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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니마을 위령비 참배후 돌아가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마을은 슬프게도 아름다웠다.
 퐁니마을 위령비 참배후 돌아가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마을은 슬프게도 아름다웠다.
ⓒ 김형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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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꽝응아이시에서 짐을 챙겨 미라이(손미)박물관으로 향했다. 아침이어서 그런지 우리 말고 다른 관광객은 보이지 않았다. 2층 전시실로 바로 올라갔다. 올라가자 마주한 비문에는 504명의 희생자들의 이름과 나이가 기재되어 있었다. 역시나 비문의 마지막으로 갈수록 어린아이들의 이름이 있었다. 아직 이름을 채 가지지 못했을 만큼의 갓난 아기들도 여럿 있었다.
밀라이 박물관 2층, 504명 희생자의 이름이 적혀있다.
 밀라이 박물관 2층, 504명 희생자의 이름이 적혀있다.
ⓒ 김형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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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구정 대공세 기간 동안 꽝응아이에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48대대가 미군을 공격했고 미라이를 비롯한 여러 촌락이 흩어져 있는 꽝응아이의 손미 지역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미군은 이 촌락들에 대해 대대적인 반격을 결정했다. 그 과정에서 이 잔혹한 학살이 발생했다. 그 당시의 사진을 자세히 보는 것이 힘들었다.

아이들도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몇몇 아이들은 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박물관 밖으로 나갔다.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악마가 될 수 있는지... 사진마다 담겨져 있는 슬프고도 억울하고 무서운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504명의 희생당한 사건으로 인식되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잊혀졌을 텐데, 사진 속 사람들이 내 머릿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감당하기 어려워 잠시 자리를 피해있었다.

박물관을 나와 건물 뒤편에 있는 위령비에 참배했다. 당시 생존자의 남편이 만들었다던 위령비는 전쟁으로 가족을 잃었음에도 절대 꺾이지 않겠다는 베트남사람들의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었다. 박물관 옆으로는 폐허로 변해버린 당시의 가옥들이 보존되어 있었다. 시멘트로 만들어진 전시 경로에는 군화 발자국 찍혀 있었다. 그 죽음의 발자국을 밟지 않으려 애썼다. 당시 미군의 기운이 내 몸에 옮겨질까봐 두려웠다.

밀라이박물관의 위령비와 조형물. 당시의 고통과 심정이 담겨있다.
 밀라이박물관의 위령비와 조형물. 당시의 고통과 심정이 담겨있다.
ⓒ 김형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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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자나무에 남아있는 수십 개의 총탄 자국이 그 때의 참혹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내 또래 아이들과 어른들도 같이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중1, 채누리)

미안해요 베트남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우리는 미케 해변으로 향했다. 베트남전쟁 당시 미군의 휴양소가 있었다 한다. 바다는 잔잔했고 평안했다. 50여년 전에도 그랬을 것이다. 바다가 슬퍼보였다. 아이들도 그랬을 것이다. 어떤 아이는 모래위에 마음을 전했다. 비록 파도에는 지워지겠지만 마음속에서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미케해변. '미안해요 베트남'
 미케해변. '미안해요 베트남'
ⓒ 김형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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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나무는 알고 있겠지

베트남의 주요 간선도로인 1번국도 옆에 위치한 퐁니마을에 도착했다. 1968년 2월 12일 한국 해병 2여단 1대대 1중대가 마을 주변을 일렬종대로 지나던 중 저격을 받아 1명이 부상당하자 바로 마을로 침투하여 무차별적으로 학살하였다.

베트콩이 있을 거라는 판단 하에 마을을 폐허로 만들고 주민을 몰살하였지만 그 마을은 미군부대와 자매결연을 맺은 '안전마을'이었고 당시 우리와 우방관계였던 남베트남 군인들의 가족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 

퐁니마을 위령비, 2004년 나와우리가 베트남 청년들과 함께 건립했다.
 퐁니마을 위령비, 2004년 나와우리가 베트남 청년들과 함께 건립했다.
ⓒ 김형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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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2004년 한국의 평화인권단체인 '나와우리'가 1천여만원의 성금을 모아 베트남청년들과 함께 건립한 위령비로 향했다. 마을 주민들은 위령비로 가는 길을 닦았고 길을 따라 나무를 심었다. 그늘을 만들어 위령비로 향하는 걸음을 조금이나마 시원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단다.

마을 주민들이 만든 위령비 앞 비각에는 "'꽝남성 디엔반현 디엔안사 야유나무에서 남조선군대에 의해 74명의 인민이 학살당했다. 1968년 2월12일(음력1월14일)"라고 새겨져 있다. 위령비를 세우기 위해 노력한 한국인들을 배려해서인지 문장에는 감정이 정제되어 있다.

위령비에는 당시 희생자들의 명단이 새겨져있었다. 위령비 옆에는 무화과의 일종인 야유나무가 서 있었다. 우리의 당산나무와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단다. 나무에는 천 조각들이 묶여진 줄들이 감겨 있었다. 나무 주위에 가보고 싶었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우거진 수풀 때문이라 핑계를 삼았지만 사실은 무서웠다. 땅 밑에 서려 있을 원한들이 무서웠다. 아이들은 짧지 않은 시간동안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예를 다해 참배를 했다. 몇몇 아이들은 위령비 옆에서 한 참을 서 있었다. 미안함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퐁니마을 위령비 참배 후 아이들은 돌아가는 발걸음을 쉽게 떼지 못했다. 떠나기전 조용히 기도 하고 있다.
 퐁니마을 위령비 참배 후 아이들은 돌아가는 발걸음을 쉽게 떼지 못했다. 떠나기전 조용히 기도 하고 있다.
ⓒ 김형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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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비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면서 바라본 마을은 정말 아름다웠다. 넓은 밭과 그 밭에서 일하는 마을 사람들 서서히 지고 있던 노을, 고요함까지 다 예뻤다. 위령비에 가서 참배를 하고 나오는데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났다. 마음이 복잡하면서도 아팠다. 죄송한 마음이 너무 커서 마을 분들의 눈을 쳐다 볼 수가 없었다. 베트남아이들이 우릴 보면서 너무 반갑게 인사를 해줘서 더 슬퍼졌다."(중3, 김수지)

탄 아주머니의 한 서린 눈물

당시 생존자인 탄 아주머니 댁에 왔다. 비좁은 공간이었지만 우리는 조용하게 각자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 아주머니의 표정은 매우 굳어 있었다. 미안했다. 아주머니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쉽게 입을 떼지 않으셨다. 아주머니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아주머니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상상하니 고개가 숙여졌다. 한국 사람들이 올 때마다 아주머니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셔야 했다. 너무 미안했다. 당시의 상황을 알아보겠노라는 우리의 욕심이 아주머니를 더욱 힘들게 하는 건 아닌지 죄송스러웠다.

"탄 아주머니를 만났을 때부터 아주머니의 얼굴에는 그날의 참혹함과 한국을 경계하는 듯한 눈빛이 느껴졌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날의 일과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하기 때문에 탄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면서 탄 아주머니는 힘겹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당시 얼마나 참혹했고, 슬프고 안타까웠던 이야기인지 잘 알 수 있었습니다."(중1, 서석진)

아주머니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 당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8살이었던, 어린 탄은 무서웠을 것이다. 자신의 부상보다 가족을 잃는다는 것이 무서웠을 것이다. 땅굴 속에서 끌려나와 가족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봐야 했다. 피가 쏟아져 나오는 배를 부여잡고 그토록 찾아 해멘 어머니는 수십 년이 지나서야 당시 미군이 찍은 사진 속에서야 만날 수 있었다. 이보다 더 큰 고통, 무서움이 있을 수 있을까? 아주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눈물은 무거워 보였다. 50여년 동안 담아온 원한이 담겨져 있을 것이다. 그 눈물 앞에 아이들은 고개를 숙였다. 숙여진 고개 아래로 눈물이 떨어졌다.


태그:#베트남, #평화기행, #의정부, #청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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