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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 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 김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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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얼마동안 집안에서 일을 하는가 싶더니 또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술에서 벗어나기는 애진작에 틀린 사람인가 보다. 술을 마시면 슬금슬금 집안을 불안 속에 빠뜨렸다.

이소선은 주인집에 여러 가지로 미안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이 없다고 했는데 한꺼번에 네 명이나 생겼으니 주인이 뭐로 볼 것인가. 이소선은 아이들한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태삼이,순옥이,순덕이 등 어린애만 셋이었다. 아이들에게 밖에 나가서 놀거나 화장실에도 가지 말고 방안에 조용히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눈치가 여간 빠른 게 아니었다. 볼 일이 있거나 화장실에 갈 때면 한 명씩 조용히 나갔다가 들어왔다.

어느 날 주인 아주머니가 이소선에게 물었다.

"아주머니 애들이 몇이나 되요?"

이소선은 주인에게 숨긴 것을 미안하게 생각해오고 있던 터여서 부드럽게 대답했다.

"미안합니다, 아주머니 방을 구할 수 없을까봐 제가 거짓말을 했습니다. 어린애가 셋이 있어요. 애들이 없는 것처럼 조용히 시키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애들이 많다고 그러는 게 아닙니다. 애들을 그렇게 방안에 가두어 놓고 키워서야 되겠습니까. 보통 애들처럼 까불거나 장난도 치지 않고 참으로 착한 애들이군요. 이제부터는 마음대로 밖에서 놀게 하세요."

주인아주머니는 상당히 너그러운 마음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전태일은 평화시장에 취직 하기 전에 구두닦이, 신문팔이, 껌팔이 때로는 우산 장사 등 뭐든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열심히 했다. 그런다가 1965년 봄경, 평화시장에 시다로 취직했다.

남산동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갈 무렵인 1966년에 이소선 가족이 살고 있는 동네에 큰 화재가 났다. 그 화재로 그동안 힘겹게 장만한 세간살이며 재산이 몽땅 타버렸다. 이소선의 충격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소선은 그때 충격으로 눈이 멀어 버렸다. 그동안 시력이 좋지 않았었는데 화재가 나자 완전히 앞이 보이지 않았다. 화재를 당한 이재민들은 남산국민학교에 수용이 되어 적십자사에서 마련해준 천막 하나에 두 가구가 생활을 해야 했다. 맨몸뚱이만 남아 있는 처지에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약을 먹거나 치료를 받을 형편도 아니었다.

"태일이 어머니, 나 따라서 교회에 나가보자고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면 눈이 떠 질 거야."

평소 친하게 지내던 쌀집 아주머니가 말했다.

"교회는 무슨 교회예요. 나는 내가 모시는 신장님이 계시는데 신장님이 노하시면 어떻게 해요."

이소선은 이전부터 친정어머니가 가르쳐준 신을 집안에 모셔놓고 섬기고 있었다.

"태일이 엄마 그래도 내 말 한 번 들어봐 하나님이 기적 같은 은혜를 베푸실 거야. 지금 상황에서 돈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정성으로 기도를 하면 눈을 뜰 수 있을 거야."

쌀집 아주머니는 이소선의 거절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간절하게 설득했다. 이소선은 믿어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쌀집 아주머니가 저렇게나 간곡하게 말씀하시니 그 아주머니의 정성을 봐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쌀집 아주머니의 정성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그 아주머니를 대접해 드린다는 생각으로 나가던 교회를 여러 번 다니면서 진지하게 기도를 올리게 되었다.

"하나님, 저에게는 어린 자식들이 넷이나 있습니다. 저 어린 자식들을 돌봐야 하는데 이렇게 앞이 보이지 않으면 저 어린 자식을 누가 돌보고 키우겠습니까. 부디 제 눈을 뜨게 해 주셔서 어린 자식들을 돌보게 해 주십시오."

이소선의 이런 기도는 차츰 차츰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소선은 앞이 전혀 보이지 않던 눈이 차츰차츰 보이기 시작했다. 이소선은 더욱더 열심히 기도를 했다. 이소선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눈을 뜨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소선은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이소선뿐만 아니라 식구 전체가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남산동 화재민이 모여 마을 이룬 곳... 도봉구 쌍문동 208번지

남산동 화재민들은 무허가 판자촌이 철거되어 그 곳에서 살 수가 없게 되었다. 이소선의 가족은 미아리로 갔다가 거기에서도 살 수가 없어서 도봉산 기슭의 공동묘지 근처에 판자집을 지어서 그곳으로 옮겼다. 그 당시에는 도봉산까지 가는 버스가 없어서 미아리 종점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거기서 내려 한 시간 남짓 걸어서 가야 공동묘지 근처가 나왔다.

이 도봉산 공동묘지 근처에 전태일이 직접 판자로 집을 지어서 이사를 한 것이다. 화재민들이 한 집 두 집 모여들어서 자연히 마을을 이루게 된 곳, 여기가 바로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 208번지다.

도봉구 쌍문동 208번지 일대 판자촌
▲ 이소선의 가족이 살던 동네 도봉구 쌍문동 208번지 일대 판자촌
ⓒ 전태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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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이 직접 지은 판자집
▲ 이소선의 집 전태일이 직접 지은 판자집
ⓒ 전태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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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 기슭으로 옮긴 이후 거쳐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다. 전태일은 평화시장에서 노동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친구들을 이 집으로 많이 데려왔다. 좁은 집에서 많은 친구들과 모임을 하다 보니 방이 좁아서 태일이는 무허가 집의 방을 점점 더 넓혀갔었다.

이소선의 남편 전상수는 지병을 앓다가 1969년 6월 사망했다.

덧붙이는 글 | "3.밑바닥 인생" 끝. "4.너의 분신 우리들의 터전" 이어집니다.



태그:#이소선,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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