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한국프로야구 통합 챔피언 삼성 라이온즈, K리그 클래식 정규리그 우승팀 전북 현대, 인천 아시안게임 남녀 동반 금메달을 차지한 농구대표팀...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노장 선수들의 '미친 존재감'이 돋보였다는 점이다.

단체 스포츠에서 노장의 역할은 중요하다. 노장의 풍부한 경험과 노하우는 한 팀을 단단하게 결속하고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노장이 베테랑다운 역할을 하지 못하면 팀의 건강한 세대교체와 활력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노장 파워'로 팀 승리 이끈 선수들

팀에 이로운 노장의 유형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물리적 나이에 얽매이지 않고 꾸준히 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에이스' 타입의 노장이 있다. 반면, 경기에 많이 출전하지 못하고 팀 내 비중이 작아도 중요한 순간에 구심점 역할을 하는 '리더' 또는 마당쇠 성향의 노장이 있다.

전자는 이승엽(삼성), 이동국(전북), 문태종(LG)같은 선수들이다. 한국 프로야구 최다홈런 기록 보유자인 '국민 타자' 이승엽은 올 시즌 156안타 101타점 32홈런 타율 0.306의 맹활약을 펼치며 역대 최고령 30홈런 100타점 기록도 세웠다. 특히 홈런은 쟁쟁한 젊은 선수들과 외국인 거포의 틈바구니에서도 전체 4위를 기록했다. 한국시리즈에서 다소 부진했지마 올 시즌 삼성의 통합 4연패 대기록은 이승엽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5일 오후 경기도 부천종합운동장에서 열린 하나은행 초청 국가대표 친선경기 대한민국 대 베네수엘라 경기. 후반 대표팀 이동국이 역전골을 성공시킨 뒤 기뻐하고 있다.

지난 9월 5일 오후 경기도 부천종합운동장에서 열린 하나은행 초청 국가대표 친선경기 대한민국 대 베네수엘라 경기. 후반 대표팀 이동국이 역전골을 성공시킨 뒤 기뻐하고 있다. ⓒ 연합뉴스


K리그 최다 골 기록 보유자인 '라이언킹' 이동국. 그는 올 시즌 부상으로 중도 하차하기 전까지 13골을 기록하며 득점 선두와 함께 전북의 통산 세 번째 우승(2009, 2011, 2014)에서 모두 중추로 활약했다. 현재 수원 삼성의 외국인 선수 산토스가 득점 공동선두에 올라 있지만 남은 경기에서 골을 넣지 못하면 출전 경기 수가 적은 이동국이 득점왕에 오른다. 이동국은 35세의 나이에도 K리그 최고 공격수로서 기량을 인정받아 대표팀에 재승선했다.

지난 2013-2014시즌 프로농구 정규리그 MVP였던 귀화 선수 '태종킹' 문태종은 아시안게임에서 국가 대표팀의 최고령 선수이자 주포로 활약했다. 애초 귀화 선수 영입 카드가 불발되며 급하게 보강된 '대타'에 가까웠지만, 아시안게임에서 식스맨으로 평균 22여 분만 뛰고도 평균득점 16.3점으로 팀내 득점 1위, 대회 전체 3위에 오르는 맹활약을 펼쳤다.

3점슛 성공률이 53%(21/40)에 이르렀고 필리핀전에서는 자신의 국가대표 커리어 최다인 38점을 넣었다. 이란과의 결승전에서도 승리를 이끄는 마지막 결승 자유투에 성공하는 등 한국에 12년 만에 금메달을 안기며, 불혹의 나이에 귀화 선수 출신 첫 메달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이른바 나이를 거꾸로 먹는 유형의 선수들이다. 예전에는 30대만 넘겨도 노장 선수 소리를 듣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프로 스포츠가 점점 체계적으로 발전하면서 이제는 나이를 먹어도 젊은 선수 못지않은 기량을 유지하는 선수들이 늘고 있다. 노장의 경험과 리더십이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그 근간은 역시 실력이다. 철저한 자기 관리와 끊임없는 진화는 후배들에게 좋은 모범이 된다.

경륜과 노하우 갖춘 '진짜 선배'

반면 이들처럼 전성기 수준의 기량은 아니어도 자신만의 경륜과 노하우를 살려 팀에 공헌하는 노장들도 있다. 진갑용(야구. 삼성), 김남일(축구. 전북), 김주성(농구. 동부) 등이 이런 유형이다.

'갑드래곤' 진갑용은 올 시즌 부상과 재활로 정규시즌 11경기 출전에 그쳤다. 하지만 한국시리즈에서는 팀의 주전 포수로 맹활약하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만 40세로 역대 한국시리즈 최고령 출전, 최고령 안타 기록을 갈아치웠고, 종전 SK 박진만이 보유하고 있던 한국시리즈 최다 경기 출전(59경기) 기록도 경신했다. 3, 4차전에서는 선발 출전했고 나머지 경기에서는 대수비와 대타로 중용됐다. 농익은 투수 리드를 통해 6차전 우승 확정의 순간에 마지막 마스크를 쓰고 있었던 것도 바로 진갑용이었다.

한국 축구 역대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꼽히는 '상남자' 김남일은 37세의 나이에 프로 첫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김병지(경남)를 제외하고 필드 플레이어로는 K리그 최고령이다. 김남일은 올 시즌 17경기에 출전해 전북의 선두 질주에 크게 기여했다. 전반기에는 부상과 슬럼프 탓에 5경기 출전에 그쳐 은퇴를 고민했지만 후반기부터 주전 미드필더로 복귀하며 K리그에서는 10년 만에 골까지 넣었다. 김남일이 9월, 10월에 기록한 두 골은 모두 결승골이었고 전북이 선두를 수성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

김주성 '진짜 금 맞어' 한국 농구대표팀 김주성 선수(맨 오른쪽)가 3일 오후 인천 삼산월드체육관에서 열린 '2014 인천아시아경기대회' 시상식에서 금메달을 건네받은 뒤 깨물어 보이고 있다.

▲ 김주성 '진짜 금 맞어' 한국 농구대표팀 김주성 선수(맨 오른쪽)가 지난 10월 3일 오후 인천 삼산월드체육관에서 열린 '2014 인천아시아경기대회' 시상식에서 금메달을 건네받은 뒤 깨물어 보이고 있다. ⓒ 유성호


김주성은 남자 농구대표팀 현역 최장수 국가대표다. 1998년 세계선수권대회 때부터 태극마크를 단 김주성은 16년간 5회의 아시안게임과 6회의 아시아선수권, 2회의 세계선수권 등에 출전하며 부동의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농구 선수로서는 유일하게 두 번이나 아시안게임 우승을 차지했다. 그보다 더 값진 것은 한국 농구가 2000년대 국제대회 참사와 인기 하락의 암흑기 속에서도 오랜 세월 묵묵히 변함없이 대표팀을 지켰다는 점이다.

지난 아시안게임에서는 후배 김종규-오세근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고 평균 11분 정도의 출장 시간에 그쳤지만 변함없는 투지와 헌신으로 조커 역할에 충실하며 자신의 마지막 태극 마크를 우승으로 마무리 짓는 기쁨을 누렸다.

노장에게 힘 주는 건 주변의 '신뢰'

노장이 자기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결국 주변의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 아무리 경기력에 대한 자신감 있는 노장이라도 감독이 그 선수를 믿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다. 조금만 부진해도 '한물갔다'는 세상의 선입견이나, '앞길 막지 말고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줘야 한다'는 식의 압박은 노장들을 위축시킨다.

류중일 삼성 라이온즈 감독은 넥센 히어로즈와의 2014 한국시리즈 엔트리(27명)에 진갑용(40), 이승엽(38), 임창용(38), 박한이(35), 배영수(34) 등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만 5명을 포함했다. 그만큼 경험의 가치를 중시했기에 내릴 수 있었던 결정이다.

정규시즌 11경기 출전에 그친 진갑용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넣기 위해 포수를 3명(진갑용, 이지영, 이흥련)이나 포함한 것은 파격에 가까웠다. 류중일 감독은 이승엽, 임창용 등 베테랑 선수들이 부진에 빠질 때마다 주변의 비판에도 변함없는 신뢰로 선수들을 감싸 안았고, 베테랑들은 결정적인 중요한 순간마다 류 감독의 믿음에 보답했다.

 최강희 전북현대 감독

최강희 전북현대 감독 ⓒ 연합뉴스


최강희 감독이 이끄는 전북 현대도 '노장의 가치'를 누구보다 존중할 줄 아는 구단이다. "노장 선수는 결코 짐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최강희 감독이 없었다면 이동국과 김남일은 벌써 은퇴했을지도 모른다. 2009년 유럽 진출 실패와 성남에서의 방출로 벼랑 끝에 몰린 이동국을 데려와 K리그 최강의 공격수로 부활시켰고, 2014년에는 은퇴를 고민하던 김남일의 마음을 되돌리며 우승 주역으로 만든 것은 온전히 최강희 감독의 공로다.

현역 시절 불명예스러운 은퇴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던 최강희 감독은 노장 선수들에 대한 동기부여와 선수 관리에 누구보다 뛰어났다. 김상식, 최은성 등 많은 노장들이 전북에서 선수 생활의 아름다운 피날레를 장식할 수 있었던 이유다.

노장의 가치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숫자나 기록으로 환산할 수 없다. 무한경쟁이 보편화된 프로의 세계에서 노장이 더 젊고 재능있는 선수들에게 조금씩 자리를 내주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서지만, 훌륭한 팀을 만드는 데는 단지 젊음과 재능만이 전부는 아니다.

2014년 브라질월드컵에 출전했던 축구 대표팀 홍명보호는 역대 최대의 유럽파와 역대 월드컵 최연소(25.9세)멤버로 구성된 젊은 재능이 넘치는 팀이었다. 하지만 월드컵 본선에서 경험 부족의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내며 16년 만에 최악의 성적으로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 당시 엔트리에 30대 선수는 곽태휘 1명뿐이었지만 1분도 출전하지 못했다. 경험의 가치를 무시한 전형적인 실패 사례다.

프로야구 최고령 사령탑 김성근 감독은 자신의 저서에서 "조직이 위기일수록 버틸 힘은 베테랑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김성근 감독은 '노장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진정한 베테랑의 역할은 고비 때 빛을 발한다. 베테랑이 1년 내내 모든 경기에서 활약해 주길 기대하면 안 된다. 1년에 승부처는 30게임 정도인데 그 고비를 넘겨내는 힘이 바로 베테랑의 경험에서 나온다. 단 한 경기라고 해도 팀을 위하여 중요한 순간에서 해준다면 1년 치 연봉 값을 해내는 것이다. 그런 경험은 돈으로도 살 수 없다."

나이와 경험의 가치를 과소평가하는 요즘 세태에서 곱씹어볼 만한 이야기다.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스포츠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