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독일이 남긴 근대 유럽의 흔적을 품고 있는 칭다오의 풍경
▲ 독일의 흔적을 품은 독수리 독일이 남긴 근대 유럽의 흔적을 품고 있는 칭다오의 풍경
ⓒ 김대오

관련사진보기


칭다오의 아침은 보통 안개로 시작된다. 해가 떠오르면서 어떤 날은 안개가 사라지고,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박무(薄霧)에 도시가 포위된다. 어쩌면 해풍과 안개가 만드는 이런 몽환적이고 신비한 분위기가 칭다오의 또 다른 매력일지도 모르겠다. 샤오칭다오(小靑島)에 내렸던 칭다오 만보(慢步)의 닻을 거둬 올리고, 바로 옆 바닷가 루쉰(魯迅)공원을 향해 돛을 펼친다.

대문 모양의 전통적인 건축물인 패방이 바로 루쉰공원 입구다. 그 너머로 꼬장꼬장하고 굳건해 보이는 루쉰 석상이 있고, 그 뒤 바닷가 해변을 따라 약 1km에 걸쳐 루쉰공원이 조성돼 있다. 원래 1929년 일본 점령기에 서빈(曙滨)공원이던 것을 1950년 루쉰공원이라고 바꿔 불렀으며, 루쉰 사망 50주년인 1986년에 석상을 세우고, 2001년 루쉰의 시가 적힌 회랑도 조성했다.

철썩 철썩 파도소리... 루쉰의 함성 같네

루쉰의 서체로 된 패방 너머로 루쉰조각상이 있다.
▲ 루쉰공원 루쉰의 서체로 된 패방 너머로 루쉰조각상이 있다.
ⓒ 김대오

관련사진보기


'반봉건' '반식민지 중국' '중화사상'에 물든 중국인들의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일본 유학 중이던 1902년 의사가 되려던 꿈을 접고, 문학의 길에 들어섰던 루쉰은 사실 칭다오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그러나 독일의 식민지로 전락한 칭다오 사람들에게도 민족혼을 일깨우고자 평생을 노력한 루쉰의 의미는 좀 더 각별하게 느껴졌을 법하다. 해변에 철썩거리는 파도소리가 마치 철로 된 절망의 방에서 홀로 깨어 중국인을 일깨우고자 애썼던 루쉰의 함성처럼 들린다.

해변의 붉은 바위 위에 고풍스런 건물 하나가 우뚝 솟아 있는데 칭다오수족관이다. 1932년 중화민국 초대 교육총장을 지낸 차이위안페이(蔡元培)가 설립한 중국 최초의 수족관으로 담수, 해수, 극지의 다양한 어종들이 전시되고 있다. 해저세계와 연계돼 4개의 테마전시관을 운영하는데, 무빙워크 해저터널과 상어쇼 등이 볼만하다.

수족관을 지나자 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지는데 제1해수욕장이다. 독일점령기인 1901년부터 해수욕장으로 사용됐으며, 1921년에만 1만6000여 명의 피서객이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당시 아시아에서는 최초이자 가장 큰 해수욕장이었던 셈이다. 지금도 해수욕철이면 인산인해를 이룬다. 연세가 들어 보이는 중장년층 어른들이 배구, 마작, 카드놀이를 하며 여유를 즐긴다. 쌀쌀한 날씨인데도 반바지 수영복만 걸치고 수영하는 사람도 있다. 마오쩌둥은 13번이나 창장(長江)을 헤엄쳐 건너고, 덩샤오핑은 바다에서 수영하는 것을 좋아해 88세 때에도 8번이나 바다 수영을 했다고 한다. 그 영향인지 계절을 가리지 않고 수영을 즐기는 중국인이 많다.

캉유웨이의 삶

캉유웨이의 파란만장한 삶의 종착지로 유럽풍의 멋이 느껴지는 저택이다.
▲ 캉유웨이 고거 캉유웨이의 파란만장한 삶의 종착지로 유럽풍의 멋이 느껴지는 저택이다.
ⓒ 김대오

관련사진보기


바닷가를 등지고 나지막한 능선 쪽으로 걸음을 돌려 도로를 건너자 '문화 명인 고거의 거리(文化名人故居一條街)' 표지가 보인다. 이 길을 따라 캉유웨이(康有爲), 선충원(沈從文), 원이둬(聞一多), 량스추(梁實秋) 등 30여 곳의 고거가 펼쳐진다.

이 거리는 중국 최고의 문화거리로 선정되기도 했는데, 바다를 낀 자연환경과 유럽풍의 세련된 건축물들 때문일 것이다. 군벌이 난립하던 혼란스러운 1920, 1930년대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칭다오가 얼마나 소중한 안식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골목을 조금 걸어 오르자 예사롭지 않은 서양식 3층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청말 대표적인 지식인이자 정치가였던 캉유웨이가 살았던 집이다. 중국 전 국토의 7%가 서양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상황을 목도해야 했던 캉유웨이는 7번의 개혁이념을 담은 상소문을 올리고 광서제와 연대해 1898년 변법자강을 기치로 내건 무술정변을 주도하지만 서태후에 의해 그 뜻이 좌절되고, 일본에 망명했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인 1917년에는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며 마지막 황제 부의를 복권하려 했지만, 이마저 실패하고 1923년 원래 독일 총독 부관의 저택이던 이 건물을 사서 저술활동을 하다가 1927년 3월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마지막 황제였던 부의가 저택의 이름을 천유당(天游堂)이라 하사해 줘 천유원(天游園)이라 했으며, 집안의 가구들은 공친왕이 선물해 준 것이다.

1858년 광둥성 난하이(南海) 출신인 캉유웨이는 1927년 상하이에서 고희연을 마치고 칭다오로 돌아와 당시 유명한 광동식당이던 영기주루(英記酒樓)에서 식사를 하고 갑자기 숨을 거두는데 일본이 자신들의 중국 침탈에 방해가 되는 캉유웨이를 독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캉유웨이의 무덤은 문화대혁명 때 크게 훼손되었다가 지금은 칭다오 푸산(浮山)에 안장되어 있다. 청말 위태롭던 조국을 구하려던 뜻은 번번이 좌절되고, 죽어서도 평온한 안식을 누리지 못했던 캉유웨이지만, 낮은 구릉이 습기와 바람을 막아주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위치한 그의 고거만큼은 유럽풍의 붉은 기와와 대리석으로 멋을 내 어떤 건축물보다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정원에는 약 100년 전 캉유웨이가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급성장한 중국의 위상을 말해주듯 제법 웅장하게 자라 있다.

캉유웨이고거에서 소어산(小魚山)으로 가는 오르막길은 조각조각 돌을 세워 만든 것 같은 운치 있는 거리와 유럽풍 건물이 이어진다. 많은 중국의 문인과 지식인들이 왜 이곳을 좋아했는지 알 것 같다. 지금도 이곳에 집을 사려는 사람이 많은지 부동산 간판이 길가에 많이 놓여있다. 칭다오 주택의 번지수는 거리 오른쪽에 홀수, 왼쪽은 짝수 호로 돼 있다. 소어산 입구에는 작은 커피숍이 길 양옆으로 있어 잠시 쉬며 여로를 풀기에 적합하다.

18m 남조각에 올라서서 칭다오 시가지를 내려다보면 독수리가 된 것같은 느낌이 든다.
▲ 소어산공원 18m 남조각에 올라서서 칭다오 시가지를 내려다보면 독수리가 된 것같은 느낌이 든다.
ⓒ 김대오

관련사진보기


붉은 기와를 얹은 칭다오 시가지 건너편 영빈관과 신호산이 보인다.
▲ 소어산에서 바라본 신호산 붉은 기와를 얹은 칭다오 시가지 건너편 영빈관과 신호산이 보인다.
ⓒ 김대오

관련사진보기


소어산은 해발 60m에 불과하지만 칭다오의 구 시가지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다. 독일 점령기 때 아문(衙門)포대가 설치되어 아문산으로 불리다가 1923년 소어산으로 바뀌었으며, 1985년 산 정상에 18m 높이의 팔각정인 남조각(覽潮閣)이 건설되었다.

한국에서 지인이 올 때마다 이곳을 찾지만, 남조각의 3층 정상 누각을 한 바퀴 돌며 바다와 맞은편의 신호산(信號山), 붉은 기와 건물들을 내려다보는 것은 언제 봐도 새롭고 감탄을 자아내는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날씨가 맑으면 캉유웨이가 말했던 '붉은 기와, 푸른 나무, 남빛 바다, 쪽빛 하늘(紅瓦綠樹碧海藍天)'의 표현이 정말 실감나게 다가올 것이다. 이곳에 서서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을 한꺼번에 내려다보며 여행을 갈무리하기에도 더 없이 적합하다.

식민지 유산도 그대로 받아들이는 중국

독일과 일본군의 병영이 있던 곳이 멋진 캠퍼스로 무르익었다.
▲ 중국해양대학교 독일과 일본군의 병영이 있던 곳이 멋진 캠퍼스로 무르익었다.
ⓒ 김대오

관련사진보기


소어산에서 신호산 방향으로 도로를 따라 내려오면 중국해양대학 정문이 나온다. 칭다오의 명문 대학이고, 중국 해양연구 방면 최고의 산실이다. 마오쩌둥의 네 번째 부인 장칭(江靑)이 도서관 사서로 일했던 곳이기도 하다. 교문을 들어서자 "바다는 모든 물줄기를 받아들여 멀리로 나아간다(海納百川取則行遠)"는 교훈이 적힌 바위가 이방인을 맞이해준다.

한때 독일과 일본군 병영이자 연병장이었던 곳이 1924년 개교하여 이제는 100년의 역사를 바라보는 어엿한 캠퍼스로 푹 무르익어 있다. 한족과 소수민족이 번갈아가며 중원을 지배한 역사적 경험 때문인지 중국은 과거 부끄러운 식민지의 유산을 교훈에 등장하는 바다처럼 그대로 받아들여 품어 안는다. 그것이 모든 것을 자신들의 문화로 녹여낼 수 있다는 항아리 문화의 자신감인지, 실용주의 가치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정작 친일파는 버젓이 호위 호식하는데 친일 유산은 하루라도 빨리 없애지 못해 안달이었던 우리나라 모습과 대조적이다.

맞은편 신호산 언덕 영빈관에서 독일총독은 이곳 연병장에서 병사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봤을 것이다. 그 식민지 통치의 아픔이 서린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캠퍼스에는 운동을 즐기는 학생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하다. 아픔을 품고 삭여 더 아프지 않은, 상처가 별이 된 자리다. 어쩌면 이게 바로 칭다오 모습일 것이다.   

해양대학을 나와 영빈관을 향해 올라가는데 한식이 가까워서인지 사거리에서 지전(紙錢)을 태우는 아주머니가 보인다. 원래 무덤에서 지전을 태우는데, 사고나 전쟁 등으로 유골을 찾지 못하면 평소 고인이 살던 주변 사거리에 영혼이 배회한다고 생각해 저렇게 길거리에서 지전을 태운다고 한다.

독일은 17년 동안 칭다오를 지배하며 엄청난 인력과 물자를 투입해 칭다오를 선진 도시화, 군사 요새화했다. 근대도시로 탈바꿈한 칭다오를 넘보는 세력이 많았고, 그 때문에 숱한 아픔도 겪어야 했다. 특히 독일총독이 거주했던 신호산은 독일군 최대의 요새로 일본이 이곳을 포위했지만, 난공불락의 요새를 끝내 공략할 수 없었다. 독일군이 항복한 이유는 식량이 떨어져서라고 한다.

독일 총독이 거주했던 화려한 저택의 풍모를 느끼게 한다.
▲ 영빈관 독일 총독이 거주했던 화려한 저택의 풍모를 느끼게 한다.
ⓒ 김대오

관련사진보기


신호산 중턱에 자리한, 대리석으로 갑옷을 입은 듯 견고해 보이는 영빈관(迎賓館)은 당시 독일이 100만 마르크를 투자해 1905년 시공해 1907년에 완공하였다. 두 명의 총독 투르펠과 왈덕의 관저로 쓰였다. 4층으로 된 연빈관 안에는 세계에서 세 대뿐이라는 블뤼트너가 직접 만든 상아 건반 피아노를 비롯해 상들리에, 시계, 벽난로 등 화려하고 세련된 장식품들로 꾸며져 있다.

영빈관 건물 앞에 장군의(將軍椅)라는 석좌가 있는데, 투르펠총독이 이곳에 앉아 군사명령을 하달하며 총독의 권위와 위엄을 뽐냈을 것이다. 1957년 마오쩌둥이 부인 장칭과 칭다오에 피서를 와서 이곳에서 지냈기 때문에 문화대혁명 때에도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 2013년 보수 공사를 마치고 새롭게 단장한 영빈관은 현재 호텔, 커피숍으로 일반인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비치빛 시계탑이 멋스러운 기독교회당으로 문화대혁명 때 훼손되었다가 1980년 보수, 개방하고 있다.
▲ 기독교회당 비치빛 시계탑이 멋스러운 기독교회당으로 문화대혁명 때 훼손되었다가 1980년 보수, 개방하고 있다.
ⓒ 김대오

관련사진보기


영빈관을 빠져나와 서쪽으로 좀 더 가면 왼쪽으로 비취빛 시계탑이 멋진 기독교회당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신호산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매표소가 있다. 신호산은 고대의 봉화 횃불을 상징한다는 세 개의 붉은 버섯모양의 지붕이 멀리서도 얼른 눈에 들어온다.

독일군의 무선전신국이 있던 곳이어서 신호산으로 불렸으며, 해발 98m 정상에 올라가면 20분에 한 바퀴씩 도는 회전 라운지가 있어 편하게 칭다오의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소어산에서 이미 한 차례 시가지를 내려다보았지만 신호산에서 내려다보는 경관은 또 다른 맛과 멋을 선사한다. 새들이 나무를 옮겨 가며 주변을 살피는 것도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신호산의 회전 라운지에서 바라보는 풍경으로 멀리 잔교가 보인다.
▲ 신호산 신호산의 회전 라운지에서 바라보는 풍경으로 멀리 잔교가 보인다.
ⓒ 김대오

관련사진보기


신호산 중턱에는 독일이 1897년 11월, 교주만과 칭다오를 점령한 기념으로 조각한 독수리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독일의 국가문장이자 독일 황실을 나타내는 독수리는 칭다오에서 그리 오래 비상하지 못하고, 1922년 일본군에 의해 뜯겨져 일본으로 보내졌다.

지금은 그곳에 날개를 접은 독수리 석상이 100년 전 박제된 기억을 안고 자신들이 건설한 칭다오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너무 오래 걸어서일까. 문득 저 돌로 된 독수리를 깨워 그 날개에 올라타고 칭다오의 남은 여정을 둘러보는 영화 같은 상상을 하게 된다. 독수리의 양쪽 날개 같은 소어산과 신호산에서 이미 조감(鳥瞰)을 마치고도 말이다.

조각상은 일본군이 뜯어 일본으로 가져갔으며 이곳에 독수리 석상이 새워졌다.
▲ 독일이 전승 기념으로 신호산에 남긴 독수리 조각 조각상은 일본군이 뜯어 일본으로 가져갔으며 이곳에 독수리 석상이 새워졌다.
ⓒ 김대오

관련사진보기




태그:#칭다오, #루쉰공원, #소어산, #신호산, #영빈관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