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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일 오전 제주국제공항에서 김동수씨가 안산트라우마센터로 가기 전 기자들과 인터뷰하며 "학생들을 보면 사고 당시 학생들이 떠오르고 창문을 보면 창문 안에 갖힌 아이들이 생각난다"며 괴로움을 말하고 있다.
 3월 20일 오전 제주국제공항에서 김동수씨가 안산트라우마센터로 가기 전 기자들과 인터뷰하며 "학생들을 보면 사고 당시 학생들이 떠오르고 창문을 보면 창문 안에 갖힌 아이들이 생각난다"며 괴로움을 말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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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낯익은 얼굴을 인터넷 화면으로 보게 되었다. 그는 본인의 집에서 손목을 긋는 자해를 하고 쓰러져 있었다고 했다. 다행히 딸이 발견해서 병원으로 옮겨진 그가 목숨을 구했다는 기사와 함께 그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세월호 침몰사고가 일어난 지난해 4월 16일 오전, 거의 대부분의 구조 인력들이 손놓고 있던 그 시간에 기울어져가는 배 안에서 소방호스로 20여 명의 아이들을 구조한 사람, 그래서 언론이 '세월호 의인', '파란 바지의 영웅'이라 부른 사람.(관련기사 : "너무들 쉽게 잊으라고만 한다" 내가 만난 '세월호 파란바지 아저씨')

그는 내가 어릴 적 살던 제주도의 한 마을에서 함께 교회를 다니던 동네 오빠였다. 키가 크고 마르고 날쌔던 오빠.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보지 못했고, 아주 가끔 소식을 전해 듣는 정도였다. TV를 별로 볼 일이 없는 환경에서 살다 보니 세월호 관련한 오빠의 소식도 몇 달이 지난해 8월 즈음, 친구가 전해주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알게 되었다.

친구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이후에 인터넷 검색 등을 통해 소식을 조금 더 알게 되었고, 그 이후 가끔씩 인터넷 기사를 통해 오빠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은 아직 할부도 다 갚지 못한 화물차, 참사 이후의 정신적 충격, 이들에 대한 사회적인 구제책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 등을 알게 되면서 '무엇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의 부담을 늘 안고 있던 차에 또 오빠의 기사를 보게 된 것이다.

참사 이후로 손 떨림 증상이 생겨서 운전도 못한다는 이야기, 기분이 그다지 안 좋은 상황도 아니었는데 칼을 보고는 쓸모없는 손을 잘라 버리자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어 자해를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손목에 붕대를 감은 채로 안산 치유센터에 가기 위해 공항에 나와 있는 사진과 함께 인터뷰 내용이 실려 있었다.

죄책감·생활고·트라우마... '세월호 의인'의 서글픈 새 봄

지난 3월 12일은 산내마을 릴레이 단식 200일 되는 날이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습니다'는 포스터가 붙어있는 실상사작은학교에서 찍은 사진.
▲ 릴레이 단식 200일째 지난 3월 12일은 산내마을 릴레이 단식 200일 되는 날이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습니다'는 포스터가 붙어있는 실상사작은학교에서 찍은 사진.
ⓒ 이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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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보상 받고 해결됐는데, 왜 아직도 못 잊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단다. 학생들을 보면 당시 세월호 안에 있던 아이들이 생각나고 창문만 봐도 세월호 창문에 매달려 있는 아이들이 생각나는데, 어찌 그 일을 쉽게 잊을 수 있겠냐고 오빠는 반문한다. 또한 참사 이후 1년이 다 되어가는데, 무엇이 더 안전해졌느냐고 반문한다.

지금 고등학생인 그의 딸은 다니던 학원을 그만두고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나섰다고 한다. 그동안 1100만 원 정도 제주도의 지원을 받았으나 턱없이 부족한 부분은 대출로 연명하고 있고, 병원을 오가면서 살아내고 있다고 한다.

"우리들이 본 사람 중 가장 책임감이 강한 분이다. 사람들을 많이 구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정신적 고통을 받고 계신 것 같다.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라며 광주지법 재판장이 경의를 표한 그는, '이제 더 이상 이 사회에 부담주지 말고, 경제를 힘들게 하지 말고, 잊으라. 잊지 못하더라도 물의를 일으키지는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사회의 압력에 밀려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손목에 그은 칼자국은 이런 사회의 강압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한 '의인', '영웅'으로 치켜세워진 한 인간에 대한 이 사회의 무례함은 생존자들, 사망자들, 실종자들, 그 가족들 그리고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국민들에게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들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행하든 원하는 대로 해줄 수 없으며, 당신들의 요구는 오히려 사회를 불안하게 할 것이고, 그로 인한 불이익은 고스란히 당신들 몫이라는 위협에 우리 국민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제 끝났으니 잊으라'고 목소리를 보태고 있기도 하다.

물론 당사자들이 겪는 고통을 옆에서 지켜보는 게 안타까워서 이제 그만 잊고 산 사람은 살아가자고 위로하는 목소리 역시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빠의 반문에서처럼 당사자들은 '잊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잊지 못할 경험을 해버린 사람들'인 것이다. 노력한다 해서 잊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면, 이러한 아픔이 재발되지 않도록 철저히 밝히고 세상을 바꾸자고 하는 것이다. 절대로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경험자들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선장과 승무원들의 행동은 살인과도 같다, 법적 윤리적으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모든 진상을 낱낱이 밝히겠다, 적폐를 청산하고 국가를 개조하겠다'던 대통령의 발언에 조금이라도 진심이 담겨 있다면, 이 당사자들의 가르침에 겸허히 몸을 낮추고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200여 일 릴레이 단식 이어온 마을... 다시 '잊지 않기 위하여'

산내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릴레이 단식에 158일부터 근방의 산동면 분들도 참여했다. 산동면에서 단식을 이어가시고 있는 분이 딸과 함께 찍은 사진.
▲ 릴레이 단식 165일째 산내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릴레이 단식에 158일부터 근방의 산동면 분들도 참여했다. 산동면에서 단식을 이어가시고 있는 분이 딸과 함께 찍은 사진.
ⓒ 이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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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르침에 동참하기 위해 우리 마을(전북 남원시 산내면)에서 지난해 8월 25일부터 해온 릴레이 단식도 이제 200일이 넘었다. 그동안 70여 명의 마을 분들이 200일이 넘게 단식에 참여하셨다.(관련기사 : 2015년 4월 16일까지... 우리마을 사람들은 굶습니다) 200여 일이 되다 보니 하루가 '펑크' 나는 경우도 생겨 버려서 완전한 릴레이가 되지 못한 아쉬움도 크지만, '조금 더 긴장해야겠구나' 다짐하며 아쉬운 채로 단식을 이어왔다.

그리고 오는 4월 16일에는 릴레이 단식단, 세월호 합창단, 천일기도단 등 그동안 마을에서 다양하게 마음을 모아온 분들이 함께 모여 1주기 모임을 하려 한다. 또한 올해 4월 16일까지 진행하기로 한 릴레이 단식도 이후 어떤 방식으로 이어갈지 고민 중이다. 돈의 논리가 생명의 고귀함을 너무나도 쉽게 삼켜 버리는 현실을 바라보며, 생명과 평화의 세상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릴레이 백배 절을 1년간 하는 것은 어떨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참사 후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제발 유가족이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실종 학생 어머님의 절규가 자꾸만 떠오른다.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세월호 사고를 정말로 잊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일깨워준 눈물 어린 절규였다.

조만간 오빠에게 전화를 해야겠다. 나 역시 잊지 않고 있다고. 솔직히 세월호 사고를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당신과, 가끔씩은 눈물을 멈출 수 없을 만큼 아프기도 하지만 순간 순간 잊기도 하고, 그래서 잊지 않으려 애쓰는 나와의 거리는 꽤 멀 수 있지만, 아픈 당신들을 종종 떠올리며 기도하겠다고.

목숨 걸고 20여 명의 목숨을 구하고서도 괴로움으로 몸부림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단 한 명도 구하지 못하고서도 당당하게 이 사회를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판치는 지금의 세상을 조금이나마 상식적이고 인간적인 세상으로 변화시켜가는 데 작은 힘 보태겠다고.


태그:#세월호, #릴레이 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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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겨울밭, 붉은 동백의 아우성, 눈쌓인 백록담,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소리와 포말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제주의 겨울을 살고있다. 그리고 조금씩 사랑이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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