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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 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 김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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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은 이소선에게 가장 큰 상처를 남긴 해다.

사회적으로도 전태일 사건뿐만 아니라 그해는 유난히 사건과 사고가 많은 해였다. 정인숙 피살사건, 서울 마포의 와우아파트 붕괴로 33명이 죽고 19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 용두동 판자촌 532채와 마장동 판자촌 168채가 타버린 사건, 제주-부산간 여객선 남영호 침몰로 326명이 익사한 사건 등등. 이 많은 사건과 사고는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라기보다는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탐욕과 무능에서 비롯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1971년이 되었다. 전태일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민중들의 투쟁이 고조되었으며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정치·사회정세는 격동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청계피복노조는 끊임없는 탄압을 이겨내며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나가게 되었다. 중요한 활동으로는 우선 일을 해놓고도 임금을 못 받는 근로자들의 진정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근로자가 뼈 빠지게 일을 해놓고도 임금을 달라고 하면 사용주는 임금을 주지 않고 상습적으로 떼어먹는 일이 상당히 많았다. 이 같은 현상은 197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먼저 노조에 진정이 들어온 내용을 대표적인 것만 살펴보자.

아동복을 만드는 공장의 미싱사인 이아무개양(19세)은 월 1만 3천 원을 받기로 하고 1970년 1월 초부터 평화시장의 ㄷ사에서 일을 했는데 12월 중순 갑자기 사업주가 일감이 없다면서 해고시켰다. 그동안 밀린 임금 중에서 8천3백 원을 받았기 때문에 나머지 8천5백 원을 달라고 요구했다. 주인은 "오는 4월에 주겠다"라고 딱 잘라 말하면서 거절하는 것이었다. 여러 차례 사업주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지쳐 노동조합에 진정을 하게 되었다.

다음은 김아무개군(20세, 성동구 마장동)의 경우다. 평화시장 ㅅ상회에 재단보조로 월 1만 5천 원을 받기로 하고 1969년 10월에 취업했다. 작업 중 분실된 재단기를 물어주지 않는다고 1970년 1월 초 역시 해고됐다. 김군은 업주의 주장에 따라 불법으로 자기 집의 수색까지 받고 그 결백이 증명되어 밀린 임금 1개월분을 달라고 업주에게 요구했으나 해가 바뀌도록 주지 않자 노동조합을 찾게 되었다.

사업주들은 차일피일 시간을 끌면서 근로자들의 임금을 주지 않는다. 근로자들은 날마다 임금만 받으러 다닐 수도 없고 생계를 위해서는 할 수 없이 다른 공장에 취직해야 한다. 사업주들은 이 같은 근로자들의 약점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었다.

밀린 임금 호소하면 오히려 망신만 당하기 일쑤

밀린 임금을 받으러 가면 심지어 손찌검해서 내쫓는 사업주들도 많았다. 근로자들이 노동청이나 경찰서에 가서 호소해도 시간만 낭비하고 오히려 망신만 당하기 일쑤였다. 앉아서 당하는 꼴이었다. 그러나 노동조합이 생기면서 근로자들의 생각도 서서히 바뀌어 나갔다.

체불임금 처리와 더불어 중점적으로 활동해야 할 것은 주휴제 실시였다. 근로기준법에도 명시되어 있는 주휴제를 평화시장에서는 외면하고 한 달에 첫째, 셋째 일요일만 쉬게 한다. 매일 아침 8시 반까지 출근해서 밤 10시, 11시까지 일하고 일요일도 쉬지 못하니 기계가 아니고서야 견딜 수가 없다. 추석이나 설 대목(옷이 잘 팔리는 성수기) 때면 일주일이고 보름이고 공장 그 자리에서 먹고 일하고, 잠이라고는 하루에 잠깐씩 두어 시간 눈 붙이는 게 고작이다. 철야 작업에 매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살인적인 노동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는 우선 매주 일요일마다 유급휴일을 실시해야 한다. 조합간부들은 일요일마다 출근해서 주휴제를 실시하지 않는 공장을 찾아가 계몽과 설득을 하여 작업을 중단시킨다. 간부들의 활동을 무시하고 악질적으로 작업을 강행시키는 사업주는 조직적으로 응징하거나 고발 조치한다.

노동조합은 새해 들어 1. 시범공장 2. 건강진료소 3. 합숙소 4. 급식소 설치 등을 목표로 사업계획을 잡고 뛰었다. 시범공장은, 정부의 협조를 받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시범공장을 세움으로써 전반적인 근로조건을 개선해 보고자 한 것이었다. 건강진료소는 경한 환자에 대해서는 무료로 치료해주고, 열악한 작업환경과 고된 노동으로 인한 각종 직업병 환자를 조기에 값싸게 치료해주기 위한 복지의원의 설립을 계획한 것이었다.

평화시장에서는 막차를 타는 시간이 퇴근 시간이나 다름없었다. 밤늦게까지 일하던 여성근로자가 막차가 끊어져 공장으로 되돌아오다가 셔터는 내려져 있고 여관비가 없어 불량배들에게 욕을 당한 일도 있었다. 또 시골에서 올라와 셋방을 얻을 돈이 없어 공장에서 자취를 하는 남녀 근로자들이 작업장 위·아래층에서 기거하다 일어난 풍기문란도 더러 있었다. 노조에서는 이와 같은 유사한 사건을 방지하기 위해서 합숙소를 세울 계획도 마련했다.

급식소 설치는 끼니를 굶는 근로자들이 많아 이들을 위해서 아주 싼 값에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장소를 설치하려던 계획이었다. 지금은 잘 이해가 안 될지 모르나 당시는 끼니를 굶는 근로자들이 상당수 있었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장면
 영화 아름다운 청년 장면
ⓒ 기획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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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3천 원 받는 시다의 생활을 살펴보자.

서울 시내에 집이 있거나 기식할 곳이 있는 시다를 제외한 시골출신 시다는 세를 얻어 자취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주인의 양해 아래 작업장에서 먹고 자는 사람도 많았다. 집세는 몇 명이 어울려 집에서 가져온 것으로 낸다 치고 이들의 식생활만 보자.

공장이나 그 부근에서 거처하는 경우 교통비는 한 푼도 안 든다 치고 한 달에 연탄값으로 9백 원(사실은 더 든다), 한 달에 쌀 세말을 먹는다면 백 원씩 잡고 2100원은 꼭 들게 된다. 따라서 월급 3천 원은 부식 값도 남기지 않은 채 모두 써버릴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러니 반찬이 없거나 변변찮은 도시락을 차마 동료들 앞에서 먹을 수가 없어 도시락을 들고 인적이 없는 옥상으로 올라가거나 혼자 몰래 먹는다.

이것도 안 되면 아예 도시락을 싸오지 않고 공장 앞 어두운 복도 여기저기 있는 떡장수로부터 2~30원 어치의 떡을 사서 점심으로 허기를 달랜다. 신발값, 옷값 등은 아예 무시했을 때의 얘기다.

진료소 설치계획은 아프리의 의료기자재 지원과 메리놀회의 의약품 지원으로 동화상가 옥상에 '시장상가 근로자 복지의원'을 2월 21일 문을 열었다.


태그:#이소선,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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