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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일본 국가와 민중의 책임/저자 : 야마도 쇼지, 역자 : 이진희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일본 국가와 민중의 책임/저자 : 야마도 쇼지, 역자 : 이진희
ⓒ 이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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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23년 9월 1일 정오께 일본 관동(간토)지방에서 지진이 발생했다. 점심시간이 임박한 시각이었기 때문에, 이날 지진 피해 지역에서는 대형화재가 일어났다.

점심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각 가정집과 식당에서 불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지진이 일어나면서 목재로 만든 건물에 불이 옮겨 붙었기 때문이다. 당시 지진은 10분 정도 지속되었는데 도쿄, 요코하마 등에서 10만 명~14만 2000명 이상이 사망했고 3만 7000여 명이 실종됐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이었다. 흉흉해진 민심을 추스르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한 일본 정부는  각 경찰서에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내용의 문서를 보냈다.

하지만 이 내용은 언론에 보도되면서 조선인들이 테러를 저지르려고 한다는 유언비어가 확산됐다. 이후 일본 민간인들은 자경단을 조직해 조선인으로 보이는 이들을 보면 가차 없이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피살된 조선인은 6000명~2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1월 한국 정부는 '일본 관동대지진 피살자 명부'를 공개했다. 그리고 지난 4월 7일  여야 103명의 국회의원이 '관동(関東)조선인 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 법안'을 공동 발의했다.

미국 이스턴 일리노이 대학교 이진희 교수는 이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 전문가다. 그는 그동안 이와 관련 다수의 연구논문과 자료집 다큐멘터리 등을 제작했다. 지난해 9월부터 지난 5월초까지 미국 전역 10개 대학교에서 '관동 학살 기록영화 상영회와 토론회'를 주관했다.

다음은 며칠 동안 이 교수와 나눈 이메일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목숨 걸고 진상규명한 재일동포들"

- 1923년 9월에 일어난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 발생 뒤 90년이 지난 지난해 11월 정부가 피해자 명부를 공개하고 국회에서 관련 법안이 발의됐다. 피해자 명부 공개와 법안 발의가 너무 늦은 건 아닌가.
"나라와 땅을 빼앗긴 조선인들은 살 길을 찾기 위해 현해탄을 건너 막노동 등 일자리를 찾았다. 그런데 1923년 9월초, '대지진'이라는 재해를 겪게 됐고 살아남았다고 생각한 순간, 유언비어와 분풀이, 조롱,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한 달도 채 안 지난 시점에 아수라장이 된 이곳을 찾은 한인들이 있었다. 그들이 시체 썩는 냄새와 살기가 가득한 조선인 학살 피해지로 들어간 이유는 동포 학살 실태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지만, 그들은 용감했다.

그 결과, 1923년 12월 5일자 상해임시정부 <독립신문>에는 '재일동포 피학살 진상조사회' 조사 결과가 실렸다. 1923년 10월말까지의 1차 조사결과와 1923년 11월 중순까지 추가 집계된 학살자 수를 더하면, 적어도 6661명이 학살되었다고 했다. 임시정부와 한인 청년들의 즉각적인 조사와 결과 발표는 동포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 당대 한인들의 의지를 잘 보여준다. 충격적인 대학살 사건 이후 많은 한인들이 독립운동의 열정을 더더욱 불태우게 됐다.

지난 2013년 6월 주일한국대사관 건물 이전을 기해 발견된 '학살피해자 조사명부문서'는 이러한 임시정부 때부터 학살실태에 대한 조사노력이 이어지고 있었다는 맥락에서 볼 수 있다. 학살 직후 조사된 기록은 학살지와 피해 인명수가 중심이었다. 그래서 피해자의 이름과 고향까지는 발표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발표의 근거가 된 원자료에는 반드시 피해자 이름과 출신지에 대한 정보가 어느 정도 있을 것이라 믿어왔다.

이 문서는 1950년대 초에 정리된 것으로 보이는데, 임시정부 당시 시작된 진상규명 성과를 반영하는 것은 물론 학살실태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기록을 남기고자 했던 노력으로 보인다. 정부는 이 귀한 자료를 연구자들에게 공개해 진상규명에 박차를 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일부지만 피해자 이름과 나이, 출신지, 학살지가 적힌 서류가 발견된 마당에 소극적 자세로 임한다면 선조들에게 후세들에게 부끄럽지 않겠는가."

이진희 교수
 이진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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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한국 정부가 학살사건에 대해 일본 정부에 진실 규명을 요구한 적이 있었나?
"1960~70년대 한국정부는 냉전구도 속에서 북한과 대치하면서 남측 정권의 정당성을 강조하는데 용이한 역사연구 사업을 주로 해온 측면이 있다. 이는 북한이 조총련을 매개로 일본 내 한인 동포에 대해 각종 지원 사업을 벌이는 것은 물론, 귀국운동까지 펼치던 것과 대조적이다. 한국 정부는 재일동포 관련 연구지원에 소극적이었다.

그동안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과 연구는 일본의 재일사학자와 양심적인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해 주도됐다. 일본 조총련계 조선대학교에서 근무했던 고 금병동 선생을 비롯해, 재일 사학자인 강덕상 선생, 그리고 실천하는 지식인 야다마 쇼지 선생이 그들이다. 이들은 일본관헌은 물론 학살에 대한 기억과 증거를 지우고자 하는 일부 사람들과 맞서며 반세기에 걸쳐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출판했다.

그러나 최근 일본 내 우익세력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일부 일본교과서에서 '학살'이라는 단어가 누락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1978년을 기점으로 80년부터 거의 모든 교과서가 이 사건에 대해 정확하진 않더라도 다루기 시작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피해자의 나라 한국의 교육이 훨씬 뒤쳐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진 학살을 체험한 함석헌 같은 분들의 회고록이 <씨알이 소리>나 <사상계> 같은 잡지 등을 통해 끊임없이 상기되어 왔다. 특히 1980년대 초 일본 내 역사교육자 단체 등이 주도해 진행된 학살 피해자 유골 발굴과 목격자 청취조사 움직임 등도 서서히 한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1980년대 말 1990년대에 들어서 한국 내에서도 진상규명을 향한 연구와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학살 80주년(2003년)과 90주년(2013년)을 계기로 한국, 일본, 재일동포들의 관련 교류가 늘었다. 올해 5월에는 과거 실패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 연구자들과 시민단체들이 자국정부를 상대로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한국에서도 2000년대 후반부터는 시민운동의 양상을 띠며 관심을 받고 있다. 지난 2013년 명부가 공개되면서 학살 유가족을 찾고 실태조사를 진전시킬 수 있는 실마리가 생겼다. 관련연구와 시민운동은 더더욱 활발해질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귀한 자료가 아직 정부 관리 하에 있어 연구자들이 쉽게 볼 수 없다.

이러한 자료가 더 일찍이 공개되었다면 지금쯤은 그 진상이 더 많이 밝혀졌을 것이다. 부디 실태조사와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 법안 발의를 계기로 한일 양국 내 관련 연구가 더욱 진전되었으면 한다."

"관동 학살 피해자 수 6500명 남짓이 가장 신빙성 있어"

- 일본학계나 사회에서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에 대한 구체적 활동이 있었나?
"일본정부는 '재일동포피학살진상조사회'의 결성 자체를 허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학살 사실과 사체 유골을 감추기에 급급했다. 때문에 도쿄조선유학생학우회, 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 재일천도교청년회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이 첫 진상규명 단체는 이름조차 '위문회'로 고쳐야 했다. 최승만, 한현상 등 당시 조사에 나섰던 한인들이 진상조사과정에서 경험했던 위험과 충격은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한인 청년들은 발로 뛰며 조사하고 사체를 찾아다니면서 관헌에 항의했다. 당시 상해임시정부는 이들과 더불어 비밀리에 조사인원을 파견하고 후원금을 모으고 항의 격문을 배포했다. 또 유럽, 미국 등 해외에 일본의 참혹한 만행을 알리고자 했다. 이로 인해 외국에 학살실태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혼란중에 발생한 일이니, 일본의 재건을 돕는 차원에서 묻어 달라'고 부탁했다."

- 1923년 당시 한인유학생이었던 함석헌도 학살 현장을 직접 목격한 뒤, 50주기를 맞는 지난 1973년 <씨알의 소리>에 "(1923년) 조선인학살사건으로 수천 명이 일본인의 손에 죽었다"라고 증언한 바 있다. 조선인 피해자 수는 정확하게 파악된 상태인가.
"도쿄 가메이도의 학살 등과 같이 관헌 주도의 대규모 학살이 이루어진 경우, 사체를 한꺼번에 모아 태우거나 강둑에 암매장하는 등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했기 때문에 정확한 피해자 수를 조사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2000~3000구 정도의 사체는 유해가 발견됐고, 상당히 구체적인 증거도 있어 조사된 바 있다.

당시 관동 내 한인 인구(적어도 2만 명)와 이후 보호 명목으로 수용된 인원, 식민지 조선으로 돌아간 인원 등을 차감한 수 중 1/4만 학살당한 것으로 계산해도 6000명을 웃도는 결과가 나온다.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인구통계를 감안할 때 <독립신문>에 발표되었던 6500명 남짓이 가장 신빙성 있다고 보고 있다. 당시 관동에 있었던 외국인 목격자들의 기술에도 희생자 수가 4000명은 넘는다는 기록들이 있다."

- 현재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관련 특별법 추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추진위원으로 활동하게 된 계기는 뭔가. 
"추진위의 활동은 출범식(5월 26일)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추진위에 참여하는 연구자들은 관련분야에 대해 오랫동안 공부해 오신 분들이다. 나 또한 일본과 한국 내 관련 사료관에서 연구·조사하면서 혹은 관련 주제 학술회의나 집회 등에 참여하면서 그분들과 알게 됐다. 공통 목표는 사건의 진상규명에 있다. 이 분야의 사료를 발굴하고 연구해온 한 사람으로서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데 협력하고자 한다."

지난해 12월 UCLA 대학에서 연 관동 기록영화 상영회
 지난해 12월 UCLA 대학에서 연 관동 기록영화 상영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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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사건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입장은 뭔가. 아직도 책임을 부인하고 있는 것인가?
"일본 정부가 책임져야 할 것은 관헌의 공식 루트를 통한 유언비어 유포, 민중에 의한 학살 유도, 군대와 경찰을 통한 학살 주도 외에 사체유기, 사실 은폐, 거짓 조선인 폭동 조사 등 셀 수 없이 많다. 어쩌면 이미 인정하고 뉘우치기에 무척 버거운 것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작은 규모지만 일본 내에서 간간이 이어져 온 학살피해자 추모행사는 주로 학살을 목격했던 일반시민들이 주도한 것이었다.

물론 정부가 학살직후 분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민중이 저지른 학살에 대해 형식적이고 기만적인 형태로 추모 행사를 지원한 경우도 몇 번 있었다. 하지만 이는 조선인 학살의 진실을 밝히거나 뉘우치려는 의도가 아니라, 반정부 감정을 잠재우려는 행사들이었다. 일본 정부는 1923년 이래 100년 가까이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부인해왔다.

최근 일본 시민단체들이 일본인 5000명의 서명을 받아 일본 정부에 진상규명 촉구하는 청원을 내기도 했다. 이렇게 이 사건은 현재 일본에서도 진행 중이다. 일본사회의 우경화와 재일동포에 대한 탄압이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시민사회에선 이런 일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본인들의 활동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한국측도 적극 지지하고 협력할 필요가 있다."

- 2000년께부터 관동조선인학살관련 연구와 조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동안 느낀 점은 뭔가. 또 가장 충격적인 순간은 언제였나.
"일본군 성노예제도, 강제연행, 독도침탈 등 이미 알려진 주요 현상과 사건에 대해 더욱 구체적이고 철저하게 검증해 이 사건들의 의미를 세계사에 남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왔다. 이를 위해 1990년대부터 일제 강점기 당시 사료들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님 웨일즈가 김산과의 만남을 계기로 저술한 책 <아리랑>과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가 된 일본 황족 이방자의 회고록에 드러난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내용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이후 지난 2000년, 연구조사차 일본에 머물던 중 요코하마 사료관에서 관련 1차 자료들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정부 측 자료에는 모순과 은폐의 흔적이 역력했다. 실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 일본 문부과학성, 동경대학교, 국립역사연구박물관 등의 연구협력으로 일본 내 관련 사료들을 수집해왔다. 그러나 일본 사료관 내 보존 자료만으로는 한인들의 체험에 근거한 사실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연거푸 경험했다. 따라서 일본재야에 존재하는 증거와 한국 내 자료를 적극 발굴해 연구를 진전시켜야 한다는 확신 하에 이 사건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연구과정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극심한 통제와 탄압에도 수십 만 증인들이 남긴 기록이 남아있다는 점이었다. 권력자들이 아무리 은폐하려고 해도, 역사의 진실은 감출 수 없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정연규를 비롯한 당시 학살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 이들의 글은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형식을 띨 수밖에 없었는데도 행간에서 진실이 느껴진다. 학살 당시 일본 어린이들이 남긴 기록에는 조선인에 대한 미움이 드러나는 것들도 많다. 반면 관헌의 책임이 분명한 장면을 목격한 어린이들이 보고 들은 대로 솔직히 기록한 것들도 있다. 그래서 역사에서 완전범죄가 존재하기 어려운 것 같다."

"일본인 대신 사과하고 싶단 일본 학생도 있어"

- 미국사회에서도 그동안 관동조선인학살사건에 대한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안다.
"관동 조선인 대학살 90주년을 계기로 지난 2013년 9월부터 2014년 5월 초까지 미국의 여러 대학교 등에서 관동 학살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상영회와 강연, 심포지엄 등의 행사를 약 10회에 걸쳐 진행했다. 이 사건에 대한 미국 내 연구서들은 주로 일본 내 자료에 근거한 일본학 전공 학자들에 의한 것이었다. 대부분 실제 사료에 근거한 분석이라기보다 일본에서 지진을 계기로 유언비어에 근거한 타민족 학살이 있었다고 지적하는데 그치고 있다. 사건의 맥락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나 사실 정립 없이 인종차별의 한 예라는 차원에서만 가볍게 다루어온 경향이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미국 내 상영회와 토론회 등을 주관해왔다. 미국인들 중엔 지진 직후 일본인들을 해치기 위한 조선인의 폭동이나 방화 등이 실제로 있었는지 궁금해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일부 조선인들의 잘못 때문에 그런 유언비어가 시작된 것 아니냐는, 그러니 일부 학살은 당연한 결과 아니냐는 식의 반응도 적지 않았다."

- 일본 대학생들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을 잘 모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에 대해 알게 된 일본 학생들의 반응은 어떤가. 
"재미 일본유학생들이 수업을 통해서나 기록영화 상영회 또는 강연을 통해 이 사건의 실제 내용을 접하면, 우선 놀란다. 일본교과서에 표기는 하지만, 대부분 일본학생들은 배운 기억이 없다. 있다고 해도 자연재해 후 혼란이 빚어졌고 유언비어가 퍼져 일어난 불행한 작은 해프닝으로, 일부 민중에 의해 한인이 좀 다쳤다는 수준으로 기억하고 있다.

학생들은 이 사건이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일어난 민관군 공동 학살이었다는 사실에 놀란다. 그리고 자신이 왜 이에 대한 역사교육을 받지 않았는가에 대한 '배신감'을 표현하기도 한다. 일본군 위안부나 강제연행, 독도문제 등에 대해 알게 됐을 때도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그 중에는 일본인을 대신해 한국인에게 사과하고 싶다고 하는 학생도 있었다. 이런 학생들을 볼 때마다 일본 전 세대와 현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들에게 큰 부채를 넘겨주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이진희 교수
 이진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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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이 사건에 대한 최초의 영문 자료집을 준비 중에 있는 것으로 아는데...
"지난해 가을 90주년을 기해 주관한 미국 내 10개 주요 대학·학회에서의 관련 학술행사를 계기로 이 사건에 관심을 보이는 미국 내 연구자들과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를 계기로 주요 1차 사료를 영어로 번역해 영어권 학자들과 학생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수업시간에 이 사건을 둘러싼 정황과 개요를 소개할 수 있도록 이 주제를 다루고 있는 당시의 문학작품들도 번역하기로 했다. 현재 7~8명의 학자가 함께 준비중이고 오는 9월 자료집 준비 상황을 중간 점검하기로 했다."

- 재미 학자 입장에서 한국정부에 제안하거나 바라고 싶은 것이 있다면?
"100년이 다되어 가는 시점에서 아직도 세계 각지의 연구자들이 유언비어를 그대로 아니면 어느 정도 사실로 믿고 있다. 이 사태를 만든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학살 피해자 대다수는 노동자 농민이었다. 이들은 생활기반을 빼앗긴 뒤 막노동을 하려고 일본으로 건너가 부모형제 자식들을 그리워하면서도 열악한 환경에서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이들은 폭동, 강간, 방화의 누명을 쓰고 보복을 받아 학살을 당했다. 학살 진상규명과 당시 일본정부의 책임, 그리고 이를 왜곡하고 묻어온 전후 일본정부의 책임을 반드시 밝혀야 한다.

일제 강점기 연구는 감정이나 말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라도 남아있는 자료를 적극 발굴하고 공개하고 보존해야만 진정한 성과를 낼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 내 자료의 적극적인 수집, 보존, 이용을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 또 한국정부가 일본정부와 학계에 관련 자료를 청구하는데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특히 한국정부가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이나 시민단체 활동을 적극 지원하고, 그 연구 과정이나 결과를 국내 정치 목적으로 이용한다거나 조건부로 지원해서는 안 된다. 긴 안목으로 한국학을 지원해나갈 때 도덕적 주도권을 인정받는 한국, 그리고 한국의 학문연구 풍토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이진희 교수는 누구?

이진희 교수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어과 졸업.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학 석사 및 박사(일본제국주의사 전공). 현재 미국 Eastern Illinois University 사학과 교수 및 동양학 과장. 일본 동경대학교, 문부과학성, College Women's Association, 국립민속역사박물관 Research Fellow 역임.

학술지 아세아 연구 "관동대지진을 추도함: 일본 제국에 있어서의 '불령선인'과 추도의 정치학" (2008), Studies on Asia, "Malcontent Koreans (Futei Senjin): Towards a Genealogy of Colonial Representation of Koreans in the Japanese Empire" (2013), 역서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일본 국가와 민중의 책임 (야마다 쇼지 저) 등 간토 조선인 학살 관련 연구 논문, 자료집, 전시 안내문 다수 저술 및 번역.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지원 하에 관동 조선인 학살 관련 최초 영문 자료집 및 독도 관련 사료집 준비 중.



태그:#관동대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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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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