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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와 간통을 하면서 왕을 암살하려던 승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서출지(사적 138호)
 궁녀와 간통을 하면서 왕을 암살하려던 승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서출지(사적 1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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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강족

단군 신화, 주몽 등 난생 설화, 김수로의 탄생, 경주 6부 선조들의 설화 등에는 그들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백제 시조인 온조만 예외) 즉 신형 무기로 무장한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을 정복한 세력은 자신들이 천강족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피지배 종족을 사상적(종교적)으로 제압했다. 따라서 강토가 크게 확장되고 여러 피지배종족을 거느리게되는 왕권 강화 이후의 임금들은 특정 종교를 국교화함으로써(사상 통일을 이룩함으로써) 일사분란한 통치를 도모하게 된다.
 
국민 각자가 다른 종교를 믿으면서 자기 부족의 시조를 천강족(天降族)으로 섬기면 장차 왕권과 신분사회에 도전하는 세력이 생겨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왕위 세습, 관료 제도와 신분 제도 정비, 율령 반포 이후 삼국의 왕들은 국민 사상 통일 작업에 착수한다.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 신라는 527년(법흥왕 14) 각각 불교를 공인(公認)하고, 백제도 384년(침류왕 1) 불교를 공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생(現生)에서 어떻게 살았는지가 후생(後生)의 삶을 결정한다는 불교의 업(業) 사상은 뒤집으면 전생(前生)의 삶이 현생을 결정했다는 논리였으므로 국민들에게 '왕이 곧 부처'라는 왕즉불(王卽佛) 사상을 전파하는 데 적격이었던 것이다.

아도가 신라로 들어와 처음 불교를 전파하여 제자로 삼은 이는 모례였다. 모례네 집의 우물로 전해지는 전모례정이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 360-4번지에 남아 있다. 문화재자료 296호.
 아도가 신라로 들어와 처음 불교를 전파하여 제자로 삼은 이는 모례였다. 모례네 집의 우물로 전해지는 전모례정이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 360-4번지에 남아 있다. 문화재자료 29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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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 불교가 전파되어 온 역사의 현장을 살피려면 구미 도개면 도개리 360-4번지 모례정(문화재자료 296호)부터 찾을 일이다. 모례정은 '신라 최초의 불교 신자' 모례가 사용한 우물[井]이라는 뜻이다. 물론 눌지왕(417∼458) 때의 우물이 아직도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는 데 대한 의문 때문에 모례정에는 '전(傳)모례정'이라는 공식 이름이 따로 정해져 있다. '모례의 우물로 전해진다'는 뜻이다(경남 산청 왕산의 전구형왕릉, 경주 보문동 428번지의 전설총묘 등).

모례정 다음으로는 구미 해평면 송곡리 403번지의 도리사를 찾아야 한다. 도리사에서 가장 볼 만한 것은 아도화상 사적비(경북 유형문화재 291호)와 극락전(유형문화재 466호), 그리고 고려 석탑(보물 476호)이므로 놓치지 말고 감상해야 한다. 다행히 이 셋은 도리사 경내에서도 한 곳에 몰려 있다. 이 사찰은  눌지왕 때 고구려 승려 아도가 일선군 모례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파한 후 세운 절로 전한다.

도리사는 아도화상이 처음 세운 절로,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 403번지에 있다. 사진은 아도화상 사적비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91호이다.
 도리사는 아도화상이 처음 세운 절로,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 403번지에 있다. 사진은 아도화상 사적비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91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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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집터 인근인 경주시 사정동 285-6번지도 꼭 찾아봐아야 할 불교 전래 유적지다. 이곳은 법흥왕이 오랫동안 신성시되어 오던 숲(천경림)의 나무들을 베어내고 사상 최초의 공인사찰인 흥륜사를 지은 역사의 현장이다. 물론 법흥왕의 불교 공인 정책에 귀족들이 크게 반발했다. 왕권(王權)을 신권(神權)으로 끌어올려 귀족들의 권력을 압도하려는 불교 공인 정책이 그들의 정치적 이해와 상반되었기 때문이다.

흥륜사 터의 정치적 의미
흥륜사
 흥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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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는 보통 '팔공산 동화사', '비슬산 유가사' 식으로 앞에 산이름이 붙고, 그 뒤에 사찰명이 붙는다. 이때 산이름은 절의 소재지를 가리킨다. 그런데 흥륜사에는 산 이름이 아니라 숲 이름이 붙어 있다. '천경림 흥륜사'.
이는 흥륜사가 산이 아니라 평지의 숲에 세워졌다는 뜻이다. 공주의 병을 치료해준 아도에게 미추왕이 소원을 묻자 그는 "천경림에 절을 짓고 싶다"고 대답한다. 물론 이때 아도가 지은 절은 건물이 웅장한 법당은 아니고 그저 움막 정도였던 듯하다. 사적 15호인 흥륜사는 법흥왕 때인 527년에 착공되어 진흥왕 때인 544년에 완공되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아도가 움막 형태의 절을 지을 곳으로 지목하고, 또 법흥왕이 불교 공인 이후 최초의 절터로 정한 곳이 천경림인 데에는 각별한 정치적 함의가 있다. 천경림이 신라 대대로 신성시되어 온 곳이었기 때문이다. 즉, 아도와 법흥왕은 천경림에 절을 지음으로써 새로운 사상을 신라사회에 정착시키는 기초로 삼으려 했다.
지금 흥륜사에 가면 숲은 볼 수 없고, 다만 이차돈 순교비를 본뜬 조형물이 경내 한복판에 우뚝 세워져 있어 이채롭다. 조형물을 세운 측에서는 틀림없이 이곳이 이차돈 순교지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불교 공인을 주장하던 이차돈이 처형될 때 목에서 흰 피가 솟는 이적(異蹟)이 일어난다. 그러자 귀족들은 반대를 멈춘다. 이차돈의 목은 소금강산 백률사 터로 날아가 떨어졌다. 뒷날 백률사 터에서는 신라 때(817∼818, 헌덕왕 9∼10년) 작품인 이차돈 순교비가 발견되었다. 이차돈 순교비는 국립경주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소금강산의 백률사를 아니 방문할 수는 없다. 역사여행에서는 언제나 현장이 중요하다.

백률사 대웅전 안의 이차돈 초상,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이차돈 순교비
 백률사 대웅전 안의 이차돈 초상,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이차돈 순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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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률사 입구에서 보게 되는 사면불상으로 보물 121호이다.
 백률사 입구에서 보게 되는 사면불상으로 보물 121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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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암살하려던 승려와 궁녀가 처형되는 492년(소지왕 14)의 서출지(書出池) 사건은 신라 왕실이 이차돈 순교(527년) 이전부터 불교를 신봉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렇지 않다면 승려가 궁궐 안에서 '왕의 여자'인 궁녀와 사랑을 속삭일 수는 없다. 지금쯤 서출지에 가면 승려와 궁녀의 비참한 말로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만발한 연꽃이 아름다울 것이다.

서출지 인근의 문화유산

서출지는 경주시 남산동 973번지에 있다. 서출지 바로옆에 있는 통일전은 무열왕, 김유신, 문무왕의 비석, 통일 기록화 등 많은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기념관이다. 서출지에서 곧장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남산동 1130번지의 염불사 터(사적 311호)가 나오고,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경사가 얕은 등산로를 오르면 국보 312호 칠불암 마애불상군을 볼 수 있다. 이름 그대로 일곱 부처가 사방으로 바위에 새겨져 있다. (따라서 칠불암은 암자 이름이 아니다. 일곱 부처가 새겨진 바위를 뜻한다.) 그런가 하면, 칠불암 뒤편 절벽 위로 올라가면 보물 199호인 신선암 마애보살상을 보게 된다. 남산에서 가장 멋진 토함산쪽 전망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물론 신선암도 암자 이름이 아니라 바위명이다.




태그:#이차돈, #도리사, #백률사, #흥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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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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