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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특징 하나가 때때로 그 사람을 기억하게 한다. 도시나 마을도 마찬가지. 어처구니없는 기억 한 조각이나 사소한 풍경 하나가 그때를 불러낸다. 때론 부분이 전체보다 힘이 세다. 그런 조각들로 도시를 여행하려 한다. - 기자 말

요즘 아파트는 흔히 대단지아파트를 가리킨다. 한 아파트 단지에 몇 천 명 또는 몇 만명이 살기도 한다. 사진은 전시 '아파트인생'의 단지아파트 미니어처.
 요즘 아파트는 흔히 대단지아파트를 가리킨다. 한 아파트 단지에 몇 천 명 또는 몇 만명이 살기도 한다. 사진은 전시 '아파트인생'의 단지아파트 미니어처.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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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를 전후로 태어난 아파트 키드에게 '아파트'는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고향이다. 그들에게 유년시절 아파트는 놀이공간이자 탐험지대였다."(전시 '아파트인생' 팸플릿 중)

57.6%. 우리나라 전체 주택에서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율이다. 이제 우리네 삶에서 아파트를 떼놓고서는 생각할 수 없다. 서울역사박물관이 마련한 '아파트 인생'(3월 6일~5월 6일)은 우리 삶 속에 깊숙이 들어온 아파트를 조명한 전시다. 초창기 아파트 내부와 외부를 재현해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관람객을 그때로 안내한다. 일반주택을 떠나 아파트에 정착한 사람들이 남긴 사연을 엿보다 보면 아파트가 건물 그 이상으로 다가온다.

전시를 보면서 기억은 1980년대 초반으로 되돌아갔다. 어머니의 사촌친척이 창원(통합시가 되기 전 창원, 아래 창원은 옛 창원을 가리킴)으로 이사했다. 내겐 이모뻘이었다. 창원행은 처음이었다. 빽빽이 들어찬 단지아파트를 본 것도 처음이었다. 똑같이 생긴 집들이 일렬종대로 늘어선 모습은 낯설고 불편했다.

길과 집이 모두 다른 주택가 동네에서 살다가 처음으로 대단지아파트를 만났을 때 느낀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지금이야 동과 호수로 표시되느 아파트는 찾기 쉬운 구조라고 하겠지만, 처음 접했을 때는 정반대로 느꼈다.
 길과 집이 모두 다른 주택가 동네에서 살다가 처음으로 대단지아파트를 만났을 때 느낀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지금이야 동과 호수로 표시되느 아파트는 찾기 쉬운 구조라고 하겠지만, 처음 접했을 때는 정반대로 느꼈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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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들어간 뒤 어머니가 우유 심부름을 시켰다. 아파트 입구 상가에 가서 우유를 샀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이모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모두 똑같았다. 그전까지 집은 몇 번째 골목인지 찾은 다음, 몇 번째 집인지 고르면 됐다. 길은 모양이 다 달랐고, 집 모양 또한 달랐다. 형태를 기억해 집을 찾았다.

하지만 폭이나 길이가 똑같은 길, 집모양이나 색깔이 무한반복인 단지아파트에서 형태기억능력은 무용지물이었다. 못을 박아야 하는데 칼을 든 꼴이었다. 그 시절 이모 얼굴도, 집 내부도, 아파트 이름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멘붕'에 빠진 기억만 뚜렷하다.

아파트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던 상황이었으니 동이나 호수를 아예 외우지도 않고서 집을 나섰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얻을 수도 없었다. 꽤 긴 시간이 흘렀다. 어머니가 나와서 찾아내지 않았다면 아마 하염없이 그 자리만 맴돌았을 것이다.

내게 단지 아파트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각인됐다. 아파트와 창원이란 도시에 대한 거부감은 그렇게 새겨졌다.

도시 뒷길에 주택가 단지가... 이건 몰랐네

1980년대 초반 강남지역 단지아파트에 살던 가정 내부. 전시 '아파트인생' 세트 촬영.
 1980년대 초반 강남지역 단지아파트에 살던 가정 내부. 전시 '아파트인생' 세트 촬영.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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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입견이란 강력하다. 혈액으로 성격을 감별하는 것이나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도 다 선입견 탓이다. 한 번 만들어진 평가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2010년 통계청 인구주택 총조사 전수 집계 결과를 보면 옛 창원시(창원시는 마산·창원·진해가 통합해 만들어졌다)는 전체 주택 가운데 아파트 비율이 76.4%다. 전국 평균인 57.6%나 서울시 58.8%보다 높다. 전체 가구 가운데 아파트 비율로 따져도 옛 창원시는 57.9%로 전국 48.8%, 서울 41.5%를 훌쩍 뛰어넘는다. 이런 결과를 보면서 '역시 창원'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 일 때문에 창원시 용호동을 찾았다. 중간에 시간이 비어서 2~3시간 정도를 때워야 했다. 별생각 없이 동네 뒷길로 들어섰다. 깜짝 놀랐다. 아파트가 아닌 2층 주택이 동네 가득 펼쳐져 있었다. 동네에 아파트는 없었다.

사실 그전에도 주택가는 많이 봐왔다. 재개발 예정지로 지정된 오래된 주택가나 빌라촌·한옥촌 등을 숱하게 봐온 터다. 창원에서 본 주택가는 달랐다. 집과 길이 깨끗하다는 점에서 재개발 예정지 주택가와 달랐고, 집마다 마당이 있다는 점에서 빌라촌과도 달랐다. 서울 부암동이나 평창동·성북동 주택가와 닮은 것도 같지만 느낌은 크게 차이가 났다. 앞선 서울 주택가가 경사지, 창원 주택가가 평지라는 차이점이 있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담이 달랐다. 모두 높이가 낮았다.

궁금증이 생겼다. 그 동네에서 오래 영업을 했다는 한 식당 주인에게 동네 담들이 왜 모두 낮은지 물었다. 주인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그런가요. 한 번도 그런 생각 해본 적 없는데…."

막은 듯 안막은 듯... 낮은 담의 미학

옛 창원시 주택가 동네에서 본 집 대문과 담. 담 높이가 성인 가슴 정도다. 담은 안과 밖을 완전히 막기보다는 적당히 경계만 지은 느낌이다.
 옛 창원시 주택가 동네에서 본 집 대문과 담. 담 높이가 성인 가슴 정도다. 담은 안과 밖을 완전히 막기보다는 적당히 경계만 지은 느낌이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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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을 만들긴 했으나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인다. 싸리나무나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친 옛날 전통 담이 이렇지 않았을까.
 담을 만들긴 했으나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인다. 싸리나무나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친 옛날 전통 담이 이렇지 않았을까.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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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익숙한 것에 대해서는 무심해지는 법이다. 직접 담 높이를 재보기 시작했다. 성인 가슴 높이 정도 되는 담이 많았다. 무릎쯤 되거나 아예 담을 없애고 낮은 나무로 담을 대신한 곳도 눈에 띄었다.

동네가 시원하고 탁 트여 있다는 느낌이 든 게 담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파동·사림동 등 창원시 다른 동네에서도 비슷한 풍경을 발견하면서 확실히 깨닫게 됐다.

오래 전 외가에서 본 시골 담이 그랬다. 탱자나무로 만든 울타리 높이는 딱 어른 가슴께였다. 집 툇마루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노라면 지나가던 어르신이 담 너머에서 '빼꼼' 내다보며 "뉘집 자식인고? 어르신들은 어디 가셨나?"라고 묻곤 했다.

외삼촌과 함께 동네 산보를 다니면 삼촌 또한 다른 집 담 너머로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기색을 살폈다. 내부를 절대 볼 수 없게 '꽁꽁' 막아놓은 도시 담과 달리 시골 담이란 산짐승들이 못들어오게 막아놓은 정도였다.

사극에서 보게 되는 서민들 집 담이나, 의령 오운마을, 비금도 내촌마을에 있는 옛 담장 높이가 1.5m 내외라고 하니 오랫동안 담장 높이는 대략 그 정도였던 것 같다.

담을 없애려는 사람들과 세우려는 사람들

1990년대 중반 대구 삼덕동에서 대구 YMCA 주도로 시작된 담장 허물기는 이후 전국에서 유행이 됐다.
 1990년대 중반 대구 삼덕동에서 대구 YMCA 주도로 시작된 담장 허물기는 이후 전국에서 유행이 됐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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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폐쇄적인 도시 문화에 대한 반성과 함께 아예 담을 없애는 바람이 분 적이 있다. 1990년대 중반 대구에서 처음 시작된 담 없애기 바람은 뜨거웠다.

대구 시내 한 마을에서 시작된 담 없애기는 대구 시내 전체로 확대됐고, 이후 전국 곳곳에서 펼쳐졌다. 관공서와 학교가 담장 없애기에 앞장서면서 담장 없애기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이런 움직임은 학교 담장을 없앴더니 범죄가 늘었다는 비판과 함께 역풍을 맞고 있다. 그러나 담장 없는 건물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담장 없애기와 범죄 연관성이 없다는 반론 또한 만만치 않으며 담은 심리적인 만족감뿐이라는 비판도 있으니 말이다.

최근 유행한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이나 영화 <퍼시픽 림>에서도 볼 수 있듯 인간은 큰 위협을 막기 위해 담이라는 보호책을 오랫동안 즐겨 써왔다. 공상 속에서가 아니라 실제로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인들은 이민족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만리장성을 쌓았고, 호주인들은 개가 양 떼를 먹지 못하도록 5300km나 되는 도그 펜스를 세웠다.

서울 평창동에서 볼 수 높은 담. 성처럼 높다.
 서울 평창동에서 볼 수 높은 담. 성처럼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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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그펜스는 개떼를 완벽하게 막았으나 만리장성은 이민족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담장이 침입자를 막을 수 있느냐 여부와 별개로 침입자가 과연 누구냐에 대한 판단이 담장 설치를 결정할 것이다.

재미있게도 보수언론과 보수정당은 대체로 담장 설치를 지지하는 듯하고, 그 반대편이 담장 없애기를 지지하는 듯하다. 그렇게 본다면 담장 세우기와 없애기는 치안 문제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세상을 보는 관점의 문제일 수도 있다.

담장 없애기와 세우기의 갈등 와중에 새로 세워지는 담이 투명펜스라는 점은 재미있다. 담이 쳐있기는 하지만 양쪽이 서로 들여다보인다는 점에서 완전히 양쪽을 가로막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담 허물기를 비판한 쪽이라도 어느 정도는 소통이 필요하다고 인정했다는 것이 아닐까.

담장 없애기와 세우기를 두고 보수와 진보 양 진영이 힘겨루기를 하는 가운데 옛 창원시 주택가에서 본 낮은 담은 꽤 좋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안전과 소통·조경·집값 등 여러모로 생각해서 지역사회가 판단해서 해야 할 일이다. 개인 판단으로는 담장 없애기와 투명펜스 세우기, 낮은 담이 지역과 건물 상황에 맞게 다양하게 경쟁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태그:#담, #창원, #단지아파트, #삼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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