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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 하는 금산사 주지 성우 스님(왼쪽)
 인사말 하는 금산사 주지 성우 스님(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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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이다'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군산은 근대역사·문화만 있지 고대와 중세는 없는, 뿌리가 없는 지역이 아닌가 하는 의문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늦게나마 우리의 정체성과 뿌리를 찾는 불교문화 기획전을 열어주신 데 대하여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전북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3층에서 열리는 '군산불교 보물전-천년의 만남'(10월 20일~12월 15일) 개막식에서 금산사 주지 성우 스님의 인사말 중 한 대목이다. 성우 스님은 "군산의 정체성과 뿌리가 깃든 전통문화에서 현대화를 구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일 것"이라며 "기획전을 마련한 박물관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는 인사도 빼놓지 않았다.

성우 스님 말마따나 토박이 중에도 '군산은 먹고 노는 문화밖에 없다'고 자조 섞인 탄식을 하는 이가 있다. 기자는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군산의 문화는 유구하다고 강조하고 싶다. 다양한 문화재와 고찰들이 예가 되겠는데 보천사, 상주사, 불주사, 은적사 등에 남아 있는 유물은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영욕으로 얼룩진 민족사와 함께해온 군산의 불교. 그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고려 공민왕이 국가 안녕 기원했다는 '상주사'

세월호 참사 애도 현수막이 내걸린 상주사 일주문,
 세월호 참사 애도 현수막이 내걸린 상주사 일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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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1일) 아침. 상주사(上柱寺)로 방향을 잡았다. 군산시 임피 삼거리에서 서수농공단지 쪽으로 2~3분 달리니 우측으로 '백릉 채만식 묘' 안내판이 보인다. 백릉을 뒤로하고 자그만 언덕을 넘어 좌회전, 좁고 구부러진 포장도로를 따라 1km쯤 들어가니 취성산 기슭에 자리한 상주사 전경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늑하게 펼쳐진다.

일주문을 지나는데 '진도 여객선 세월호 유가족과 실종자들을 진심으로 애도한다'는 현수막 문구가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다. 경내로 들어서니 위용을 과시하듯 버티고 서 있는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보호수로 지정된 300년생 배롱나무, 종각을 받치고 있는 검푸른 빛의 석축 등이 천년고찰임을 말해주는 듯하다.

낙엽으로 뒤덮인 주차장과 상주사 전각들,
 낙엽으로 뒤덮인 주차장과 상주사 전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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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의 나이가 느껴지는 석축과 종각
 세월의 나이가 느껴지는 석축과 종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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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쾌한 아침 공기가 산사에 와 있음을 실감나게 한다. 왼손에 약병을 든 인자한 미소의 관세음보살 석조상과 오밀조밀 배치된 전각들, 그리고 오색단풍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주변 풍광이 무거워졌던 마음을 전환해 준다. 밤새도록 내린 비로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낙엽들이 마당과 돌계단에 두툼한 양탄자처럼 깔려 발걸음이 한층 가볍다. 관음전 점안식을 앞두고 있어 연등이 온통 절마당을 채웠다.

상주사는 백제 무왕 7년(606) 혜공이 창건한 고찰이다. 고려 공민왕 11년(1362) 나옹이 중창하고 조선 인조 19년(1641) 취계가 중수하고, 영조 38년(1762) 학봉이 중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원래 '머무를 주(住)'를 쓰는 '상주사'였으나 공민왕이 나라의 안녕을 비는 기도를 했던 게 인연이 되어 '나라의 기둥'이 되는 절이라는 의미로 '기둥 주(柱)'로 바꿨다 한다.

석가모니불이 봉안된 상주사 대웅전 법당
 석가모니불이 봉안된 상주사 대웅전 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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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각으로는 대웅전과 나한전·관음전·범종각·요사채 등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웅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7호)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삼존불과 영산회상도, 신중·지장보살·독성·칠성·산신 등의 탱화가 모셔져 있다. 그 중 '목조삼세 불좌상'(석가불, 아미타불, 약사불)은 17세기 전반 불상으로 2013년 5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21호로 지정됐다.

삼존불 위 닫집에는 용두가 조각되어 있는데, 본래는 2기였으나 1기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약탈해 갔다고 한다. 용마루 위에는 청기와가 2개 얹혀 있으며, 상단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11개의 용두가 놓여 있다. 신라 진평왕도 이곳에 들러 국가에 대한 기도를 올려 소원을 성취했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상주사 나한전에 모신 16 나한상
 상주사 나한전에 모신 16 나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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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과 처마를 맞대고 다소곳하게 서 있는 나한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지붕 옆면을 가리는 나무로 된 풍판이 건물 양측을 절반 이상 차지하고 있어 독특한 모습이다. 외모가 화려한 대웅전과 달리 단순하면서 엄숙한 느낌을 준다. 이곳에 모셔진 16 나한상은 예로부터 소원을 비는 사람들에게 영험하기로 유명하다. 

전설에 의하면 순조 34년(1834) 임피 현감 민치록이 어느 날 흰옷에 흰 갓을 쓴 세 사람이 나타나 '우리를 높은 곳으로 안내해 달라'고 부탁하는 꿈을 꾸었다. 같은 꿈을 세 번이나 꾸자 괴이하게 여기고 관리들에게 특이한 일이 있으면 보고하라 했다. 며칠 뒤 서포 앞 금강에 인도에서 16 나한을 실은 배가 한 척 닿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에 민치록은 16 나한을 상주사에 모셨고 이후 많은 영험을 보였다고 한다.

고려 시대에는 취성산 줄기에 아홉 개 암자가 있었으며 해방 후 장마철에는 냇가에 청기와 조각이 나뒹굴었다고 한다. 지금도 산기슭 곳곳에서 와편과 주초가 심심찮게 발견되고 있다. 옛날 상주사에는 승려가 200여 명이나 머물러 사찰에서 아침밥 공양을 준비하느라 쌀 씻는 쌀뜨물이 아랫마을 옥하리까지 흘렀을 정도로 번창했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내려온다.

식민지 아픈 역사 고스란히 간직한 '보천사'

정결하고 단아하게 느껴지는 보천사 전경
 정결하고 단아하게 느껴지는 보천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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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사에서 큰길로 나와 서수농공단지 쪽으로 2~3분 달리면 왼쪽 길가에 세워진 보천사(군산시 향토문화유산 제11호)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그곳에서 좌회전, 정겨움이 묻어나는 굽이진 시골길을 따라 1.5km쯤 들어가면 취성산 중턱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보천사에 다다른다. 비구니 스님들이 거주하는 사찰이어서 그런지 입구에서부터 깔끔한 느낌이 든다.

보천사(寳泉寺) 역시 백제 무왕 2년(602) 혜공이 창건하고, 고려 공민왕 2년(1352) 나옹이 중창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웅전은 최근에 충창한 건물이며 전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양식이다. 탱화나 동종도 근래 작품으로 새롭게 창건한 사찰이나 진배없음에도 조선 시대 고지도에 나타나는 군산의 전통 사찰이다.

20년 전 주지로 부임한 의종 스님은 "보천사를 중심으로 우측에 상주사, 좌측에 불주사가 자리하고 있으며 창건 연대는 보천사가 가장 앞선다"고 귀띔한다. 의종 스님은 "부근 전답이 모두 도량일 정도로 번창했는데, 임피에 사는 일본인 대지주들이 본당을 해체해서 일본으로 가져가다가 벼락이 치고 하자 많은 불상을 이리(익산) 기차역에 놓고 도망쳤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자랑스럽고 소중한 유물들이 일제의 약탈로 남아 있는 게 없다"고 탄식했다.

보천사 주차장에서 바라본 마을 풍경
 보천사 주차장에서 바라본 마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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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종 스님 말대로 보천사는 법당 용마루에 청기와를 얹어 아침 햇살이 비치면 건넛마을에서도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한다. 일인들이 법당 해체를 몇 차례 시도했으나 주민들 반대로 실패했고, 1923년 일인 고교다(高橋)가 2700원에 사들여 일본으로 약탈해가는 '매불 사건'이 일어났다. (1924년 2월 19일 자 동아일보 참고) 이듬해 2월 부산으로 운반하다 이리(익산)역에서 압수된 불상들은 익산 숭림사에 모셔져 있다.

김중규 군산시 학예사에 따르면 숭림사 영원전에 모신 지장보살좌상 및 25구의 불상(지방문화재 189호)과 나한전에 모신 소조 16나한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19호), 익산 혜봉원의 연화당 부도(전라북도 문화재 자료13호) 등이 보천사에 있던 유물이다. '나라가 망하면 찬란한 문화재도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신세로 전락하는구나!' 소리가 절로 나왔다.

'매불 사건'으로 일인들에 의해 폐사된 보천사는 1936년 승려 백낙도가 옛 절터 옆 지금의 자리에 중창하고 1971년 김무진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아미타여래 본존불이 봉안된 극락전 법당
 아미타여래 본존불이 봉안된 극락전 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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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전 법당에는 아미타여래를 본존불로 하여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좌우 협시불로 모셨다. 대웅전(극락전), 삼성각, 부도전, 종각, 요사채 등으로 가람을 이루고 있으며 바닥이 잔디여서 도량이 단정하게 느껴진다.

보천사는 100여 년 전 <동아일보> 보도에도 1300년 된 고찰로 소개되고 있다. 유물로는 부도 3기가 전해진다. 그 중 옛 절터에서 옮겨온 부도 1기는 상주사를 중수하고 1652년 이곳에서 입적한 고승 취계당 사리탑으로 확인됐다. 네 귀에 연꽃 봉오리가 새겨진 부도는 높이가 140cm이며 1983년 해체복원 작업 중 유기 사리함 한 점이 나와 군산대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보천사 입구에 있는 취계당 부도(사리탑)
 보천사 입구에 있는 취계당 부도(사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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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자료출처: 군산시사 上권, 김중규의 <군산답사 여행의 길잡이>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군산 불교, #상주사, #보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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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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