겼다. 입학생 수가 늘어나자, 학부형과 학생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요구가 돌출했다.

듣자하니, 어떤 학부형들은 "전공이 한국어도 아닌데, 더구나 졸업 후 중국에서 쓸 일도 적을 한국어를 배우는 것은 시간 낭비다, 차라리 그 시간에 영어를 더 배우도록 해 달라"고 했단다. 어쨌든 그 무렵 중국 학생들의 한국어 실력은 갈수록 떨어졌다. 심지어 한국어를 꽤 잘해 동기들의 통역까지 해주던 몇몇 학생들조차 느닷없이 수업 시간에 영어나 중국어로 발표했다.

그런데 한중 합작 교육엔 한국과 중국 교수가 가르치는 건축학과 5년 과정 외에 한국어 능력 시험도 포함돼 있다. 그 시험에 합격해야 중국과 한국 대학의 졸업장 두 개를 받을 수 있다. 그것을 장점으로 여기던 학생들 사이에서 '굳이 한국 대학의 졸업장이 필요한가?'라는 말이 나돌았다. 장차 한국에서 대학원 공부와 실무를 하고 싶다던 학생들도, 한국에는 교환 학생으로 가고 유학은 미국이나 유럽으로 가겠단다.

사실과 소문, 억측으로 버무려진 이야기가 떠돌면서, 한국과 중국 교수들 사이에 묘한 경쟁심과 껄끄러운 감정이 파고들었다. 이쪽에선 한중 합작 교육답게 한국어 수업을 계속해야 한다고 하고, 저쪽에선 국제학원답게 국제 언어인 영어로 수업을 해야 한다며. 그러는 동안 중간에 낀 국제학원 교직원들은 그들대로 피곤하고 난처해졌다. 애초 성황리에 열렸던 '한국 문화의 날'은 시들해졌고, 언제부턴가 나조차도 그 행사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게 지나갔다.

다행히 그런 분위기가 이제는 한 차례 홍역처럼 지나간 듯하다. 한국어 수업은 계속 유지되고 있다. 한국으로 교환 학생이나 대학원 진학을 하려는 지원자도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까운 문제도 생겼다. 국제학원 측에 의하면, 예전보다 한국어 강사를 구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단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한중 합작 프로그램과 달리 한국어 강사는 이공대에서 단독으로 채용한다. 문제는 강사 대우가 7년 전과 동일하게, 주택 보조 없이 월급 5000위안이라는 것. 7년 전에는 집세와 물가가 지금보다 훨씬 낮았다. 당시 이공대 젊은 교직원의 월급은 3000위안 정도였다. 언뜻 중국 교직원보다 월급이 높다는 생각에, 중국에서 색다른 경험을 하고 경력도 쌓으려는 목적으로, 20대 후반의 전공자들이 2, 3년 가르치다가 귀국했다.

하지만 새로 오는 한국어 강사들의 체류 기간은 갈수록 짧아지고 있다. 이공대에서 일반 교직원이 아닌 한국어 강사는 근무 기간에 따라 직급이 올라가지 않는다. 중국 교직원의 월급은 꾸준히 오르는데 한국어 강사의 월급은 제자리다. 집세와 물가는 무섭게 뛰고 있다. 오래 있을수록 손해를 보는 셈이다. 이런 문제점을 인식한 국제학원 측은 주택 제공 등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하려고 애쓰고 있다. 하루 빨리 한국어 강사들이 안정적이고 힘차게 생활할 수 있기를, 그래서 현지에서 교육 한류를 이루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중국'이라는 수식어는 어느새 떨어지고...

송별회날 4학년 학생들과 함께
 송별회날 4학년 학생들과 함께
ⓒ Xu 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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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팔 벌려 환영하며 근사한 식사 초대를 해준 국제학원 직원들과 작별한 후, 내가 향한 곳은 6월에 졸업 작품전이 열릴 전시 공간이었다. 다시 그 공간에 서니, 그곳에서 아등바등 거리던 때의 감정이 되살아났다.

첫 졸업전시회를 맡고 준비하는 내내, 나는 안개 낀 황량한 벌판에 혼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졸업 규정이 제대로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되는 교수회의는 매번 어제 말이 다르고 오늘 말이 달랐다. 학생들은 대학원 진학과 유학, 취업 때문에 집중을 못하고 설계실 밖으로 붕붕 떠다녔다. 이제 그것도 지나간 추억거리가 되고 말았다. 이 텅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누군가는 오늘 또 고군분투를 할 테지.

하필 오후의 햇살 때문이었을까, 나는 예전의 퇴근길을 따라 걷고 싶었다. 학교 근처 재래시장은 그대로였다. 단골 과일 가게 아주머니는 예전보다 더 세련된 파마 머리를 하고 있었다. 사거리 구멍가게 아저씨는 손님이 없는 틈에 입간판을 닦고 있었다. 드디어 마지막 해에 내가 살던 집에 도착했다. 지어진 지 4년 된 아파트인데도 뒤쪽 출입구는 아직도 공사가 덜 끝난 것처럼 어수선했다. 내가 자주 가던 만두집도 변함이 없고, 또 그 옆집은...

아, 마지막 수업이 끝난 후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갔던 송별회 장소였다. '저희가 계산한다'는 말에 "학생이 무슨 돈이 있어서?" 말하자, 모두들 그동안 부지런히 모은 할인 쿠폰을 쫙 보여주었던 뷔페 식당. 그곳에서 우리는 마음껏 먹고 웃고 떠들며 지난 에피소드들을 풀어놓았다. 그러다 미래의 꿈도 이야기하고, 그러다 울컥 섭섭해 하고, 그러다 불쑥 눈물이 솟았다.

송별회의 감정은 첫 해 종강 파티에서 아리랑을 들었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일단 서로 배려하고 눈치 보는 매끈한 친절함은 필요가 없었다. 대신, '원수도 이런 원수가 없다'며 지지고 볶으면서 끈끈하게 엉킨 세월의 정, 미운 정과 고운 정이 있었다. 그 속에 중국인들이 말하는, 시고 달고 쓰고 맵고 짠 인생의 맛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가르친 학생은 모두 220명이었다. 처음에는 낯설고 몰라서 헤매기도 했고, 나중에는 익숙해져서 게을러지기도 했다. 내 편견과 무지 때문에 그들을 오해한 적도 있고, 급한 성격 때문에 들들 볶은 적도 많았다. 220명의 학생들과 부대끼면서 보람도 느꼈고 상처도 받았다. 그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행복'을 즐거움과 만족이 아닌 '의미 있음'이라고 해석한다면, 220명의 학생들은 나에게 분명 행복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칭다오에서 내가 만난 최고의 보물들이다.

아이들은 졸업 후 한국어를 잊어가고, 나는 귀국 후 중국어를 잊어간다. 그래도 카톡과 웨이신(微信, 중국의 카톡)으로 더듬더듬 소식을 전한다. 한국어나 중국어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좋아하는 음악을 녹음하고 유학 중인 곳의 밤 풍경을 사진 찍어 보내기도 한다. 국제학원 W선생은 딸이 커가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낸다. 그것으로 우리는 요즘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지내는지 짐작한다.

그 덕에 이번 여행 중에 만난 Y는 겨우 만 세 살 반인데도 나를 알아보았다. W선생의 딸인 Y는 나를 보자마자, "진아이(金阿姨, 김이모), 니하오?" 고함을 지르며 덥석 달려와 안겼다. 내가 칭다오를 떠났을 때 그 애는 고작 만 한 살이었다. 어떻게 나를 알아볼까?

W선생은 한창 호기심이 많은 Y에게 평소 카톡과 웨이신 내용을 일일이 보여주고 설명해줬단다. Y는 복습이라도 하듯, 자랑이라도 하듯, 엄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내게 종알거렸다. 아이 특유의 앙증맞은 목소리로 말끝마다 "이모, 맞지? 그렇지?"를 덧붙이면서.

그 순간이 내게는 눈부신 선물이었다. 오래전 내게 중국 학생, 중국인으로만 인식되던 사람들이, 이제는 '중국'이라는 수식어 없이 그냥 친구이다. 마음이 열리고 진심이 통하면, 수식어와 조건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다. 수식이나 조건을 다는 잔가지가 떨어지고 관계의 뿌리가 오롯이 드러날 때, 우리는 친구가 된다.

연재를 마치며
연재를 마치면서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행여나 저의 글이 독자들에게 '중국은 이렇고 중국인은 저렇다'라는 편견을 더해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경험한 이야기 속에는 주관적인 생각과 편견이 끼어들기 마련입니다. 비록 서두에 예전의 낡은 편견이 없어졌다고 했지만, 살면서 경험한 것들은 또 다른 편견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경험이 만든 편견은 더 지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바람은 있습니다. 고만고만한 한국 선생과 고만고만한 중국 대학생들의 작은 이야기가, 중국에 관한 거대 담론이 놓친 일상을 조금이라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동안 제 글을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과 수고해주신 오마이뉴스 기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편집ㅣ조혜지 기자



태그:#칭다오이공대, #한중 합작 건축교육, #국제학원건축과, #중국 신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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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이 좋다. 길이 없지만, 내가 걸어가면 길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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