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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봄입니다. 나뭇가지 끝으로 살짝 꽃봉오리를 부풀렸던 나무들이 간밤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제히 봉오리를 터트렸습니다. 그 참에 어제까지 옷 속에 챙겨 입었던 내복을 오늘 아침에야 슬며시 벗어 놓으며 봄맞이를 시작했습니다. 사실 어제 포근한 날씨에 내복을 벗을까 살짝 고민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남아 있는 찬바람을 무시하면, 찬바람이 화나서 감기 걸리게 한다는 둘째 녀석의 의견에 찬성하며 꾸역꾸역 입고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봄맞이 새로운 이벤트를 시작했습니다. 밤늦게 들어오는 아빠는 제외하고, 가족들이 자기 전에 감사한 일 5가지를 적어보기로 했습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 감사함을 느끼는 것들을 떠올리면 가슴도 뿌듯하고 잠도 잘 올 것이라는 생각에 시작했습니다.

시작한 첫날, 3학년 큰 녀석은 5개를 모두 적었지만 1학년인 둘째는 3개만 적어냈습니다. 그리고 하나는 속상한 일을 적고 싶다며, 굳이 속상한 걸 적지 않아도 된다고 말리는 언니의 의견을 무시하며 그 하나를 기어이 적었습니다. 둘째 날은 너무 피곤해서 건너뛰고, 셋째 날이었던 어제는 3개를 겨우 적었습니다.

애초 목표 수에는 크게 못 미칩니다. 이 빠지듯 건너뛴 날도 있습니다. 하지만 잠시 시간을 갖고 감사한 일을 적은 후 서로에게 읽어주는 시간, 책 한 권 읽는 것만큼이나 큰 감동을 느꼈습니다.

네가 안아 준 게 제일 감사한 일이었어

발 부딪혔을 때 꼭 안아줘서 감사해
▲ 감사한 일 5가지 발 부딪혔을 때 꼭 안아줘서 감사해
ⓒ 김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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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에게 부러움과 존경, 무한 사랑을 쏟는 둘째와는 달리, 언니는 그 사랑을 느끼면서도 쌩하니 동생을 늘 애타게 합니다. 그런 큰 녀석의 감사하는 일 '넘버원'은 바로, 좀 전에 의자에 부딪혀 아파할 때 동생이 안아준 게 감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오~ 정말?

사실 그 순간을 본 저와 사건의 당사자였던 둘째는 정말 뜻밖의 목록에 감동 아닌 감동을 느꼈습니다. 저녁을 먹고 숙제를 하던 때, 언니의 의자 옆을 지나던 동생이 모르고 몸으로 밀치는 바람에 의자가 밀렸습니다. 그 바람에 책상 쪽 모서리에 언니의 발이 부딪히게 되었죠.

너무 아파 울며 '쟤 때문에...'라고 중얼거리던 큰 녀석의 모습을 보고, 의도는 그렇지 않지만 어쨌든 언니가 아프니까 안아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미안함과 쑥스러운 마음에 쭈뼛거리다가, 울고 있는 언니에게 다가가 꽉 안아주었습니다. 그저 그뿐이었는데, 언니의 고백에 둘째의 '언니 사랑 지수'는 또 한 번 상승했습니다.

감동의 대상은 정말 사소합니다. 

엄마가 오일을 발라줘서 고맙답니다. 주말에 너무 신나게 놀아서 아침에 일어나기 어려웠던 월요일 아침, 엄마가 속마음을 숨기고 화를 참아가며 조금 친절하게 깨워준 것이 고맙답니다. 주말에 아빠가 닭 두 마리를 사다가 푹 삶아서 만들어준 백숙이 맛있다며, 다음날 아침과 저녁에도 찾더니 그게 정말 고마웠다고 말합니다. (사실, 성격 탓인지 손맛인지 똑같은 닭을 사다 끓여도 맛은 늘 아빠가 끓인 백숙이 맛있습니다.)

그리고 큰 녀석은 요즘, 새 학기 새로운 담임선생님의 매력에 폭 빠져 선생님이 해주시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좋아합니다. 2학년 내내 선생님 이야기며 학교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던 아이가, 요즘은 집에만 오면 선생님 얘기, 모둠 얘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듭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엄마의 마음도 편해집니다.

불과 1년 전, 2학년 개학과 동시에 이사와 전학을 하게 된 아이는 1학기가 지나도록 낯선 환경에 적응을 하지 못했습니다. 집 밖과 교실 밖을 거의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저 신학기에 느끼는 긴장감이 아니었습니다. 오랜 주말 부부 생활, 아이가 9살이 되는 동안 7번이나 이사를 했으니 아이가 느끼는 두려움이 반쯤은 이해가 갑니다.

그런 큰 녀석 덕분에 육아휴직을 했습니다. 벌써 10개월 차입니다. 회사에서 한참 일할 시기에 집으로 돌아온 엄마, 가끔 후회도 하고 고민도 합니다. 하지만 그 시간 덕분에 조금씩 변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또 다른 희망을 품게 해 줍니다. 

얼마 전에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학교가 끝날 시간이면 늘 엄마가 나와 기다려줬으면 좋겠다던 큰 녀석. 엄마가 휴직해서 함께 생활한 시간이 9개월이나 흘렀는데도 "엄마, 나와요!"를 외칩니다. 그러다 며칠 전 집으로 돌아오는 그 녀석, 천천히 걸어오던 아이가 길 가운데 멈춰서 있었습니다. 가만히 지켜봤습니다.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 눈을 감고 천천히 이리저리로 몸을 흔드는 아이. 쟤가 뭐하나 싶었습니다. 그 녀석 한동안 그러다 눈을 뜨고 몇 번 깜빡이다가 비로소 절 알아봅니다. 그리고 웃으며 말합니다.

"엄마, 손가락 사이에서 바람이 느껴져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뭉클함에 가슴이 '쿵' 했습니다. 뭐였을까? 글쎄 뭐라고 표현은 할 수 없지만,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저 스스로 자연의 변화를 느껴보려는 아이, 이젠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은 것이 주는 행복, 아이도 저도 많이 느끼고 나누는 봄입니다.


태그:#육아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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