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3월 16일 월요일, 이불 속에서 꾸물거리고 있는데 아내가 다급히 말한다.

"병원에 가봐야 돼. 어머님이 위독하대."

의정부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2층에 올라가니 형수가 보인다.

"중환자실에 있어요. 들어가보세요. 자꾸 맥박과 혈압이 떨어져요."

중환자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맞은편에 간호사 두 명이 보이고 왼쪽으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누워 있다. 산소 호흡기를 끼거나 고통스럽게 누워 있는 모습이 보인다. 어머니는 어디 있지?

"누굴 찾아오셨어요?"
"이순임씨요."

아, 첫째 침대다. 뼈만 남은 어머니 얼굴. 눈을 감고 있다. 코에 줄을 끼고 있고 가슴과 팔에 온통 줄이 매달려 있다. 손을 잡아봤다. 차갑다. 왼쪽엔 무슨 계기판들이 있고 전자파 같은 게 움직이고 오른쪽 계기판엔 알 수 없는 숫자들이 보인다.

"의식이 없어요."

간호사가 말했다.

"어머니, 저 왔어요. 건모예요. 제 말 들려요?"

옆 계기판에 보이는 숫자가 갑자기 올라간다. 듣고 계시는 거다. 사람은 죽을 때 감각기관 중에서 귀가 가장 늦게까지 열려 있다고 한다.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니 간호사가 "나가 계셔야 돼요" 한다. 임종 때가 됐는데 같이 있지도 못하나?

병실 밖으로 나가보니 형이 있다. 복도 끝에 마련돼 있는 의자에 앉아 장례 절차를 이야기했다. 그 사이 큰형님과 큰형수님이 왔다. 막내 여동생과 여주에 사는 큰여동생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우리는 5남매다.

어머니는 2년 전에 치매에 걸려 서울 중계동에 사는 작은형이 모시다가 도저히 돌볼 사람이 없어 양주에 있는 요양원으로 보냈다. 가슴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한 달 전부터 음식을 거부했다. 의정부 ○병원으로 모셨다. 이제 돌아가실 때가 됐나 보다 했는데 병원에서는 강제로 코에 호스를 끼우고 음식을 주입했다.

그 상태로 다시 요양원으로 오셨다. 어머니는 자꾸 호스를 빼려고 했다. 요양원에서는 그런 어머니 양 손을 휠체어에 묶어놓았다. 꼭 이래야 되나? 음식을 거부하는 건 자신이 이젠 돌아가실 때가 됐다는 걸 의미하지 않나? 형한테 말해봤다.

"형, 꼭 저렇게 강제로 음식을 주입해야 돼? 그냥 자연스럽게 돌아가시게 하면 안 되나?"

성질은 급하지만 효성이 지극한 형은 화를 냈다.

"야, 그럼 어떻게 하니? 그냥 돌아가시게 해야 되니?"
"돌아가실 때 되면 돌아가시게 해야 어머니가 편하지 않을까? 저렇게 코에다 줄을 껴서까지 음식을 주입해야 되나? 고통스럽지 않을까? 이젠 사람도 아주 못 알아보고 말씀도 못하시는데 저렇게 강제로 생명 연장을 시켜야 옳은 일일까?"

하지만 형은 완강했다. 결국 그렇게 또 한 달을 요양원에서 보냈다. 그러다가 이번에 의식이 없다고 연락이 와서 의정부 ○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병원에서는 폐렴이라고 했다. 혈압과 맥박이 자꾸 떨어져서 오늘 임종할 것 같다고 했다.

"꼭 저렇게 해야 돼? 자연스럽게 돌아가시게 하면 안 되나?"

2014년 2월 7일, 양주 대진요양원에서
▲ 어머니 제 말 안 들리세요? 2014년 2월 7일, 양주 대진요양원에서
ⓒ 안건모

관련사진보기


장례식장을 예약하려고 작은형 집과 가까운 서울 상계동 ○병원으로 전화를 했다.

"아, 돌아가실 때가 됐는데 빈소가 있나요?"

장례식장은 예약이 되지 않는단다. 그렇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어떻게 예약을 하나.

오후 두 시경 민방공 사이렌이 울린다. 박정희 시대로 돌아간 듯하다. 그 사이 두 번 병실에 들어갔는데 자꾸 숫자가 떨어지고 있다. 간호사가 또 나가라고 한다. 아니 임종도 못 지키게 하나? 한 번 째려보고 나갔다. 밖에 나가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형수가 울면서 말한다.

"임종하셨어요."
"애애애앵!"

사이렌 소리가 길게 들린다. 무슨 소리야? 우리 어머니 돌아가셨다고 나라에서도 경보를 울려주나? 아, 민방공 해제 사이렌이구나.

병실에 들어갔더니 의사가 어머니 몸에 매달린 줄들을 떼고 있다. 간호사가 또 나가라고 한다. 이런 젠장, 이것들이 무조건 나가래. 아니 어머니 마지막 모습도 못 보냐? 못 들은 척 어머니를 바라봤다. 입을 벌린 모습이 벌써 해골이다.

"나가세요. 정리하면 부를게요."

조금 있으니 막내 여동생이 도착했다. 나하고 여섯 살 차이 나는 여동생이다. 우리를 보더니 왈칵 울음을 쏟는다.

"어떻게 해? 살아 계실 때 보려고 했는데 벌써 돌아가셨어. 엄마! 조금만 기다리지. ○○이가 왔는데…."

그런 ○○이를 보고 있으니 그제서야 눈물이 난다. ○○이는 어릴 때 아버지 의처증 때문에 맘 고생을 많이 했다. 아버지는 막내딸이 자기 딸이 아니라고 하면서 어머니를 무지막지하게 때리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가 1989년에 돌아가셨다. 그때도 막내여동생이 가장 많이 울었다.

○병원에서 장의차가 왔다. 병실에서 어머니를 다시 봤다. 벌려 있던 어머니 입이 닫혀 있었다. 아마 강제로 닫았나 보다. 시신을 모시는 병원 측 사람이 어머니를 천으로 감싼다. 얼굴도 감싸고 그 위에 흰 면으로 덮는다.

시신을 모시는 장례차에 어머니를 싣고 장례식장으로 왔다. 상조회사에서 나온 남자, 여자 두 사람이 형들 두 사람만 들어오게 한 뒤 어머니 머리를 잡게 하고, 소독된 거즈로 어머니 몸을 닦는다. 나머지 사람들은 유리창으로 본다. 얼굴, 덮여 있는 천에 손을 집어넣어 닦으니 어머니 몸은 보이지 않는다. 천 밖으로 나온 팔이 젓가락같이 가늘다. 입관하기 전에 막내여동생이 울음을 터뜨린다.

"가만 있어 봐요. 어머니 돌아가시는 것도 못 봤어."

어머니 얼굴을 감싸고 흐느낀다. 그 모습을 보니 눈물이 나온다. 모두들 울면서 코를 훌쩍거린다.

화장할 분한테 최고급 천이 무슨 소용

다시 빈소로 왔다. 병원 관계자가 사무실로 우리를 부른다. 빈소 비용, 손님들한테 주는 음식 값. 냉장고에 음료수와 소주를 갖다 놓고 손님들이 먹는 대로 돈만 내면 된다는 둥 여러 가지를 보여준다. 그 다음 작은형수가 가입돼 있었던 ○○상조 사람이 나와 팸플릿에 나온 그림을 보여주면서 설명을 한다.

"최고급 천으로 된 수의, 최고급 오동나무로 된 관, '어쩌고저쩌고' 이렇게 250만 원입니다."

금방 화장할 분한테 무슨 최고급 천과 최고급 오동나무가 소용이 있나.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상조 직원은 계속 설명을 한다.

"육개장으로 하고, 떡은 절편, 과일은 방울토마토…."

상조회사에서 상복도 주는데 역시 공짜는 아니고 모두 비용을 내야 한다.

첫날엔 문상객이 안 올 줄 알았더니 다섯 시도 안 돼 사람들이 오기 시작한다. 밤에 약속이 있어서 못 오는 사람들이 일찍 들르는 거다. 역사와산 모임 김○○씨도 일찍 왔다. 아마 유○○씨가 페이스북에 올렸거나 내가 아는 단체 몇 명한테 전화를 했나 보다. 형은 빈소에 앉아서 핸드폰으로 아는 이들에게 전화를 끊임없이 한다.

"아, 별일은 아니고 어머니가 돌아가셨네. 시간 있으면 들러."

똑같은 소리를 한 시간 넘게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별일은 아니'라고 운을 떼면서 오라고 하니까 좀 어색하다. 나는 핸드폰이 없어서 전화할 데가 없다. 그래도 나 때문에 오는 손님이 많다. 빈소에서 문상하는 걸 보고 맞절하고 또 나가서 대화를 나누고, 따라주는 술 한잔하고 정신이 없다. 열두 시 넘어 술이 취했다. 손님들도 이젠 끊어지고 가족들끼리 모여 또 술 한잔했다. 새벽 세 시까지 먹었나? 기억이 없다.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열 시 넘어 일어났다. 오후가 되면서 끊임없이 손님들이 왔다. 나 때문에 오는 손님들은 참 특이했다. 각설이 타령을 하는 기만서처럼 문어대가리 같은 대머리, 무슨 도사처럼 개량한복을 입었거나 고인돌출판사 사장처럼 허연 머리를 늘어뜨린 사람, 집회에서 금방 나온 듯한 등산복 점퍼에 등산화를 신은 사람들, 자유분방하게 차려 입은 노동당원들, 평생 해고자 신분으로 살아가는 노숙자 차림의 해고자들, 아들 뻘 되는 조기축구회 회원들….

나중엔 빈소에 누가 와서 기웃거리면 우리 형님들이 그이들 차림새만 보고도 "안건모씨 찾아오셨어요?" 하고 묻거나 나한테 "건모야, 니 손님 왔다" 할 정도였다. 전국해고자투쟁위원회(전해투) 동지들이 봉투에 '해고자 ○○○'라고 쓴 글을 보고는 식구들이 "해고자가 뭐야?" 하고 묻기도 했다.

"회사에서 해고당해서 복직 투쟁하는 사람들이지."

연락을 안 해도 찾아와 주는 손님들이 참 고마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나 어머니 환갑잔치 때처럼 집안에 애경사가 있을 때 내 손님은 없었다(어머니 환갑잔치 때는 잔치를 하다 말고 집회에 참석하려고 빠져 나올 정도로 집안일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가족들한테 미안했는데 이번에 조금 면목이 서는 것 같다(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산소호흡기 절대 대지 마라... 내 삶을 연장시키지 마라"

2015년 3월 18일 어머니 발인날. 납골당.
▲ 재로 변한 어머니 2015년 3월 18일 어머니 발인날. 납골당.
ⓒ 안건모

관련사진보기

다음 날 벽제 화장터로 갔다. 순식간에 어머니가 재로 변했다. 최고급 오동나무, 최고급 수의도 재로 변했다. 식구들이 또 다시 울음을 터뜨린다. 막내 여동생이 가장 슬프게 오열한다. 재로 변한 어머니 뼈가 항아리에 담겨 나왔다. 막내가 그 항아리를 감싸 안고 또 운다.

양주 ○○○납골당으로 갔다. 꼬불꼬불한 산 고개를 몇 개 넘었다. 차에서 내려 영정을 든 사람이 맨 앞, 항아리를 든 사람이 그 뒤를 따르고 나머지 식구들이 그 뒤를 따랐다. 문을 열자 납골당으로 가는 로비에 빨간 카펫이 깔려 있다.

여자 둘이 책상 뒤에 서 있다가 구십 도로 고개를 숙인다. 우리가 지나갈 때까지 한참을 그러고 있다. 납골당 앞에서 마지막으로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리라고 한다. 내가 전에 어머니한테 써뒀던 편지를 꺼내 식구들한테 읽어줬다.

"…그 당시 양철동네에서 이사한 뒤, 산을 지키는 산지기 집에서 잠깐 산 기억이 나는데 어쩌다가 홍은동 산 중턱으로 이사갔을까요? 저는 그때 드문드문 생생하게 기억나는 게 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루핑으로 만든 천막집이었죠. 바닥은 가마니를 깔았고, 안쪽에 그릇 몇 개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런 집마저도 성할 날이 없었죠.

어느 하루는 상이군인들이 와서 무허가 건물이라고 그 천막 지붕을 번쩍 들어서 부숴버렸어요. 그때 엄마는 목놓아 울었지요. 저는 아마 초등학교 5학년 정도였던 거 같아요. 어머니와 함께 무서워서 마냥 울었죠. 아버지는 그때 칼 가는 일과 우산 고치는 일을 하러 나가서 집에 없었어요. 난폭한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어땠을까요? 아마 살인났을 거예요.

그런 천막집에서 살다가 아버지가 그 자리에 벽돌로 집을 지었지요. 우린 그때 참 가난했어요. 꽁보리밥에 고추장을 지겹게 비벼먹었어요. 반찬은 늘 김치나 콩나물뿐이었죠. 저는 그때 왜 우리는 콩나물만 먹냐고, 안 먹겠다고 반찬 투정을 했어요. 어머니는 그런 저를 달래서 먹이느라 고생했지요. 그래도 어머니는 저희들을 보고 살았던 거 같아요. 어느 하루는 어머니가 이불을 꿰매고 있는데 그 위에서 노는 저를 보고 "바늘 찔린다. 내려가" 하면서 따뜻한 웃음을 지어 보이셨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왜 그렇게 어머니를 때리셨을까요? 아버지는 가끔 상을 뒤엎고 어머니 머리채를 잡아끌면서 때릴 때도 있었어요. 밥에서 돌 나왔다고, 밥이 질다고, 어머니가 바람피운다고 때렸어요. 순박한 어머니가 바람을 피울 리가 없었지요. 그런 폭력만 없었으면 참 좋은 아버지였을 텐데요.…"

식구들이 모두 흐느낀다. 나도 편지를 읽으면서 목이 멘다. 다 읽고 나니 큰형수님이 나를 안아준다.

"참 많은 걸 다 기억하고 있네요."

납골당에 어머니 모실 자리를 찾았다. 관계자가 설명을 한다.

"이 눈높이 자리가 가장 비싸요. 500만 원입니다. 그 하나 밑에 여긴 400만 원, 가장 위에나 밑엔 좀 쌉니다."

젠장, 죽어서도 있는 사람, 없는 사람 구분하는구나. 자본주의 세상이 무섭다.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든 생각. 어떻게 살아가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유서를 써놔야겠다.

"내가 혹시 치매에 걸려 돌볼 수가 없다면 어쩔 수 없이 요양원을 보내되 음식을 거부하면 강제로 콧줄을 삽입해 급식하지 말고 그대로 놔둬라. 그렇게 하는 건 의미 없는 삶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다. 또한 음식을 강제로 주입하면 고통스러울 것이다.(어머니도 분명 고통 때문에 그 콧줄을 빼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요양사나 간호사들이 손을 묶었다. 어머니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의사 표현을 못하는 이에게 가하는 폭력이다.)

그리고 산소 호흡기를 절대 대지 말라. 그런 고통을 주면서 내 삶을 연장시키지 말고 제발 중환자실에 입원시키지 말라. 임종도 못 보게 하는 중환자실에서 죽고 싶지 않다."

아들이 이 유서대로 해 줄까. 제발 그렇게 해주면 좋겠다.


태그:#안건모, #작은책, #어머님, #유서
댓글10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