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위는 오는 16일 '영화 속 언어표현 개선 토론회'를 개최한다.

영등위는 오는 16일 '영화 속 언어표현 개선 토론회'를 개최한다. ⓒ 영상물등급위원회


올 초, 케이블 TV의 과도한 묵음처리에 대한 글(누가 '신세계' 황정민의 입을 막았나)을 썼다. 당시 OCN은 영화 <신세계>를 방영하면서 욕설, 흡연, 폭력 장면에서 블러 처리(화면을 희미하게 처리하는 것)를 하고, 칼을 휘두르는 장면에서는 사운드를 줄였으며 영화의 원 색상까지 어둡게 조절하는 자체 가위질을 선보였다. 심의에 과도하게 충성한 결과였다.

당시 '가위질의 신세계'란 표현을 쓴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 사실 2008년 6월 개정된 방송통신심의위원회규칙은 지금껏 변함이 없다. 제26조(생명의 존중),  제28조(건전한 생활기풍), 제36조(폭력묘사), 제38조(범죄 및 약물묘사) 모두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거나 "상세히 묘사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언제나처럼, 법령과 법규는 사회적인 통념이나 현재의 분위기에 휩쓸려 해석될 여지가 다분하다. 2008년엔 문제시되지 않았던 규칙이 2014년엔 스스로 가위질을 해야 하는 '자기검열'을 작동시켜야 하는 규제로 작용하고 있다.

헌데 이러한 자기검열이 영화 상영이나 방영 시점이 아닌 예술가, 창작자들의 창작 시점에서 작동된다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개XX'는 '소새끼'나 '개나리'로, '씨X'을 '신발'로 바꾸어야 하는 걸까. <신세계> 속 정청의 명대사인 "브라더"도 "형제여"로 바뀌었을지 모를 일이다.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발상을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가 하고 있는 모양이다. 영등위는 오는 16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영화 속 언어표현 개선 토론회'라는 제목의 세미나를 열 예정이다. 헌데 실로 어처구니없는 이유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영화 속 언어표현 개선 토론회' 주최하는 영등위, 어이없다

 영상물등급위원회 현 박선이 위원장의 인사말

영상물등급위원회 현 박선이 위원장의 인사말 ⓒ 영상물등급위원회


"최근 청소년의 욕설 사용이 일상화되고 영화의 욕설과 비속어 사용 등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에 영화 속 언어표현 실태와 등급분류 기준 적용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교류하여 영화 속 언어표현에 대한 바람직한 방안을 모색하고자 하오니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영등위가 내놓은 토론회의 취지다. 가장 의아한 점은 발제자와 토론자다. 영등위는 영화계, 청소년 단체, 일반 시민 등이 토론회에 참석한다고 밝혔다. 발제자는 윤영민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와 노영란 영화등급분류소위원회 위원이다.

토론자로는 신강호 대진대 연극영화학부 교수, 김시무 영화평론가, 이경화 학부모정보감시단 대표, 이현숙 (사)탁틴내일 대표가 이름을 올렸다. 참 기이하다. 어딜 봐도 영화감독, 제작자, 시나리오 작가, 스태프 등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언제부터 영화계를 연극영화학부 교수나 영화평론가가 대변했나.

현장 기자보다도 업계의 중심에서 떨어진 직종이 교수요, 평론가다. 그들은 영화 속 언어가 창조되는 현장보다 이미 만들어진 텍스트를 분석하고 비평하며 학생들을 위해 가르치는 일을 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과 청소년 단체 대표들의 토론이라니, 청소년에게 끼칠 일부 영화 속 욕설이나 표현에 대한 성토의 장이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문자 그대로의 탁상공론 말이다. 먼저 개선해야 할 것은 탁상공론에 국민 세금을 쏟아 붓는 영등위의 어이없는 행태가 아닐까.

블러처리 당한 <님포매니악 볼륨1> 포스터가 어이없는 이유

 블러 처리된 영화 <님포매니악>의 국내 포스터

블러 처리된 영화 <님포매니악>의 국내 포스터 ⓒ 무비꼴라쥬


영등위는 영화 등급분류 기구다.(물론 '심의기구'란 오명은 그대로지만) 영화의 본편과 예고편, 포스터 등의 등급을 분류하는 일이 주업무다. 업무도 등급 분류 관련으로 한정돼 있다. 이러한 토론에 영등위가 나설 일인지 의문이다. 혹여 문화관광부가 있지도 않은 의무를 등한시한다는 판단에 본보기라도 보여주기 위함일까. 

사실 영등위의 불협화음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영등위가 이명박 정부 이후 '청소년 보호'를 명목으로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방향으로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 영화계 안팎의 일관된 평가다.

"한두 번도 아니고 영등위의 행태는 봐주기 정말 어렵다. 이건 행패고, 폭력이다. 마치 그들이 도덕의 기준을 독점하고 있는 듯 행동한다. 그들은 위임 받은 권한 이상을 휘두르고 있다. 모든 영화는 관객 앞에서 공개될 권리를 가진다. 가져야 한다. 등급제가 필요한 이유는 미성년자 때문이다. 영등위는 그것만 판단하면 된다."

최근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은 남기웅 감독의 영화 <미조> 사태에 대한 김경형 감독의 일성이다. <미조>는 일본에서 하반기 무삭제 버전으로 개봉이 확정됐지만, 국내에서는 영등위의 제한상영가 판정으로 인해 현재 국내 관객이 볼 기회는 박탈당한 상태다. 제한상영가 판정을 남발하는 영등위에 영화인이 비판의 목소리를 내온 지도 오래 전이다. 현실적인 대안 마련은 등한시 한 채 제한상영가 판정만 남발하는 것은 위원회나 영화계 모두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기에 영등위는 포스터 심의까지 강화해가고 있다. 키스 장면이 노출됐다고 심의가 반려된 영화 포스터가 한둘이 아니다. 19일 개봉을 앞둔 <님포매니악 볼륨1>이 대표적인 사례다. 문제시된 화면을 블러처리한 후 '제한상영가' 낙인에서 탈출(?)한 <님포매니악 볼륨1>은 그러나 국내 최초로 공식포스터가 블러처리 당하는 굴욕을 맛봤다. 국내 관객은 샤를로뜨 갱스부르, 샤이아 라보프, 우마 서먼 등 뿌옇게 처리된 유명 배우들의 얼굴을 포스터로 확인하는 과잉보호를 받은 셈이다.

'해묵은'이란 표현이 어울릴법한 제한상영가 논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소중한 예술가의 창작물을 국내 관객에게 선보일 수 없는 기이한 이 제도적 장치는 영등위의 무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무기를 전가의 보도로 휘두르는 등급 분류 기관이 이제는 창작에까지 영향력을 미치려고 하고 있다. '영화 속 언어표현 개선 토론회'라는 <개그콘서트>에나 나올 어처구니없는 제목으로 말이다.

한국의 영화인, 창작자, 그리고 성인 관객을 모두 훈육이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영등위여, 부디 <개콘> 버금가는 개그는 그만하시고 그 가위 내려놓으시라.

영등위 님포매니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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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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