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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과 인접해있고, 많은 일자리가 있어, 돈을 벌고 성공하기 위해 쉽게 정착했다가 떠날 수 있는 도시로 인식돼왔다. 기회의 땅이지만, 뿌리를 내리고 살고 싶은 도시는 아니었던 셈이다. 돈 벌고 출세해 더 좋은 환경의 서울로 가거나, 고향으로 다시 갈 수 있는 도시로 인식됐다.

그래서 '주인 없는 도시'란 오명을 받기도 했다. 중앙정치는 인천을 찬밥 대우했다. 이는 지금도 이어진다. 부산 아시안게임과 비교되는 인천 아시안게임 국비 지원, 수도권매립지로 인한 주민 피해에도 불구하고 지원은 인색한 정책, 화학발전소와 엘엔지(LNG: 액화천연가스) 인수기지 등 각종 유해하고 위험한 시설 입지와 확장 정책은 대표적인 예이다. 현 정부는 동남권 신공항 건설 추진을 이야기하고, 부산과 광양만 중심의 투-포트(two-port) 항만정책을 지속해, 인천의 발전은 상대적으로 더디다.

그렇다고 인천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힘은 87년 민주항쟁 이후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 사례가 '굴업도 핵 폐기장 지정' 철회 운동이다. 20년 전 12월 22일은 정부가 굴업도 핵 폐기장을 지정한 날이다.

'굴업도 핵 폐기장 지정'과 이를 철회하기 위한 인천시민들의 운동을 다시 돌아보고자 한다. 당시 분출된 인천시민들의 저력을 상기해보면서 인천이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산적한 문제들의 해법을 찾아본다. - 기자말

인천 5·3항쟁 후 가장 격렬한 시민저항
굴업도 핵폐기장 문제 해결방안 모색을 위한 인천시장 후보자 초청 대담·토론회’가 ‘인천 앞바다 핵폐기장 대책 범시민협의회’ 주최로 1995년 6월 19일 만수1동 성당에서 열렸다.<출처·백서 ’굴어도 핵폐기장 철회를 위한 인천시민운동’>
 굴업도 핵폐기장 문제 해결방안 모색을 위한 인천시장 후보자 초청 대담·토론회’가 ‘인천 앞바다 핵폐기장 대책 범시민협의회’ 주최로 1995년 6월 19일 만수1동 성당에서 열렸다.<출처·백서 ’굴어도 핵폐기장 철회를 위한 인천시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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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5월 20일 동인천역 광장에서 열린 '인천 앞바다 핵 폐기장 철회를 위한 3차 궐기대회'는 격렬한 시민 저항을 표출했고, 이로 인한 피해도 발생했다. 학생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경찰과 충돌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시민이 다치고, 일부 학생은 구속됐다.

여름을 알리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속에서 대회를 마친 집회 대열은 답동 성당까지 평화 행진을 했고, 흥분한 일부 대학생이 차량 통행을 차단하고 연좌농성 등을 했다.

대회에 참가한 인천부천지역대학총학생회연합 소속 학생들은 덕적도 주민만큼이나 굴업도 핵 폐기장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서울과 경기지역 대학생들도 가세했다. 학생들은 경동파출소와 대한서림 등을 오가며 가두시위를 전개했고 시민들에게 핵 폐기장의 부당성을 알렸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페퍼포그를 동원해 최루탄을 발사했고, 시위대열 앞뒤 다수의 사람이 심한 구타 등으로 부상당하고 연행됐다. 경찰은 학생뿐 아니라 일반시민도 연행하려 해, 마찰을 빚었다. 장 파열로 위중한 상태에 빠진 참가자도 있었다.

전투경찰과 백골단으로 불리는 특수경찰은 답동성당 안까지 들어와 사과탄과 돌을 던지기도 했다. 경찰의 무리한 진압에 항의해 오후 10시 30분께 중부경찰서를 방문한 학생 200여명은 군사정권 때나 행했던 폭력 진압으로 구타를 당했다. 구타를 당한 학생들은 경찰 버스 안에서도 구타를 당했다.

심지어 경찰이 버스 안에서 최루탄을 터트리는 바람에 공포심에 질려 실신하는 학생이 한둘이 아니었다. 문민정부를 표방했지만,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이자, 군사정권 때 즐겨 이용한 폭력이 습관처럼 나온 것이다.

이날 3차 궐기대회에서 덕적도 주민과 학생 50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134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또한 9명이 즉결심판에 넘어갔고, 4명이 구속됐다. 이날 시위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된 인천 5·3항쟁 후 인천에서 벌어진 가장 격렬한 시위였다.

1995.6.24. 구청장·시의원 입후보자 선언 장면.<출처·백서 ’굴어도 핵폐기장 철회를 위한 인천시민운동’>
 1995.6.24. 구청장·시의원 입후보자 선언 장면.<출처·백서 ’굴어도 핵폐기장 철회를 위한 인천시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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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폐기장 문제 지방선거 때 쟁점화

분위기는 처음으로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 의원을 선출한 6·27 지방선거로 옮겨갔다. '인천 앞바다 핵 폐기장 대책 범시민협의회(아래 핵대협)'는 지방선거라는 열린 정치 공간에서 핵 폐기장 문제를 최대한 이슈화하기로 했다. 여러 논의를 거쳐 지방선거에서 여야 시장·구청장·광역의원 후보들이 '핵 폐기장 철회' 공약을 내걸게 하는 한편, 각종 유세 때에 이를 분명히 언급하게 유도하기로 한 것이다.

다수 시민이 여전히 굴업도 핵 폐기장 문제의 심각성을 몰랐던 상황에서 지방선거 때 쟁점화된 핵 폐기장 문제는 시민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핵대협은 6월 19일 '굴업도 핵 폐기장 문제의 올바른 해결방안 모색을 위한 인천시장 후보자 초청 대담·토론회'를 개최했다. 하지만 집권당인 민주자유당의 후보 최기선씨는 불참했고, 신용석(민주당)·강우혁(자유민주연합) 후보만 참석했다.

시장 후보들의 입장을 확인한 핵대협은 이후 구청장·광역의원 후보자의 선언을 받기 시작했다. 굴업도 핵 폐기장 전면 재검토와 합리적 대안 마련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작성해 지방선거에 출마한 후보자의 사인을 받기 시작했다. 전체 구청장 후보자 37명 중 23명이 서명에 참여했고, 시의원 후보자 90명 중 51명이 서명했다.

서명한 입후보자들은 6월 24일 '굴업도 핵 폐기장 지정 고시 철회를 요구하는 구청장·시의원 입후보자 일동' 명의로 선언서를 발표하고 그 명단을 공개해 시민들에게 알렸다. 이 선언에 참가한 구청장 후보 5명과 시의원 후보 19명이 당선됐다.

특히 덕적도 주민들도 굴업도 핵 폐기장 지정 찬성 후보로 알려진 김건태씨를 낙선시키고 무소속의 김기배씨를 당선시켰다. 정근모 과학기술처 장관 등 정부 고위층이 '덕적도 주민 3분의 2 이상이 핵 폐기장 유치에 찬성한다'고 선전했지만, 반대를 주장한 무소속 후보가 당선된 것이다.

 1995.7.27. 인천시의회 의원 32명 굴업도 현지조사 방문.<출처·백서 ’굴어도 핵폐기장 철회를 위한 인천시민운동’>
 1995.7.27. 인천시의회 의원 32명 굴업도 현지조사 방문.<출처·백서 ’굴어도 핵폐기장 철회를 위한 인천시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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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운동은 유의미했다. 지방선거 후 인천시의회가 '굴업도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대책 특별위원회'를 구성하는 힘이 됐다.

문민정부 하반기에 실시한 지방선거에서 야당의 바람은 강했다. 6·27 2대 인천시의회는 여소야대(16대 19)로 구성됐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인천지부 출신의 신맹순씨가 의장으로 선출됐다. 신 의장은 시의회의 첫 번째 현장 방문지로 덕적도와 굴업도를 정했다. 시의원 35명 중 32명이 이 시찰에 참여해 굴업도 주민들의 의견을 듣고 핵대협 관계자들과 간담회 등을 진행했다.

2대 시의회는 의원 25명으로 '굴업도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대책 특별위원회'를 구성했고, 이병화 의원을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특위에는 고남석(전 연수구청장), 윤태진(전 남동구청장), 홍미영(현 부평구청장), 김학인, 윤창호, 원미정, 장윤의 의원 등이 참여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사인천(isisa.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굴업도 핵폐기장, #반핵, #지방선거, #덕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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