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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인연과 인연이 스치듯이 만나는 만남은 아득한 시간, 겁(劫)이 닿는 시간이라고 한다. 그 겁은 즉 겁파(劫波).『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는 둘레 15km나 되는 성 안에 겨자씨를 가득 채우고 100년마다 그 겨자씨 한 알씩을 꺼내어도, 겁은 끝나지 않는 시간이라고 한다. 그러니 작은 인연이라도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가…"라는 한 스님의 법문(녹음된)을 듣다가, 막 도착한 신문을 읽는다. 그 신문 속에 "…내년이 박목월 시인의 탄생 100주년…"이라는 타이틀의 기사를 접한다.

 영화, 내 안에 부는 바람
 영화, 내 안에 부는 바람
ⓒ 영화 내 안에 부는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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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박목월 시인의 『문장의 기술; 1976, 현암사』을 수십 번 씩 읽던 습작기 문학 소녀시절을 떠올린다. 생각하면 나는 이 책을 통해 말의 운용과 말의 사용 등에 대해 배웠다. 그리고 말(시어라도 해도 되겠다)을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사용하기가 기성작가가 되어서도 얼마나 힘든지 선험적으로 느꼈다. 책에는 많은 글쓰기의 예들이 등장하지만, 내 머릿속에 강인하게 박힌 것은 선생이 국군 장병에게 내의를 보내는 운동을 전개하는 광고 문안을 작성하신 체험을 예로 들면서, 간단한 문구 하나 만들기도 힘든 창작과정을 거쳐서 나온다는 글이 내 뇌리에 오래 남아 있다.  

내가 아는 한 시인은 시 쓰기가 재미난다고 하는데, 나는 왜 시 쓰기가 갈수록 첩첩 산중 같다. 그리고 뒤늦게야 시 쓰기가 "피를 말리는 작업"이란 말에 수긍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글이 안 될수록 사전을 들여다보는 시간도 늘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사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내가 가진 말과 내가 아는 말이 정말 작다는 것에 또 한 번 경악을 하는 것이다. 언어를 누구보다 잘 다루어야 할 시인이란 이름이 부끄럽기까지 하다.

그러니까 모 잡지에서 '봄'에 관한 시를 청탁받았다. 난감했다. 봄을 소재한 시가 거의 없었다. 몇날 며칠 봄…봄…봄…봄…그렇게 중얼거리며 비 맞은 중처럼 거리를 쏘다녔지만 어디에서도 내가 써야 할 '봄'과는 조우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내가 떠올린 봄의 상징은, 고작 진달래, 개나리, 봄비, 실버들, 봄처녀, 달래, 냉이……이런 단어들만 머릿속을 벌떼처럼 윙윙거렸다. 마감일자는 다가오는데 시는 써지지 않고, 밥맛조차 없다. 청탁을 거부해 버리면 그만인데 그런 수는 없는 것이 또 시가 아닌가. 궁여지책 나는 사전을 뒤적이면서 영감을 얻어냈다.

"봄의 뜻을 찾기 위해 사전을 뒤적인다. '보'와 '봄' 사이에 얼마나 많은 낱말이 숨어살던지. 그 계단 사이에 내가 모르는 말이 이처럼 많이 살아 있다니, 말의 뜻도 모르고 써 버리는 말, 몰라서 쓰지 않던 말, 봄 하늘로 흰나비 떼처럼 날아오르는 갈기 선 말.// 오선지 위를 옮겨 다니며 양말로 걸어 두었던 희망의 음표…기쁨의 반박자들…온전한 기다림을 위한 쉼표를 그려 넣으려다가 정신없이 뛰어다니다가 고무신을 잃고.// 행 구분 없는 시처럼 휴지(休止)를 모르는 삶을 끄적이다가, 눈이 지껄이는 소리를 듣다가, 물로 연명하는 콩나물 같은, 통통 살이 오른 단어를 사전에서 뽑다가, 저 비자나무 비명으로 튕겨 나가는 받침들.// '겨울'과 봄 사이 나도 모르는 터널이 뚫려 있었다니. 이렇게 좁은 행산 사이에 시간의 기적이 울렸다니. 비눗물 뚝뚝 떨어지는 낱말을 찾다가, 문득 조각조각 하늘의 손수건을 물고 나르는 비비새를 본다.//목탄으로 그린 세발자전거가 소리 없이 굴러 내 안으로 달려오는 아니 지워지고 마는 저 봄 글자 속의 낯선 하루.
송유미, <비눗물 떨어지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다가> 전문

위 인용시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보'와 '봄'사이에 있는 40여쪽—이희승 편, 『국어대사전(민중서관,1961)』을 참고해 볼 것—에 실린 단어들의 분량에 대한 놀라움이다. '보'와 '봄' 사이에 있는 40여 쪽에 수록된 단어들의 분량은 대략 2,400여 개에 이른다. 이와 같이 엄청난 양의 어휘로 인해서 이 시의 시적 자아의 의식 세계는 짓눌리게 된다. 주체인 시적 자아가 객체인 단어를 선정하는 것이 아니라 객체인 단어에 의해서 짓눌려 버리는 주체로서의 시적 자아는 '통통 살이 오른 단어를 사전에서 뽑다가, 저 비자나무 비명으로 튕겨나가는 받침들'같이 되어 버린다.
<해체시대의 시 쓰기와 시 읽기> 부분, 윤호병 문학평론가

누군가 말은 마음의 소리라고 했다. 또 누구는 말은 마음의 씨앗이라고도 한다. 그렇다. 우리말에 말 한마디로 다섯 자의 몸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한다는 말도 있다. 실제 말 한마디로 마음이 구겨지기도, 찢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좋은 말은 듣기도 좋고, 마음도 즐겁다. 그런데 우리가 쓰고 있는 말을 살펴보면, 늘 똑같은 말의 반복이다.

타성에 젖어 쓰고 있는 말들은 말의 신뢰감을 주지 않는다. 너무 흔하게 쓰는 '사랑'이란 말에 쉽게 감격할 수 없는 것처럼.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보면 시 또한 다르지 않다. 내가 쓴 시를 뜯어보면 제목과 내용은 다르지만, 색다른 언어가 별로 없는 것이다. 그래서 또 다시 쓰게 되는 시.

처칠수상은 말을 보석을 고루 듯이, 화려한 문장처럼 구사하여, 그가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 적으면, 어떤 글보다 정확하고, 설득력이 있는 글이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가끔은 멋있고 진실 된 말로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면, 그래서 혹, 천 냥의 빚이라도 갚게 된다면, 그야말로 말만으로도 행운을 잡을 수 있는 기회도 있으리라.
사실 시 쓰기는 말(言語)와의 싸움이다. 언젠가 읽은 서산대사의 글에는 '말의 땀'이란 표현이 있었다. 아, 나는 이거다 싶었다. 시는 말과의 싸움에서 흘린 말의 땀방울이다.

수많은 문법을 거쳐야 심장에 박힌 화살의 말이 되지. 사전 속으로 사라진, 옹관 속에 묻힌 말을 파헤치며 온 세월이야. 받침 잃은 간판 같아.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 가시를 빼낼 말을 찾고 있어. 제대로 입맞춤도 하지 못하고 번번이 입만 갖다 대던 빗나간 동사들, 헛발 치던 비유들, 은유들. 단 한 번에 목숨 줄을 힘껏 당겨 말의 땀방울 속으로 스며드는 길이야. 벼루에 먹을 갈 듯 곱게 갈아 온 말이 너의 얼굴에 까맣게 프린트 되고 있어.//나는 지금 그대 사는 테크노피아에 팩스로 날아가는 중.
송유미, <땀방울이 흐르는 말(言語)의 연애편지-故 정영태 시인께> 전문

매번 시안에서 시를 고민하다보면, 시는 더욱 안개에 가린다. 정말 한 번 써 보지도 못한 말들.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낱말들. 정말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살지만, 내가 정말 알고 쓰는 단어는 얼마 될까.

모래알처럼 많은 단어들, 말들…….그런데도 다 알고 있는 듯, 이런 착각에 싸여 시를 써 온 나는 얼마나 불성실한 시인인가. 내가 아는 것의 초라함이여, 내 가난한 언어로 빚은 시들이여, 나는 내 시를 용서해도, 시는 이런 나의 비쩍 마른 명태 같은 시들을 용서하지 못할 것 같다. 이런 자각이 들 때마다 나는 초발심으로 돌아가서, 박목월 시인의 『문장의 기술』을 읽고 또 읽는다. 그리고 염소처럼 문장들을 씹고 씹는다.

인연의 얘기를 마저 하자. 나는 어릴 적 이웃사촌 언니(문학소녀)의 손에 잡혀서, 박목월 선생이 살아계실 때 먼발치(문학 강연회, 68년인가)에서 뵌 적이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어릴 적 나는 박목월 시인의 시를 너무 좋아해서, 새 학기가 되면 새 공책의 앞장에다 박목월 시인의 시들을 옮겨 적어 놓고 늘 암기하곤 하였다.

그리고 지금 박목월 선생의 글과 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이런 작은 인연이 오늘은 새삼스럽게도 너무 소중하고 설명하기 벅차게 느낌이다. 오래도록 많은 대중에게 박목월 시인의 시가 사랑받는 이유는 생각해 본다. 선생의 시는 첫째 그 누구에게도 어렵지 않기 때문이며, 둘째 설명이 아닌 그림처럼 선명하게 자연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지 싶다. 해서 나는 내 시가 장황해 질 때 틈틈히 박목월 시인의 시집을 꺼내 보며, 내 시를 성찰하고 한다.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가는 열두 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 <청노루> 박목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심상> 12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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