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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속의 작은 유럽'으로 불리는 칭다오(靑島)는 푸른 파도, 붉은 기와, 하얀 해무가 어우러지며 서양의 근대와 중국의 현대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매력을 갖고 있다. 잘 숙성된 묵은지 맛과 갓 담은 생김치 맛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도시다.

구석구석 역사와 문화가 멋들어지게 펼쳐지는 칭다오는 걸을 맛 나는 도시다. 그래서 유유자적, 천천히 칭다오 구석구석을 만보(慢步)로 거니는 것은 즐겁고, 유쾌하다. 한 걸음에 하나의 경치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달라지는 풍경이 펼쳐지는(一步一景, 步移景異) 맛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이 식민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1901년 4월 개통한 칭다오 철도의 시발점이다.
▲ 칭다오역 독일이 식민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1901년 4월 개통한 칭다오 철도의 시발점이다.
ⓒ 김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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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다오의 시기별 지배권을 이해하면 칭다오의 역사가 보인다.
▲ 칭다오의 시기별 지배권 칭다오의 시기별 지배권을 이해하면 칭다오의 역사가 보인다.
ⓒ 김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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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틀버스가 유럽풍으로 한껏 멋을 낸 칭다오역에 도착한다. 묵은지를 좋아하는 탓에 근대 서양의 흔적이 많이 남은, 사람 냄새 더 진한 칭다오의 서쪽을 먼저 찾는다. 1897년 독일 천주교 선교사 2명이 살해되는 거야교안(鉅野敎案) 사건을 빌미로, 독일은 1898년 3월 <교오조계지조약(膠澳租界地條約)>을 강제로 체결하여 군사요충지 칭다오를 해군 기지화하고, 이곳에 교오(膠澳)총독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 일환으로 1901년 4월, 칭다오 역사가 지어지고 처음 열차가 개통되었다. 최근 건설된 바다를 가로지르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교주만대교가 현대 중국의 소통과 발전을 위한 길이라면, 이 철로는 서양 열강의 억압과 착취를 위한 손과 발 역할을 했던 셈이다. 무능한 청나라 정부 탓에 독일의 식민 지배를 받아야 했던 그 역사의 상처와 아픔이 시간이 흘러 지금 이렇게 꽃처럼 아름답게 피어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명나라 때부터 배를 접안하기 위한 시설이 있었다고 하는 칭다오의 랜드마크다.
▲ 잔교(棧橋) 명나라 때부터 배를 접안하기 위한 시설이 있었다고 하는 칭다오의 랜드마크다.
ⓒ 김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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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부서져 굽이친다는 회란각(回瀾閣)은 칭다오맥주 라벨에도 도안되어 있다.
▲ 회란각(回瀾閣) 파도가 부서져 굽이친다는 회란각(回瀾閣)은 칭다오맥주 라벨에도 도안되어 있다.
ⓒ 김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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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바다에서 가장 가까운 역은 우리나라 정동진역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랐다고 하는데, 칭다오역도 바다에서 무척 가깝다. 역사를 등지고 몇 걸음 옮기자 바로 바다가 나타난다.

그리고 마치 바다에 떠 있는 듯, 고풍스런 누각 하나가 긴 방파제 끝에 우아하게 서 있다. 바로 칭다오의 랜드마크 394m의 잔교(棧橋)다. 명나라 때부터 배를 접안하기 위한 시설이 있었다고 하는데, 1892년 칭다오에 총병아문이 설치되면서 군사적 목적으로 부두를 200m 해안으로 더 냈다. 이후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이 뤼순(旅順)에서 화강암을 운반해 부두를 더욱 견고하게 해 '이홍장잔교'로, 1897년 독일 군함이 이곳에 정박하며 '해군잔교'로 불렸다.

1932년에는 당시 칭다오 시장이던 후뤄위(胡若愚)가 잔교를 보수하며 부두 끝에 팔각 정자를 짓고 파도가 부서져 굽이친다는 의미로 '회란각(回瀾閣)'이라 명했다. 회란각은 칭다오맥주 라벨에도 도안되어 있는데, 2층에 올라가면 서편의 해상황궁(海上皇宮), 건너편의 해군박물관에 정박한 군함, 샤오칭다오(小靑島) 섬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해무 때문에 붉은 기와를 얹어 놓은 칭다오 시가지가 뿌옇게 보이지만, 안개가 연출하는 다양한 경관 또한 나쁘지 않다. 갈매기에게 주는 모이를 팔고 있어 언제 가도 많은 갈매기 떼가 잔교 주변을 맴돌고 있다. 잔교를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바다를 향해 나가려는 듯한 거대한 화살표처럼 보이는데, 이는 칭다오가 더 넓은 세계로 계속 뻗어나가라고 주문하고 있는 듯하다.

잔교를 벗어나 동쪽 해안로를 따라 걸으니 바닷가에 오래된 호텔들이 서 있다. 그 중 범해명인호텔(泛海名人酒店)은 1912년 중화민국 임시총통이던 쑨원(孫文)이 칭다오에 왔을 때 묵었던 곳이다. 쑨원은 독일 총독을 만나 중화민국의 식민 지배에 관한 입장을 밝히고, 칭다오 시민들에게 제국주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 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칭다오에는 쑨원의 호를 딴 중산로, 중산공원 등 쑨원을 기념한 도로와 공원이 남아 있다.

1467년 명대 건축된 천후궁은 칭다오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 천후궁(天后宮) 1467년 명대 건축된 천후궁은 칭다오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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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에 천상성모로 불리는 마조신이, 양 옆는 천리안(千里眼)과 순풍이(順風耳) 두 시종이 모셔져 있다.
▲ 마조신(馬祖神) 중앙에 천상성모로 불리는 마조신이, 양 옆는 천리안(千里眼)과 순풍이(順風耳) 두 시종이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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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걸어가자 천후궁(天后宮)이 나타난다. 1467년 명대 건축된 천후궁은 칭다오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칭다오 사람들은 "천후궁이 먼저 있고, 칭다오시가 나중에 생겼다(先有天后宫,後有青島市)"고 말한다. 간 날이 청명절 연휴여서 마조신(馬祖神)을 모신 천후궁은 소원을 비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대만, 홍콩 등 바다를 끼고 있는 중국 동남 연해 도시를 중심으로 바다에 평온을 가져다주는 여신 마조신을 믿는 사람이 2억 명에 육박하고, 전국에 천후궁도 500개나 된다고 한다. 본전 중앙에 천상성모로 불리는 마조신이, 양 옆에는 천리안(千里眼)과 순풍이(順風耳) 두 시종이 함께 모셔져 있다.

송대 바다에 빠진 오빠들을 구한 임묵랑(林默娘) 전설이 마조신앙으로 발전했다. 역대 황제가 내린 봉호가 부인(夫人)에서 비(妃), 천비(天妃)를 거쳐 천후(天后)로 높아졌으며, 마조신앙은 2009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무형유산이 되었다. 사당 안 은행나무 두 그루는 소원을 적은 붉은 팻말로 포위되어 이곳을 찾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말해주는 듯하다.

이렇게 멋진 건물이라면 죄를 짓고 감옥 체험을 해보고 싶을 정도다.
▲ 독일 감옥 유적 이렇게 멋진 건물이라면 죄를 짓고 감옥 체험을 해보고 싶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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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담벽, 두꺼운 철문, 곳곳에 걸린 쇠사슬이 감옥의 삭막함을 느껴지게 한다.
▲ 독일 감옥 내부 높은 담벽, 두꺼운 철문, 곳곳에 걸린 쇠사슬이 감옥의 삭막함을 느껴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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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후궁을 나오자 바로 앞에 멋진 건물이 하나 있어서 성당이나 교회인가 했더니, 독일이 1900년 건설한 감옥 유적이라는 표지석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멋진 건물이라면 죄를 짓고 감옥 체험을 해보고 싶을 정도다. 중국의 지방검찰청, 공안국 등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칭다오 사법교육기지로 2007년부터 개방되고 있다. 전시관 안에는 칭다오의 시기별 사법제도 발전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아 칭다오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감옥은 인, 의, 예, 지, 신으로 수감실이 나눠져 있다. 인(仁)자 감옥을 둘러보는데 높은 담벽, 두꺼운 철문, 곳곳에 걸린 쇠사슬이 감옥의 삭막함을 느끼게 하지만, 층간 계단을 대리석 원형으로 멋지게 설계해 그 삭막함을 밖으로 드러내진 않는다. 반면 반지하쯤 되는 수감실에는 일본이 이곳을 감옥으로 사용하며 죄수들을 30cm 정도의 오물 물 위에 세우고 쇠사슬로 묶었다는 안내문이 있다. 일제의 잔혹함을 칭다오에서도 새삼 느끼게 된다.

해안길에서 벗어나 조금 더 동쪽으로 걸으면 해군박물관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되던 전투기, 해군 함정 등을 60개국으로부터 기증 받아 전시하고 있는데, 1949년 건군된 중국해군의 발전사를 살펴볼 수 있다. 마오쩌둥이 1956년 소련의 스탈린으로부터 선물 받은 일(IL)-14비행기와 중국 국경절 열병식에 참여했던 재래식 무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한국전쟁 당시 중국군이 최대의 승전이라고 자랑하는 철원 상감령(上甘嶺)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북한군이 중국에 선물한 38m 길이에, 35개의 총탄, 포탄이 박힌 상감령 고목도 이곳에 있다. 2005년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 중국의 2세대 잠수함인 237호 잠수함을 견학했던 기억이 난다.

칭다오는 현재 닝보(寧波), 잔장(湛江)과 함께 중국의 3대 해군기지다.
▲ 칭다오 해군박물관 칭다오는 현재 닝보(寧波), 잔장(湛江)과 함께 중국의 3대 해군기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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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를 돌아보면, 중원을 괴롭히는 적은 늘 북방의 유목민족이었다. 그래서 만리장성을 쌓고,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기며 북쪽의 적에 대비했다. 그러나 19세기 적은 말을 타고 북쪽에서 온 것이 아니라 배를 타고 남쪽에서 왔고, 중국은 맥없이 무너졌다. 심지어 1894년 청일전쟁에서 북양해군은 일본 해군에 5시간 만에 전멸되는 충격적인 패배를 맛봐야 했다.

지난 역사를 거울삼아 최근 중국은 항공모함 랴오닝(遼寧)함을 비롯해 이지스함 8척, 핵 잠수함 5척을 비롯한 56척의 잠수함, 468대의 해상 항공기를 보유해 일본은 물론 미국까지 긴장시키고 있다. 독일과 일본에게 점령당했던 칭다오는 현재 닝보(寧波), 잔장(湛江)과 함께 중국의 3대 해군기지다. 과거의 아픔을 딛고 점점 막강해지는 중국의 해군력이 댜오위다오(釣魚島, 일본명 센카쿠열도) 문제 등에 어떤 대응을 보여줄지 지켜볼 일이다.

해군박물관 바로 옆으로 샤오칭다오 섬으로 들어가는 방파제가 있다. 입장권을 사서 1942년 쌓았다는 방파제를 따라 걷는데 마치 여수 오동도에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안개가 몰려와 바로 앞의 섬을 사라지게 하는 마술을 선보인다. 명대부터 이 섬을 '작고 푸른 섬(小靑島)'으로 불러왔다고 한다.

그러니까 현재 사용되는 칭다오라는 도시 이름이 이 섬에서 유래한 셈이다. 독일이 조계지 협정을 맺고 총독부를 설립하며 사용한 명칭은 모두 '자오아오(胶澳)'였으나, 새롭게 건설한 식민지의 이름을 칭다오로 부르기 시작하면서 그 이름이 도시명으로 굳어진 것이다.

1900년 독일이 설치한 하얀 등대가 샤오칭다오 섬 중앙에 있다.
▲ 샤오칭다오 1900년 독일이 설치한 하얀 등대가 샤오칭다오 섬 중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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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고처럼 생긴 섬에 등대 불빛이 바람에 흩어진다는 ‘금서표등(琴嶼飄燈)’의 의미와 오버랩된다.
▲ 샤오칭다오의 조각상 거문고처럼 생긴 섬에 등대 불빛이 바람에 흩어진다는 ‘금서표등(琴嶼飄燈)’의 의미와 오버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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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오칭다오는 원래는 육지였으나 해안 침식작용으로 섬으로 떨어져 나갔는데, 그 모양이 마치 거문고처럼 생겨서 금도(琴島)라고 불렸다고 한다. 1900년 독일이 설치한 하얀 등대가 섬 중앙에 있는데, 그 바로 앞에 거문고처럼 생긴 섬에 등대 불빛이 바람에 흩어진다는 '금서표등(琴嶼飄燈)'이란 글귀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이는 칭다오 10경 중의 하나로 꼽힌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등대와 고목이 우거진 낮은 언덕길을 돌아 나오면 여행의 고단함이 한순간에 모두 사라지는 듯하다. 광장에 바다를 향해 한 여인이 악기를 연주하는 조각상이 있다. 한 선녀가 어부를 너무 사랑해 하늘에서 내려와 어부와 결혼을 하고 바다에 나간 남편을 위해 거문고를 연주했다는 전설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푸른 바다와 붉은 지붕의 건물이 만나고, 서양의 근대와 중국의 전설과 현대가 어우러진 칭다오의 즐거운 산책은 작고 푸른 섬에 붉게 번져오는 노을에 잠시 닻을 내린다.


태그:#칭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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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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