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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대학교 앞에 원룸·하숙 세입자를 구하는 전단이 붙어 있다.
 서울의 한 대학교 앞에 원룸·하숙 세입자를 구하는 전단이 붙어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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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과 살던 집을 나와 세입자 생활을 한 지 16년 가량 된다. 헤아려 보니 이사만 12번 정도 한 것 같다. 혼자 살 때도 그랬지만, 결혼 후에도 수없이 이사를 다녔다. 대전에서 수도권으로 발령 받아 고양시에서 인천광역시로, 그리고 현재의 울산까지….

가끔 필요에 의해 주민등록 초본을 뗄 때가 있다. 동사무소 직원이 건네주는 초본을 보며 눈치를 보곤 한다. 동사무소 직원들 역시 출력되어 나오는 내 초본을 보며 열이면 열 '또 나오나?'하며 쳐다본다. 초본이 3장 정도 나오기 때문이다. 워낙 자주 이사를 하다 보니 내가 지금까지 이사다녔던 주소가 줄줄이 적혀 나온다. 초본을 보면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장소가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내가 지나온 발자취니까 말이다.

10여 년 넘게 세입자로 살면서 집주인이나 같은 세입자들끼리 좋은 일 나쁜 일 많이 겪었지만,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딱 하나 있다. 차마 글로 쓰기 좀 민망하지만 당시에는 웃음을 참지 못한 '새벽의 신음 전설'이다. 하룻밤의 이야기지만 그 동네에서는 오래도록 회자되었고,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인 이야기다.

그러니까 2001년경 대전의 한 대학 부근에서 600만 원 전세로 남동생과 함께 살 때다. 대학가 원룸 촌이기에 대부분의 주택이 임대수익을 위해 닭장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층별로 서너 평의 원룸이 대여섯 채 자리했다. 이층까지 합하면 방이 대략 10개 정도였다. 전세금이나 월세를 받아 생활하는 집주인들은 큰 돈은 아니어도 어디 가서 못 산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밤 새벽이었다. 옆방에서 끙끙 앓는 젊은 여성의 소리가 들렸다. 잠결에 듣고 있던 나는 '많이 아픈가 보네, 병원이라도 가지' 이런 생각을 하며 뒤척이다가 눈이 떠졌다. 시간은 새벽 4시가량이었다. 앓는 소리는 계속되었다. 걱정되면서도 시끄러워 잠이 오지 않아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계속 듣고 있자니 의구심이 들었다. 목소리의 톤과 발음, 거기에 얹혀 있는 감정선.... 나름대로 정리해 보니 아파서 앓는 소리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새벽마다 앓는 소리에 잠 설쳐

미묘하면서도 야릇한 그 소리! 우리 방 옆에는 동거하는 대학생이 살았는데, 그 방에서 나는 소리였다. 새벽녘이면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민망한 그 소리에 잔뜩 긴장을 했다. 한 10여 분 지났을까? 일을 잘(?) 치렀는지 이내 조용해졌다. 그리고 수돗물 내려가는 소리.

난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옆방을 보고 싶었다. 당시 공동 화장실을 가려면 그 방을 지나가야 했다. 무의식적으로 힐끗 옆방을 보았다. 세상에나! 창문이 열려 있는 것 아닌가? 아무리 초여름이라지만 이건 좀 무리수 아닌가?

난 불빛을 피해 얼른 화장실로 향했다. 며칠 전부터 꼭 그 시간, 새벽 4시 10분 정도만 되면 이리 시끄럽다. 아침마다 동생과 나는 지난밤의 야릇함 때문에 잠을 못 잔다고 투덜댔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일이 터졌다.

그 날도 어김없이 새벽의 야릇한 소리에 잠에서 깨 화장실을 다녀와 잠을 청하려는데, 아저씨가 술김에 내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학생, 안에 있나?"
"......"

"학생, 나 옆 집 사는 아저씨인디…."
"왜 그러시죠?"

옆방 학생이 나왔다.

"내가 말이여 직업이 밤에 하는 일이라 끝나고 들어오면 새벽인디, 좀 조용히 해줄 수 없겠나?"
"......"

"뭐, 젊은 사람들이 서로 좋으면 그런 거지. 나도 다 이해하네, 근데 사람이 잠은 자야 하지 않겠나?"
"예,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조심하겠습니다."

나와 동생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온 몸의 신경을 옆방에서 나오는 소리에 기울였다.

"내가 말이여 밤에 일을 한단 말이여, 근데 새벽에 퇴근하면 잠을 자야 하는데 통 잠을 잘 수가 없어"
"아, 예!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빵 터졌다. 다시는 뭘 안 그러겠다는 건가? 이불을 둘둘 말아 간신히 입을 틀어 막았다. 배가 하도 씰룩거려 웃음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힘겹게 웃음을 멈추고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그러니까, 옆집 아저씨는 밤에 일을 하시고 새벽에 들어오신다. 근데 집에 들어와서 자려고 누우면 낮은 담장 너머에서 젊은 학생들이 내는 소리에 너무 신경이 거슬렸다. 그동안 꾹 참아 왔는데, 오늘은 막걸리 한 사발 들이켠 후 작정하고 옆집으로 온 것이다.

남학생의 사과에도 아저씨의 목소리가 더 커진다.

"학생들이 말이여 그러면 안 돼!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옆집 사람들이 잠은 자야 할 거 아녀!"

아저씨의 목소리는 거칠어졌다. 술 한잔 걸치고 작정하고 온 모양이다. 이내 잠자코 사과만 하던 남학생도 소리가 커졌다.

"아저씨! 그만 하세요. 죄송하다고 했잖아요."
"뭐여, 화내는 거여? 내가 그랬잖어. 뭐 젊은 사람들이 그럴 수 있어. 그렇지만 새벽에 사람들이 잠은 자야 할 거 아녀."

아저씨는 했던 말을 하고 또 하고 남학생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상황이 종료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숨을 죽인 채 이불 속에서 듣고 있던 남동생의 한숨소리를 들었다. 어디선가 큰 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거 잠 좀 잡시다!"
"그만 좀 하시고 주무세요!"

듣다 못해 다른 원룸에서 소리를 지른 것이다. 그 말에 아저씨는 더 화가 났는지, 목소리가 더 커졌다. 했던 말을 하고 또 하고... 아저씨의 횡설수설은 그치지 않았다.

주위가 조금씩 밝아지는 것을 보니 집 주변 반경 20m 안 집사람들은 다 깬 것 같다. 주위가 닭장같은 원룸촌이라 새벽에 슬리퍼 끌고 걷는 소리도 고스란히 들리는 동네다. 처음엔 술 취해 시비거는 아저씨를 응원하다 다툼이 길어지니 짜증이 밀려오는가 보다.

용감한(?) 아저씨의 소동

서울 대학가의 한 원룸촌. (자료사진)
 서울 대학가의 한 원룸촌. (자료사진)
ⓒ 박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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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를 20여 분. 결국 사이렌 소리가 나고 경찰차가 왔다. 견디다 못해 이웃집에서 경찰에 신고를 한 듯했다. 경찰이 오자 5분 안에 상황이 종료됐다. 집주인과 경찰 아저씨는 횡설수설하는 아저씨를 경찰차에 쑤셔 넣었고, 오늘의 사태를 일으킨 동거 학생들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침 출근시간 그 아저씨는 경찰차를 타고 집으로 왔고, 옆방의 학생들은 이튿날 이층으로 방을 옮기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한 밤의 웃지 못할 민망한 소동은 그렇게 끝났지만, 그 사건은 후에도 숱한 화제와 입소문을 남긴 채 수년 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소문을 듣고 우리 집으로 탐방(?) 온 친구들도 있었으니, 참으로 흔치 않은 해프닝이었다.

사실 옆집 아저씨는 원인제공을 했던 학생들만 아니면 조용히 들어와 자는 사람이었다. 어지간했으면 담장을 넘어 찾아 왔을까. 주위에 살던 많은 다른 피해자(?)들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지만 새벽에 잠이 깨서 금방 잠이 들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들 고통이 있었는데, 그 가려운 곳을 그 아저씨가 긁어준 것이다.

학원가의 풍토가 바뀌어 월세를 분담한다는 이유로 동성 간 혹은 이성간 동거가 많이 늘고 있다. 이 현상은 10년도 훨씬 넘었을 때 시작되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성 간 같은 방을 쓰는 걸 주위에선 좋게 보지 않았다. 게다가 의도치 않은 '소음'에 피해를 겪는 사람들도 있다.

그때로부터 약 14년이 지났다.

'세입자 생활을 언제쯤 벗어날까?'

야심한 밤에 귀뚜라미 소리에 잠 못드니, 문득 14년 전 그 '전설'이 생각난다.

덧붙이는 글 | "나는 세입자다" 공모글입니다.



태그:#세입자, #월세, #전세, #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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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음악, 종교학 쪽에 관심이 많은 그저그런 사람입니다. '인간은 악한 모습 그대로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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