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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 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 김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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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6월은 청계피복노조 지부장 임기대회가 있는 달이었다. 6월 22일 제3차년도 정기대의원대회를 앞두고 기관과 사용주 측에서는 청계노조를 어용화 시키겠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최일호가 노총의 법규부장으로 있을 때 그를 통해서 '이선두'라는 사람이 노조에 왔다. 그에게 청계노조 상임지도위원이라는 직책이 주어졌다. 정부의 정보기관과 사용주 측에서는 이선두를 지부장으로 출마 시켰다. 이선두를 통해 어용노조를 만들겠다는 계략이었다.

이선두라는 사람은 청계노조 상임지도위원으로 있으면서 사용주를 족쳐서 굴복시키는 일을 잘했다. 그 사람은 사용주가 일단 근로기준법을 어겼다든지 부당한 일을 저질렀다든지 하면 그 꼬투리를 잡아서 사용주 다루기를 고양이 쥐 잡듯이 다그쳐서 합의서를 받아냈다.

"당신, 이러이러한 일 노조에 협조하는 게 좋을 거야."

이선두가 은근한 협박을 곁들여 말하면 사용주는 겁이 나서 벌벌 떨었다.

한 번은 어떤 사용주가 일요일에 강제작업을 시키다가 걸렸다. 노조사무실에 불러다 놓고 닦달을 하고 있는데 그 사용주가 전화를 한 통 쓰겠다고 했다. 수화기를 붙들고 집에 있는 부인한테 뭐라고 말을 건네더니 갑자기 중국말로 바꿔서 지껄이는 것이었다.

"야, 이 새끼야!"

전화통화를 듣던 이선두가 갑자기 욕을 터뜨렸다.

"뭐라고? 이 새끼들이 말을 안 듣는다고? 어, 이 자식 봐라?"

이선두는 흥분해서 죽여 버리겠다고 웃통을 벗은 채 주먹을 휘둘렀다. 사장은 수화기를 내려놓더니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은 그 사장이 중국말로 그 말을 했는가 보다 하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사장이 돌아간 다음에 어떤 사람이 이선두에게 중국말을 할 줄 아느냐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이선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담배를 피우면서 전화하는 것을 가만히 보니까 뭐라고 지껄이는 소리가 비웃으면서 하는 것이야. 그래서 요새끼가 지금 우리 욕을 하는구나 하고 감을 잡은 거지."

하여튼 이선두라는 사람은 사용주를 다루는 데는 능수능란했다. 사용주를 윽박질러 돈을 긁어내는 데는 따를 사람이 없었다. 이런 사람을 정부와 사용주 측에서는 지부장으로 당선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노조는 회의를 해서 최종인을 지부장을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추천했다. 당사자인 최종인은 한사코 지부장을 못하겠다고 버텼다. 이소선과 이승철이 나서서 최종인한테 네가 그러면 안 된다고 설득을 했다. 최종인은 지도위원으로 있는 최일호가 지부장을 해야 한다면서 끝내 사양했다. 이소선은 최종인의 그러한 태도에 너무나 답답해서 화를 내며 말다툼까지 했다. 하는 수 없었다. 이소선과 친구들 쪽에서는 최일호를 밀기로 했다.

6월 22일 개최된 대의원대회에서 최일호가 지부장으로 선출되고 최종인이 상임부지부장으로 선출되었다.

최일호는 지긋한 나이에다 노동법을 잘 알고 있었다. 노조운영에 대한 행정능력도 뛰어나 당시 조합간부들한테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다. 그는 노총을 통해서 청계노조에 온 사람이다. 그러나 운동성이나 투쟁의지가 없는 사람으로 본인 스스로도 자신은 '반공포로'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일호는 두 달 가량 지부장을 하다가 사임을 했다. 결국 최종인 상임부지부장이 직무대행을 맡게 되었다. 이어서 10월 5일, 임시 대의원대회를 개최해 최종인을 지부장으로 선출했다.

노총과 사용주 측에서는 어용화를 기도하는 한편, 동시에 전태일의 친구들을 분열 시키려는 공작을 진행하고 있었다. 노동교실 개관식 때 함선생한테 초청장을 보냈다는 트집을 잡아 정보기관과 사용주 측에서는 계속적인 압력을 가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초청장을 빨간 글씨로 인쇄해서 재야인사들한테 보낸 이승철 사무장과 간부 4명 정도를 해임시키라고 요구해왔다. 물론 집행부에서는 그들의 부당한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다.

기관에서는, 그들이 심어놓은 사람들이 청계노조를 말아먹게 공작을 해도 전태일 친구들이 하도 단단히 뭉쳐 있어 뜻대로 일이 안되니까 전태일 친구들을 본격적으로 분열시키자는 의도였다.

그 동안에는 전태일 사건의 파장 때문에 여론을 의식해서 노골적으로 공작을 진행 시키지 못했었다. 또 선거도 있어서 까놓고 탄압을 못하고 음성적으로 작업을 했었는데,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이어서 유신까지 한마당에 이제는 거리낄 것이 없다는 태도였다.

"노동조합 간부를 기관이나 사용주가 지네들 맘대로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권한이 어디 있느냐!"

이소선은 저들의 탄압이 드셀수록 강력하게 싸워나가기로 작정했다.

"승철아, 너 절대로 나가지 말아라! 저놈들이 와서 끌어낼 때까지 버티고 있어라!"

이소선은 이승철에게 굽히지 말라고 힘을 주고 전태일 친구들에게 똘똘 뭉쳐서 싸워야 한다고 당부했다. 다행히 삼동회 회원들은 이소선의 말을 잘 따라주었다. 그러나 이선두 등은 예외였다.

이승철이 집행부에서 계속 버티니까 구체적인 압력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용주들은 우선 전임급료를 지불하지 않았다. 동시에 조합비를 일괄공제해 주지 않는 것이다. 노조가 가장 골머리를 썩여왔던 돈 문제를 가지고 공격해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돈 때문에 얼마나 굶었었던가!

노조결성 초기에는 어려운 재정을 전태일 장례 조위금으로 메꾸어 나가면서 굶다시피 하며 어렵게 견뎠다. 단체협약이 체결되면서 조금씩 숨통이 트여 어느 정도 재정자립이 될 만하니까 저들은 야비하게 돈을 가지고 숨통을 조여 왔다.

임금은 동결시키고 조합비 일괄공제를 거부함과 동시에 노조간부의 활동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시장경비들을 동원해서 조합간부들의 공장출입을 가로막았다. 간부들은 날마다 공장에 나가 경비들과 몸싸움을 벌이다가 저녁때는 진이 빠져서 사무실로 돌아왔다. 저들의 탄압은 끈질겼다. 간부들은 어려운 탄압을 견뎌내려고 애를 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집행부 간부들은 많은 고민과 갈등에 휩싸여 갈피를 못 잡게 되었다. 갈수록 저들의 방해공작은 치밀해져갔다. 어느새 조합간부들은 일이 이쯤 되니까, 이승철이 당분간 물러나야 한다는 분위기로 변해가고 있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날들이었다.

어느 날 간부들이 우이동 계곡에서 술자리를 함께 하며 이승철의 거취 문제를 논의했다.

"너무 힘들다. 이런 때는 숨통을 터서 살아나야 하지 않냐? 쉽게 말하면 솥뚜껑을 완전히 덮어버리면 터지니까 조그만 구멍을 내서 터지는 것을 방지해야 하지 않겠냐?"

청계피복노조 제3차년도 대의원대회 모습
 청계피복노조 제3차년도 대의원대회 모습
ⓒ 청계피복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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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호는 이승철이 물러나야 한다고 적극 주장했다. 모두들 할 말을 잃고 술만 들이켰다.

결국 4개월 가까이 버티다가 9월 18일 운영위원회를 열어 부서장 사표처리 문제를 논의했다. 이승철, 양승조, 신진철, 신정은 등 부서장의 사표를 수리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소선은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들 사이를 자본가들이 쪼가리 내는 것 같고, 이제 노동조합을 못하지 않을까 하는 참담한 생각이 들어 그는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승철아, 그놈들이 와서 끌어낼 때까지 버텨라!"

'그러나 얼어붙은 정국. 아직은 조직력이 허약한 이들이 힘으로 저들을 꺾을 수 없으니 이 노릇을 어찌하랴!'

이소선은 분한 생각이 들었다.

'저들은 전태일을 앗아가더니, 이제는 전태일 친구들마저 자신의 곁에서 빼앗아가려고 하는구나. 노조를 어떻게 만들었는데……전태일의 뜻을 이뤄야 하는데, 여기서 이런 꼴을 당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태일아, 네 친구들이 쫓겨나는 구나!'

간부 4명이 저들의 압력에 의해서 쫓겨나는 것을 그의 눈으로 보고 있으려니 정말 갑갑하고 미칠 지경이었다.

이승철은 이소선과 함께 그의 집에서 살고 있었다. 날마다 아들처럼 붙어 다니다가 이승철이 노조에서 물러나게 되니, 이승철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했다. 이소선은 이승철이 노조에서 쫓겨난 걸 생각하면 가만히 있다가도 방안을 헤매고 다녔다.

"어머니, 우리가 영영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일단 작전상 물러나는 것이니 울지 마세요. 우리 힘이 생기고 상황이 좀 바뀌면 다시 들어올 테니 염려하지 마세요."

이승철은 이소선의 등을 얼싸안으며 그를 위로해주었다.

'그렇다, 우리가 믿을 것은 우리의 조직된 힘밖에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다.'

이승철은 노조에서 쫓겨난 뒤 곧장 현장에 취직했다. 열심히 일 하면서 현장조직 확장에 무진 애를 썼다 일을 하면서도 점심시간마다 노조사무실에 들려 조합원들을 만나고, 조합운영에 관해서도 부지런히 참여했다.

"이승철이가 나갔는데 점심시간에 조합사무실에는 왜 들리는 거냐?"

어느 날 점심시간에 담당형사가 이소선 앞에서 엉뚱한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야, 이 무식한 짭새야, 조합원이 점심시간에 조합사무실에 오는 것도 죄가 되냐? 어서 꺼지지 못해!"

이소선은 분을 참지 못하고 형사의 멱살을 쥐고 흔들며 한참 동안이나 억세게 싸웠다.

덧붙이는 글 |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은 매일노동뉴스와 함께 연재합니다.



태그:#이소선,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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