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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용흥궁(龍興宮)'으로 갔다. 조선 철종(1831∼1863)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 살았던 집이다. 원래 초가였는데, 왕위에 오르고 난 이후에 보수 단장하고 그 이름을 궁이라고 고쳐 부른 것이다.

철종의 잠저
▲ 철종 철종의 잠저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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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이 보위에 오른 지 4년 만에 강화 유수 정기세가 지금과 같은 집을 지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잠저구기비각 1동, 내전 l동, 외전 1동, 별전 1동 등이며, 팔작지붕에 홑처마 주심포집이다. 궁이라고는 하지만 작고 초라한 건물이다.

별전에는 마루 앞으로 작은 정원이 있고, 별전 오른쪽에는 조금 더 큰 규모의 정원이 있다. 철종이 왕이 되기 전 오랫동안 이곳에서 빛이 났다고 하는데, 왕이 되면서 빛이 사라졌다고 한다. 철종이 왕이 된 직후 천주교 신자였던 부친의 행적은 왕실주도하에 대부분 지워졌다고 전한다.

철종은 안동(장동) 김씨들의 세도정치 하에서 고생만 하다가 젊은 나이에 일찍 죽은 불쌍한 왕으로 잠저 또한 초라하기 그지없어 마음 아픈 곳이다. 

그리고 지난 1991년 부도 난 이후 이제는 굴뚝만 남은 '심도직물 터'로 갔다. 화문석이 유명한 강화도에는 한창 많을 때는 직물공장이 21개나 되고, 종사자만 5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지역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심도직물의 사주 김재소는 1947년 심도직물을 설립하여 직물 수출에 힘쓴 기업인이다.

굴뚝
▲ 심도직물 굴뚝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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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노동력 착취는 심해서 1967년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심도직할분회를 설립되면서 노사 간의 대립은 본격화된다. 문제는 1968년 사업주가 노조 분회장 및 조합원들을 해고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심도직물은 1200여 명의 종업원 중 900여 명이 조합원이었다. 이에 사측은 갖은 수단을 동원해 노조를 와해시키려는 공작을 취하면서 1968년 1월 초까지 16명의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이들 해고자 모두는 천주교 신자였다.

해고조치와 동시에 김 사장과 직물협의회 임원들은 지역의 미카엘 신부를 찾아가 노조활동에 간섭한다는 항의와 함께 반공법으로 구속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그리고 1월 8일, 강화도 내 21개 직물회사들이 모여, 미카엘 신부의 사상이 의심스러우며 앞으로 JOC회원을 고용하지 않겠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7개항의 결의문을 작성하고 이를 중앙일간지에 발표했다. JOC는 즉시 조사단을 구성해 직원을 파견한다.

구체적인 조사를 마친 JOC총재 김수환 신부는 주교단 명의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교회는 그리스도교적 사회 정의를 가르칠 권리와 의무가 있으며, 특히 노동자의 권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목자로서의 신부는 이러한 정의와 권리를 가르칠 책임이 있습니다."

표지석
▲ 심도직물 표지석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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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천주교 측의 입장 표명이 계속 이어지자 정치권도 조금씩 술렁이기 시작했다. 심도직물 사주 김재소 공화당 국회의원은 '우리도 금명간 성명서를 내서 진상을 밝히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신민당 김은하 국회의원은 '진실 규명을 위해 자료 수집에 착수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노동자들의 집단 해고문제가 정치문제로 비화된 것이다.

강화직물협의회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다. 천주교 측에서도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을 천주교 박해 행위로 규정하며 공개사과를 계속 요구했다. 결국, 1월 22일 강화직물협의회는 이에 대한 해명서를 제출하며 JOC회원을 고용하지 않겠다는 등의 지난 결의사항을 철폐했다.

그리고 2월 16일, 천주교 측의 요구를 전면 수락한 후 신문에 해명서를 발표했다. 이로써 심도직물 사건으로 해고된 노동자들이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복직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노동자들의 처우는 달라진 게 없었다.

그때마다 김 신부는 그들을 끌어안았다. 특히 노동자들의 인권에 대한 인식이 미약하던 시절에도 김 신부는 그들을 껴안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김수환 추기경이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에 개입, 주교단 공동교서를 발표한 것은 한국교회의 첫 사회적 발언으로 기록돼 있다. 이 사건은 향후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전태일 열사의 죽음보다 1년 앞서는 한국노동운동사의 큰 사건이었다.

이런 역사의 현장에 설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기분이 좋았다. 어지러운 세상살이, 노동성지에 보다 당당히 설 수 있는 그날이 빨리 오길 바라면서 잠시 묵념을 했다. 정말 바쁘게 돌다보니, 오후 1시 30분이 다 되어 남문로 인근의 콩비지와 콩국수를 하는 작은 식당으로 이동하여 점심을 먹었다.

콩비지 식사
▲ 점심 콩비지 식사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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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더운 날씨임에도 다들 콩비지로 점심을 먹고는, 이웃에 있는 1928년 백두산 잣나무를 가져와 지었다는 한옥 및 일본식 가옥의 형태를 결합한 집과 1950년 중반에 지은 창고를 개조한 '남문로7'카페로 이동하여 차를 한잔했다.

카페
▲ 남문로7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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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고택의 내부를 둘러보면서 주인장에 집에 대한 안내를 받았다. 강화도에서 두 번째 부자였던 이곳 황부자집은 최근 30년 가까운 기간 동안 빈집으로 방치되어 있다가, 도자기와 디자인을 공부한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여 수리와 청소를 하는 과정에 있었다.

1928가옥
▲ 장롱 유리 1928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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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의 창고는 카페로 개조되어 쓰이고 있었고, 고택의 넓은 정원과 입구 좌측은 2층 구조로 되어있어 멋스러웠다. 특히 성당에서나 볼 수 있는 스테인드글라스를 연상하게 하는 장롱의 유리와 벽에 걸린 족자 등은 오래된 고택의 정취를 느낄 수 있어 좋았다.

한옥과 일식을 합한 건물
▲ 1928가옥 한옥과 일식을 합한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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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집 마당에 앉아 잠시 쉬면서 차를 한잔 하면 무척 좋을 것 갔다. 담에 강화에 오면 천천히 더 둘러보고 싶은 곳이다. 주인장의 말로는 원래의 사진대로 마당에 작은 연못을 다시 파고, 담장도 추후 새로 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강화도에 새롭게 정착한 주인장은 요즘 한옥 청소와 함께 순무차를 개발 중에 있다고 했다. 담에 꼭 한잔 마셔야겠다.

이어 강화내성의 '남문'이다. 강화내성은 약 1200m에 걸쳐 흙으로 쌓은 토성이다. 모양은 현재의 강화읍을 둘러싸는 형태로, 북쪽으로는 북산, 남쪽으로는 남산, 동쪽으로는 견자산, 서쪽은 북산과 고려산의 산줄기가 이어지는 능선을 이용해 축성되었다.

강화도
▲ 강화남문 강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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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고려시대 몽골의 침략을 막고자 수도를 이전하고, 최우가 중심이 되어 쌓은 것으로 내성과 중성, 외성의 구조로 되어있다. 내성의 주위를 1250년에 둘레 5300m로 중성을 쌓았고, 외성은 1233년 강화의 동쪽 해안선을 따라 11200m로 세웠다.

내성의 남문은 내성에 있는 4대문 가운데 하나로 조선 숙종 때에 건립된 것으로 겹치마 팔작지붕의 누각으로 안쪽에는 안파루라는 현판이 밖에는 강도남문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평지에 세워진 문이라 문 앞이 옴폭 들어간 형태이며, 동서쪽 사면에 성벽이 아직도 남아있다.

사방이 크게 뚫린 평지를 자랑하는 성문 안쪽에는 작은 집들이 남문을 정원으로 자리를 잡고 있어, 부럽기까지 했다. 예전 이곳에는 김상헌의 형으로 병자호란 때 빈궁·원손을 수행해 강화도에 피난했다가 이듬 해 성이 함락되자 성의 남문루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순절한 김상용 선생의 순의비가 있었는데, 지금은 관청리로 옮겨졌다. 

이어 갑곶리에 소재한 '해운사(海雲寺)' 혹은 '진해사(鎭海寺)'로 불리는 작은 사찰로 갔다. 1682년(조선 숙종 8) 강화도에 설치한 금위영 소속 화주승 32명이 공사를 시작하여 완공한 절이라고 한다.

이 무렵 강화 해안에 43리의 외성을 정비하고 있던 중이라 승군들이 중심에 되어 세운 호국사찰이라는 의미에서 절 이름을 진해사로 바꾸었다. 이후 17세기 후반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1963년 절터에 작은 규모의 법당을 짓은 뒤 절 이름을 해운사로 바꾸어 오늘에 이른다.

강화도의 고려불상
▲ 고려불상 강화도의 고려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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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로는 대웅전과 요사 등이 있으며, 유물로는 고려 때 조성된 석불좌상이 남아 있다. 불상은 머리 부분이 심하게 파손되었다. 이 석불좌상은 강화에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고려시대의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작지만 의미가 있는 사찰이다.

아울러 인근에 있는 갑곶나루 근처에는 구한말 영국의 차관을 받아 세운 해군학교가 있었다. '통제영학당(統制營學堂)'이라고 불리던 이곳은 요즘으로 말하자면 해군사관학교다. 최근 해군사관학교에서는 이곳을 학교의 정식 역사로 포함시켜 학교의 역사를 늘리는 작업을 준비 중에 있다는 소문이 들린다.

이어 다시 버스를 타고는 불은면 오두리의 '강화전성(江華塼城)'의 흔적을 보기 위해 갔다. 날이 너무 더워 잠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서는 입에 물고는 줄줄이 이동했다. 난 너무 더워 남은 아이스크림을 한 개 더 먹었다. 배탈이 날지 모른다는 불안감보다는 더운 것이 더 힘들었다. 

강화
▲ 강화전성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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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쌓은 수원성보다 50년 이상 앞선다는 벽돌 성곽으로 잘 다듬은 돌을 쌓아 기초를 마련한 위에 벽돌을 쌓아올려 만든 성이다. 고려 고종 때 흙으로 쌓은 토성을 바탕으로 하여, 강화의 내성·중성·외성 가운데 강화 동쪽 해협을 따라 지어진 길이 11200m의 외성이다.

조선 영조 때 비가 오면 성의 흙이 빗물을 따라 흘러내렸는데, 청나라에서 번벽법을 보고 온 당시의 강화유수 김시혁이 나라에 건의하여 1743년(영조 19)부터 이듬해까지 벽돌로 개축했으며, 현재 남아 있는 성의 길이는 약 270m 정도이다.

부서진 구간의 일부는 동남아의 숲속에 남아있는 부처상처럼, 벽돌이 나무뿌리에 깊이 박혀있는 것이 눈물이 나도록 마음을 아프게 했다. 망한 조선의 서글픈 유산이여!

나무 속의 벽돌
▲ 강화전성 나무 속의 벽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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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강화도, #한국내셔널트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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