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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송전탑 보믄 속이 디비지요. 저거 마 어데 큰 비가 오가 화딱 나자빠졌으면 싶지. 막막 폭우가 와가 다 나자빠졌으면 싶은 마음이 들지. 도시 사람이 필요하다고 촌사람을 이렇게 직이가 되는가."-<삼평리에 평화를>(한티재 펴냄) 122쪽-

청도 삼평리 송전탑 반대 시위를 하는 주민 이차연(부산댁) 할머니가 한 말이다. 이 책을 읽을 때만 해도 송전탑이 무너졌으면 하는 어르신의 바람에 동조했을 뿐이다. 전기가 흐르고 있는 송전탑이 무너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몰랐다. 이차연 할머니도 그런 걸 알고 한 말은 아니다.

블랙아웃은 멜트다운을 낳는다

<원전 화이트아웃> 표지
 <원전 화이트아웃> 표지
ⓒ 오후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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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의 송전탑은 전기가 흐르는 송전선이 아니었다. 앞으로 원자력 발전소에서 생산되는 전기를 도시로 보내기 위해 건설되는 것이다. 그러나 핵발전소에서 생산되는 전기를 송전하는 송전탑이 무너지면 사태는 심각해진다.

후쿠시마 원전사고와는 비교도 안 되는 멜트다운(원자로의 냉각장치가 정지되어 내부의 열이 이상 상승하여 연료인 우라늄을 용해함으로써 원자로의 노심용융이 일어나는 현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때, 화재와 연료봉 노출에 의한 노심용융이 일어나 대량의 방사능이 누출되었다.

와카스기 레스가 쓴 <원전 화이트아웃>(오후세시 펴냄)은 원전마피아의 몰염치한 활동과 송전탑이 테러를 당했을 때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일본의 고위관리가 익명으로 쓴 소설이다. 후쿠시마 사고로 일본의 원전은 현재 전면 가동 중단상태다. 책은 원전마피아의 활동으로 원전이 재가동되고 결국 송전탑이 테러로 아비규환을 맞는다는 내용이다.

센카쿠열도의 일본점령에 불만을 가진 중국인 최씨의 테러로 송전탑이 폭파되었다. 50만 세대에 대규모 정전사태(블랙아웃)가 일어났다. 원전이 긴급 정지되었지만 핵연료는 계속 불타고 있다. 비상전력으로는 도저히 원자로를 냉각시킬 수 없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꽤나 흥미진진하다. 소설의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실제보다 더 실제적이다. 원전이나 원전마피아에 대하여 모르면 결코 손댈 수 없는 부분까지 말해주고 있다. 12월 31일 자정에 일어난 테러에 대처하는 원전관계자와 관료들의 태도는 '허둥지둥'과 '손 놓고 있음' 외에 다른 표현을 할 수 없다.

이들이 누구인가. 원전 재가동을 위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던 자들 아닌가. "원전은 안전하다"는 '성선설'을 잔뜩 퍼뜨려 국민의 동의를 얻어 재가동하지 않았던가. 원전사고에 대처하는 그들의 모습은 재가동을 위해 뛰던 움직임과는 전혀 딴판이다. 멜트다운은 시간문제.

TV를 통해 원전사고를 접한 시민들은 대거 자동차를 몰고 대피에 나섰다. 그러나 이미 밖으로 통하는 길은 모두 막혀버렸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경험한 터라 그 곳을 피하는 길밖엔 살길 없다는 걸 아는 시민들은 차를 버리고 걸어서 피신을 한다. 철도, 항공기 등을 이용하기도 한다.

"원자력규제청이 시뮬레이션을 실시한 결과, 전원을 상실한 후부터 한 시간 후에는 노심이 용해되어 방사능이 노출되는 멜트다운이 발생하고, 세 시간 후에는 멜트스루로 압력용기가 파괴된다. 그 뒤 격납용기 안에서 콘크리트와 녹아내린 핵연료가 반응해 다량의 수소와 일산화탄소가 발생하고, 일곱 시간 후에는 격납용기가 파괴되며, 스무 시간 후에는 건물 기초를 관통해 대량의 방사성물질이 외부로 방출된다고 예측했다."(287~288쪽)

이런 시뮬레이션은 그대로 되었다. 외환시장에서 엔화는 하한가로 추락했다. 일본 국채 이자가 급상승, 하한가에 이르렀다. 자국민 보호를 이유로 한국, 중국, 러시아의 함대가 일본 근해에 출현했다. 결국 오지 말아야 할 게 오고 말았다. 지옥이 따로 없다.

원자력 재가동을 위한 원전마피아의 치졸한 술수

원자력발전소는 정치자금의 주요 루트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후 원전이 가동을 중단하게 되니까 가장 궁핍한 군상이 바로 관료와 정치인들이다. 원전 재가동을 목표로 뛰는 원전마피아의 주표적은 바로 자금줄을 잃은 이들이다. 이들은 뇌물공여, 낙하산 인사, 협박, 공갈, 직권남용, 비자금, 정치자금 등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한다.

원전을 재가동하지 않으면 전기요금이 오른다고 국민을 설득한다. 온실가스 감축이라는 국제적 약속을 지키려면 원전 재가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용 후 핵연료 처리에 대하여는 함구하고 싼 에너지라고 선전한다. 이건 꽤나 선하게 접근하는 방식이다. 이들의 치졸한 방법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납품비리 사건이나 청도의 돈 봉투 사건 등은 양호한 수준이다.

원전마피아는 원전 재가동을 반대하는 활동가들을 이런 저런 죄목으로 옭아맨다. 원전 재가동을 반대하는 지사를 체포한다. 기사 제목은 이렇다. "니자키현이 발주한 시스템 개발에 뇌물수수의혹, 현직 지사 체포하기로 특수부 방침 확정" "측근에는 폭군, 결국은 '벌거벗은 임금님' 이즈타 지사" 이런 식으로 반대자를 제거한다.

또 두 명의 탈원전 활동가는 이렇게 옭아맸다. 신문 기사제목은 이렇다. "국가공무원법 위반혐의로 원자력규제청 현직 과장보좌체포, 교사범인 여성도 체포, 성관계 대가로 간부기밀 누설했나?" 아주 파렴치한이 되어 버렸다. 책은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탈원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잇따라 도쿄도의 공안조례 위반, 불퇴거죄, 국가공무원법을 위반했다며 체포되었다는 뉴스가 반복되면서 탈원전 세력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불법 세력이라는 인식을 일본 국민에게 강렬하게 심어줬다."(267쪽)

뇌물과 자리 약속 등으로 무장한 원전 마피아는 관료와 정치인과의 공생관계를 통하여 자신들의 뜻을 관철한다. 악어와 악어새, 이 끈을 끊지 않으면 탈원전은 불가능하다. 책에서 재가동된 원전은 송전탑만 무너져도 화이트아웃(시야 상실) 상태가 된다. 핵연료 냉각에 실패하면 맬트다운, 멜트스루(압력용기파괴)까지 가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지옥이 따로 없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원전폐기를 진행하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나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이 '핵발전 르네상스'라는 마약에 취해가고 있다. 일본은 호시탐탐 재가동을 노리고 있다. 안전한 원전이라는 허울 뒤에 숨은 원전 마피아의 술수를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봐야 하리라.

덧붙이는 글 | <원전 화이트아웃>(와카스기 레스 지음 / 김영희 옮김 / 우후세시 펴냄 / 2014. 11 / 300쪽 / 1만3800원)



원전 화이트아웃

와카스기 레쓰 지음, 김영희 옮김, 오후세시(2014)


태그:#원전 화이트아웃, #와카스기 레쓰, #김영희,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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