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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다오 잔교에서 바로본 천주교 성당의 모습 위로 갈매기가 난다
▲ 유럽의 어제와 중국의 오늘이 어우러진 칭다오 칭다오 잔교에서 바로본 천주교 성당의 모습 위로 갈매기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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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다오는 푸른 바다와 아름다운 해변을 낀 자연경관, 독일과 일본에 의한 식민 통치를 차례로 경험한 특별한 역사를 간직한 도시다. 자연과 문명이 어우러지고, 동서양의 문화가 만나며 독특한 맛과 멋을 풍긴다. 박제된 유럽의 어제가 있고, 급변하는 중국의 오늘이 있다.

칭다오는 그래서 걸을 맛 나는, 걷고 싶은 도시다. 무작정 숙소를 나서 어딜 가도 나쁘지가 않다. 걷다보면 우연히 전시가 열리는 갤러리를 만나기도 하고, 유명하진 않지만 유럽의 근대를 느끼게 하는 건축 유물들이 지천으로 펼쳐진다. 10년 전만 해도, 예쁜 집이 있어 사진을 찍고 서성이면 집주인이 잠옷 바람으로 나와 천천히 들어와 구경하라며 차를 권할 정도였다고 한다.

비록 그 정도는 아니지만, 지금도 길을 물으면 동네에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도와주려는 친절한 모습이 여전하다. 다만 주차장이 부족해서인지, 인도에 주차된 차들 때문에 차도로 내려가야 하는 불편이 해소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식민 지배 아픔 간직한 칭다오, 뭔가 다르다

'凹'자형 건물로 독일 건축군 중 단위 건물로는 가장 크다.
▲ 독일 총독부 건물 '凹'자형 건물로 독일 건축군 중 단위 건물로는 가장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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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근처에 있는 칭다오 총독부를 찾았다. 독일이 1902년 시공해 1906년에 완공한 '凹'자 형태이며 건평만 7500m²이다. 독일 건축물 중 단위 건물로는 가장 크다. 독일, 일본, 국민당의 주요 군사지휘소 및 사무실로 쓰이다가 지금은 칭다오 시의회로 사용되고 있다. 대외적으로 개방되지 않아 참관할 수 없는 것이 아쉽다.

문득 사라져버린 조선총독부가 떠오른다. 1926년 경복궁 내에 건설된 조선총독부는 해방 이후 미군정청사로 쓰이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도 거행된 곳이다. 중앙청,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다가 1995년 광복 50주년에 폭파되어 그 잔해를 독립기념관에 전시하고 있다. 일제 침탈의 상징으로 경복궁 정문을 가로 막고 선 고압적인 조선총독부를 해체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꼭 폭파의 방법이어야 했는지 곱씹어보게 된다.

일본의 잔혹했던 식민 지배보다 더 무서운 것은 식민 지배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친일파가 앞장서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유물들을 없애려 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총독부를 뒤로 하고 돌아섰다. '친일파를 철저히 처단하는 대신 일제의 유물은 과거의 아픔을 기억하자는 차원에서 잘 보존했으면 좋았을 텐데'하는 생각이 꼬리를 문다.

라오서는 칭다오대학에 교수로 근무하며 대표작 <낙타상자>를 집필한다.
▲ 라오서 공원 라오서는 칭다오대학에 교수로 근무하며 대표작 <낙타상자>를 집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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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으로 좀 더 걷자 좁은 폭으로 길게 조성된 공원이 나온다. 일본이 조성한 제6공원이었는데 지금은 라오서(老舍)공원으로 불린다. 공원 입구에 중국현대소설가 라오서의 동상이 있다. 라오서는 원래 베이징 출신이지만 1934년부터 칭다오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며 1937년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인 <낙타상자(駱駝祥子)>를 집필했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1966년 홍위병에게 굴욕적 비난을 받고 베이징 태평호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비극적인 죽음의 이미지 때문인지 베이징과 칭다오에 있는 그의 고거를 둘러 볼때면 왠지 마음이 숙연해진다. 공원을 따라 올라가자 산둥성의 대표 선수 공자의 동상이 있다. 그 왼편으로 높은 첨탑에 십자가 두 개가 멀리서도 눈에 띠는데, 바로 천주교 성당이다.

독일 필로우하가 설계해 1934년 완공 되었다.
▲ 천주교성당 독일 필로우하가 설계해 1934년 완공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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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6시, 매주 주일 8시에 미사가 열린다.
▲ 천주교성당의 내부 매일 아침 6시, 매주 주일 8시에 미사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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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건축설계사 필로우하(1880~1947)가 고딕식과 로마식 건축양식을 결합해 설계한 것으로 1932년 시공, 1934년 완공되었으며 당시에는 성 미카엘 성당으로 불렸다. 56m 높이로 신중국 건국 전까지 산둥성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칭다오 사람들의 웨딩포토 촬영지로 환영받는 이 아름다운 성당이 묵도했을 굴곡 많은 칭다오의 역사를 이 성당의 설계사였던 필로우하 역시 겪었다. 필로우하는 칭다오가 독일의 식민지가 된 1907년, 청운의 꿈을 안고 칭다오로 건너와 운수회사를 설립한다.

그러나 1914년 1차 대전 발발과 함께 일본이 칭다오를 공격하자 그는 독일군에 가담해 끝까지 싸우다 포로가 되고, 결국 1920년까지 일본으로 보내져 수감된다. 이후 독일로 이송되었다가 1926년 다시 칭다오로 와서 이 성당을 설계하고, 칭다오 해변가인 팔대관(八大關)에 집을 짓고 살다가 1947년 칭다오에서 생을 마감한다.

칭다오 침탈의 주체에서 다시 건설의 설계사가 되었다가 평범한 칭다오 사람으로 살다 생을 마친 한 이방인의 삶. 그의 삶이 곧 이 성당의 모습에 새겨진 듯하다. 문혁 때 크게 훼손되었다가 1981년 4월 복원 후 개방됐다. 커피잔을 들고, 성당 종소리에 놀란 비둘기와 갈매기들이 성당 첨탑과 붉은 기와 위로 비행하는 모습을 내려다보는 것은 칭다오사람만이 누리는 복일 것이다.

성당을 나와 서북쪽 내리막길로 내려가면 수산물시장이 있다. 싱싱한 해산물을 사서 바로 요리해주는 저렴하고 맛있는 식당들도 많다. 한국의 해물과 비교해보느라 만보가 더욱 느려진다.

특이한 먹거리, 시원한 맥주... 칭다오만의 '맛'

대표적인 루차이요리점이자 1980년대까지 칭다오에서 가장 큰 식당이었다.
▲ 춘화루 대표적인 루차이요리점이자 1980년대까지 칭다오에서 가장 큰 식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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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막으로 이어진 시장 구경을 마치고 다시 내려와 중산대로를 따라 북쪽으로 걸어가니, 1891년부터 영업을 해 오고 있다고 적힌 춘화루(春和樓)라는 식당이 나타난다. 산둥요리를 '루차이(魯菜)'라고 하는데, 대표적인 루차이 요리점이자 1980년대까지 칭다오에서 가장 큰 식당이었다. 120년 역사다 보니 공친왕을 비롯해 이홍장, 캉유웨이, 라오서 등 이곳을 다녀간 인물도 다채롭다.

치킨과 비슷한 샹쑤지(香酥鷄)가 유명한데, 조금 짠 편이며 닭 머리와 닭발의 발톱까지 그대로 나와 한국 손님들은 적잖이 놀란다. 산둥 방언으로 닭을 '기'로 발음하는데, 우리나라에 온 화교 대부분이 산둥 출신이다. 중국요리 중에 라조기, 깐풍기 등 '기'가 붙은 것은 모두 닭요리라고 생각하면 된다.

벽시원에서 파는 특이한 먹거리들의 모습이다.
▲ 벽시원 벽시원에서 파는 특이한 먹거리들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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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을 나와 북쪽으로 얼마 안 가 벽시원(劈柴院)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이곳은 원래 장작시장이 들어섰던 곳인데,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여들며 상성(相聲, 만담 형식의 공연), 연극, 서커스 등의 공연이 펼쳐졌다. 중국의 유명한 상성, 서커스 배우 중에 이곳을 거쳐간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칭다오 최초의 극장도 이곳에 있었는데 지금은 다 사라지고 좁은 골목 안에 베이징의 왕푸징 야시장처럼 바다뱀, 전갈, 불가사리 등을 파는 특이한 먹거리 시장만 남아 있다. 이곳의 전통을 살려 문화가 살아 있는 거리로 잘 개발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큰길을 따라 올라가니 지모루(卽墨路) 소상품 시장이다. 1980년 주로 면직, 의류 등의 경공업 제품 시장으로 문을 연 후 지금은 없는 게 없는 칭다오의 대표적인 시장이다. 상점 안에 비밀스런 문이 하나씩 안으로 열릴 때마다 더 정교하게 만들어진 '슈퍼 짝퉁' 명품이 나온다.

마카오의 베네시안을 연상시키는 칭다오 천막성이다.
▲ 칭다오 맥주거리에 있는 천막성 마카오의 베네시안을 연상시키는 칭다오 천막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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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사람들로 넘치는 칭다오 최대의 상업 번화가이다.
▲ 타이동 거리 늘 사람들로 넘치는 칭다오 최대의 상업 번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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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모루를 나와 약간 거리가 있어 버스를 타고 타이동(臺東)으로 향했다. 타이동은 칭다오에서 최고로 번화한 상업거리이다. 주변으로 백화점과 음식점이 즐비하고 주말이면 인파로 넘친다. 타이동 인근에 골동품 등을 파는 문화거리, 마카오의 베네시안처럼 푸른 하늘 천막이 있는 천막성(天幕城), 차(茶)시장 등 볼거리가 많다.

박물관 안에서 주는 맥주가 가장 진하고 풍부한 맛이 난다.
▲ 칭다오맥주박물관 박물관 안에서 주는 맥주가 가장 진하고 풍부한 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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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으로 달아 파는데 칭다오에서만 즐길 수 있으며 보기보다 맛이 좋다.
▲ 길거리에서 파는 비닐봉지 맥주 근으로 달아 파는데 칭다오에서만 즐길 수 있으며 보기보다 맛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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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유명한 것은 칭다오맥주박물관이다. 50위안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맥주 제조 과정에서부터 칭다오맥주의 발전사를 한 눈에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어디에서도 맛보지 못한 풍부하고 진한 맥주 원액을 맛볼 수 있다.

1903년에 독일과 영국 상인이 합자로 이곳에 칭다오맥주회사를 설립한 후, 일본이 그 비법을 전수받아 1933년 우리나라에도 맥주공장이 설립되었으니 칭다오맥주가 한국 맥주의 원조인 셈이다. 칭다오에 맥주공장이 제5공장까지 있는데, 이곳 제1공장의 맛을 으뜸으로 친다. 8월에는 국제맥주축제가 맥주박물관 바로 앞 맥주거리에서 열리기도 한다.

중국에서 맥주가 가장 생산된 곳은 칭다오가 아니라 하얼빈(哈尔滨)이다. 칭다오보다 3년 빠른 1900년에 이미 하얼빈맥주가 나왔다. 그럼에도 칭다오사람들이 맥주에 대해 갖는 자부심은 대단하다. 왜냐하면 맥주를 중국어로 '비지우(啤酒)'라고 하는데, 그 말과 한자를 자신들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독일이 처음 맥주를 생산하자 칭다오사람들은 독일어 'Bier'를 그대로 사용하거나 발음이 비슷한 피주(皮酒), 비주(卑酒) 등을 사용했다. 이후 1916년 일본이 이 공장을 강제 인수해 맥주(麥酒)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지만, 칭다오사람들은 여전히 독일식 발음을 사용하다가 1930년대 입 구(口)를 더한 '비지우(啤酒)'라는 새로운 한자와 단어를 만들어냈다. 독일이 칭다오를 나타내던 웨이드식 'TSINGTAO'라는 표기는 맥주 라벨에 아직도 남아 있다.

칭다오 밤거리를 걷다보면 가게 앞에 철로 된 드럼맥주통을 놓고, 무게를 달아 비닐봉지에 맥주를 담아 파는 곳을 어렵사리 만날 수 있다. 이 봉지 맥주를 '싼피(散啤)'라고 부르는데, "김새게 뭔 봉지맥주여~"하고 그냥 지나치다가 한 번 사서 숙소에 와 컵에 따라 마셔보니 진한 생맥주 맛이 일품이다. 제1공장 원액맥주라고 하는데 한 근(500㎖)에 우리 돈 2000원 정도다. 칭다오에서만 즐길 수 있는 비닐봉지 맥주를 사 숙소 의자에 걸어 놓고 마시며 칭다오 만보(漫步)의 여독을 푼다.

빨대를 주기도 하지만, 봉지의 양쪽 끝을 잡고 컵에 따라 마시면 된다.
▲ 봉지맥주 빨대를 주기도 하지만, 봉지의 양쪽 끝을 잡고 컵에 따라 마시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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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칭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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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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