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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지난 2월 12일 <군 입대 석 달 만에 20kg 강제 감량...결국 사망> 기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고 손형주 이병의 억울한 죽음이 끝내 육군에 의해 '순직 기각' 처리되고 말았다. 아들 손형주 이병의 순직 결정을 염원해왔던 어머니는 오열조차 못한 채 한동안 넋을 잃었다. 나 역시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 그리고 이제, 나는 손 이병 순직 처리를 둘러싼 전말을 고발한다.

노력해도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강요

민간인 극기훈련캠프 1일군인 사격(2000.7.14)
 민간인 극기훈련캠프 1일군인 사격(2000.7.14)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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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의 어느 날. 내가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는 민주당 김광진 국회의원실에 한 어머니가 찾아왔다. "어떻게 오셨냐"고 하니 "오늘 군 유족 모임이 있다고 해서 왔는데 장소를 몰라 여기로 왔다"라고 말했다. 알고보니 어머니의 착각이었다. 의무 복무 중 사망한 군인의 명예회복을 위해 여러 입법 노력을 해 오고 있는 김광진 의원실에서 군 사망 유족 모임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날짜를 착각해서 다른 날 와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헛걸음하게 된 어머니가 안쓰러워 "어디서 오셨냐"고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부산에서 아침 첫차를 타고 왔다"라고 답했다. 나는 그런 어머니에게 그냥 돌아가라고 말할 수 없어 "그럼 저와 차나 한잔 하시고 가시라"라며 자리를 권했다.

사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김광진 의원실에서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 입법 운동을 함께하고 있는 유족들은 200여 가족인데, 모두 군에서 아들을 잃은 분들이다. 나는 이분들과 개별적인 상담을 하지 않는 것을 일종의 원칙으로 삼았다. 그분들은 한결같이 기가 막히고 억울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만 보면 하소연을 하고 싶어 하시는데, 문제는 그 사연만 듣고 있다 보면 내가 일할 시간이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먼 길을 찾아왔다가 허탕 친 어머니에게 '야속한 원칙'을 내세울 수 없었다. 차 한잔 마시며 듣게 된 어머니의 사연은 기구했다. 어려서부터 착하고 수재 소리를 듣던 어머니의 아들 '손형주'가 군에 입대한 때는 2011년 1월 3일이었다. 입대하는 아들을 걱정하지 않을 어머니가 누가 있을까. 더군다나 손형주는 몸무게 103kg이 넘는 과체중에 시력이 매우 좋지 않았다.

예를 들어 안경을 벗은 시력은 0.1도 되지 않았고 안경을 쓴 교정시력도 0.3에 이르지 못할 정도였다. 이 정도 시력이면 사격 시 200미터 표적지를 뚜렷하게 보지 못하며 250미터 표적지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손 이병에게 치명적인 신체적 약점이 더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은 손 이병 사망 뒤 군 헌병대가 밝힌 신병 훈련소 조교의 진술에도 담겨 있다. 손 이병에게는 손을 떠는 증세가 있었다. 이로 인해 손 이병은 사격을 할 때 좋은 기록을 낼 수 없었다. 손 이병의 신체적 조건은 10년 전 병역 기준이었다면 현역 입대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손 이병이 현역병으로 입대한 이유는 '병역 자원의 부족' 때문이었다. 저출산으로 인해 필요한 병력 자원을 충분히 수급할 수 없자 병무청은 현역병 판정 기준을 지속적으로 완화해왔다. 그래서 웬만하면 현역병 입대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이다. 특히 시력의 경우는 시각장애인이 아니면 병역 면제를 받을 수 없도록 아예 못질해놨다. 손 이병은 이런 이유로 현역병으로 입대하게 됐다.

하지만 어머니의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부대 지휘관은 손 이병에게 과체중인 103kg을 70kg대로 감량하라고 '지시만' 했다. 그 해결 방법은 그저 '가혹한 신체 운동'의 강요였다. 신체 조건이 우수한 사병에게는 3km씩만 달리게 하고, 같은 조건에서도 힘들어했던 손 이병에게는 오히려 그 세 배인 9km를 매일 달리게 했다.

또한 팔굽혀 펴기와 식사량마저 통제했다. 그래야 더 빨리 체중이 빠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다른 사병에 비해 기초적인 근력이 약해 손 이병이 매우 고통스러워했다"는 동료 사병의 헌병대 진술처럼 손 이병은 무척 힘들어했지만, 이 모든 지시를 '모범생답게' 잘 따랐다.

손 이병은 입대 후 14일 만에 몸무게가 13kg이나 급격히 빠졌다.
 손 이병은 입대 후 14일 만에 몸무게가 13kg이나 급격히 빠졌다.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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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이병은 고통스러웠지만 지휘관이 명령처럼 뛰라는 대로 뛰었고, 하라는 대로 했으며, 먹으라는 만큼만 먹었다. 그래서 헌병대 조사 결과 입대 후 불과 14일 만에 13kg 체중 감량을 했고, 석 달 뒤에는 20kg까지 감량했다. 중대장의 지시에 따라 손 이병은 군인답게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이와 달리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그건 '모범생'도 할 수 없는 일, 바로 사격이었다. 손 이병 사망 후 발견된 그의 사격 수첩에는 '200m 표적지가 취약하며, 250m(표적지) 안 보임'이라고 적혀 있었다.

손 이병은 아예 보이지 않는 표적지를 향해 총을 쐈다. 그렇게 쏜 것이 잘 맞을 리 없었다. 더구나 수전 증세 때문에 손 이병의 좌절감은 더욱 컸을 것이다. 그러자 중대장은 많은 사병들이 있는 사격장에서 손 이병에게 "넌 앞으로 사격하지마"라는 조롱·비하 발언을 수차례 했다.

결국 '사격 저조자'로 선정된 손 이병은 얼차려를 받았다. 수재로 살던 사람이 '군대 고문관' 취급을 받는 뚱뚱한 바보가 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손 이병이 겪은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였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3시 46분께. 손 이병은 서른 번째 사격이 끝난 후 다시 장전한 서른한 번째 총구를 자신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당겨진 방아쇠는 큰 폭발음과 함께 손 이병의 생명을 무참하게 앗아갔다. 이 사실을 내게 전하며 오열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나는 억울한 손 이병의 죽음이 명예라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나는 이 억울한 죽음은 순직 처리돼야 마땅하다고 믿었다.

헌병대의 결론 : '손 이병은 부대적 요인으로 자살'

그래서 나는 헌병대 조사 결과가 어찌 됐는지 어머니에게 여쭤봤다. 다행히 헌병대는 손 이병이 사망한 과정에서 부대 지휘관의 잘못이 상당했다며 이러한 잘못으로 기인한 사망사고이니 손 이병에 대해 '순직 처리하도록' 육군참모총장에게 권고했다고 한다.

군 헌병대는 "소속 부대 지휘관들이 고인의 신체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한 체력 단련을 요구하고, 비정상적인 사격 훈련과 내무 생활의 관리 소홀 등으로 육체적·정신적 스트레스가 가중됐다"라면서 "정신과적 분석 결과에서도 무리한 체중 감량으로 인한 심한 스트레스와 사격 저조자로 선정되는 등으로 인한 심한 자괴감이 사고 원인"이라고 밝혔다.

어머니는 "당시 헌병대 수사관이 '손 이병의 순직은 이미 97% 이뤄진 것이고, 이제 남은 3%는 육군참모총장의 서명만 남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크게 걱정하지 말라'는 말까지 했다"고 주장했다. 손 이병의 어머니는 육군의 순직 심사가 곧 열릴 줄 알았는데 아들이 사망한 뒤 무려 3년이 다 돼가는 시점까지도 계속 미뤄져 답답하다고 하소연했다.

어머니는 "3년은 하루하루가 지옥과 같았다"고 말했다. 나는 해당 부서 관계자에게 유족의 입장을 전달했다. "군 헌병대 수사 결과에서도 손 이병의 사망 원인을 관리 소홀 등 지휘관의 잘못으로 인정했는데 왜 이처럼 순직 심사가 늦느냐"라고 따져 물었다. 그리고 몇 차례 실랑이가 더 있었던 지난 2014년 2월 12일, 마침내 육군 순직 관련 심사 부서의 실무 담당자로부터 손 이병의 순직 관련 심사가 잡혔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손 이병의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알린 뒤 "군 헌병대 조사 결과가 '순직 권고'였으니 큰 문제가 있겠느냐"라며 위로했다. 다만 손 이병의 억울한 죽음을 보다 많은 분들이 알게 돼 순직 처리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된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오마이뉴스>에 이 안타까운 사연을 기고했다.

다행히 기사를 접한 많은 이들이 손 이병의 안타까운 죽음에 공감했다. 특히 네이버와 다음 등 포털에 올라간 기사에는 수천 개가 넘는 댓글이 달릴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대부분이 손 이병의 억울한 죽음이 순직 처리돼야 한다며 이를 함께 지켜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간절하게 기다렸던 소식은 순직 처리가 아닌 '심의 1개월 보류 결정'이었다.

3년만에 잡힌 순직 심사 : 심의 1개월 보류

나는 "이게 말이 되느냐,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느냐"라며 거듭 따졌다. 그러자 실무자의 변명은 다음과 같았다. '육군 순직 심의위원으로 현역 영관급 장교가 다수 포함돼 있는 위원회의 생각은 많이 달랐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손 이병에게 행해진 체중 감량 지시는 알려진 것처럼 그리 가혹한 수준이 아니었다'는 주장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당신네 조직인 군 헌병대가 내린 공식 결론이었다. 손 이병의 소속 부대 지휘관들이 고인의 신체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한 체력 단련을 요구했다는 사실을 조사 결과 발표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소리냐. 군 헌병대 조사 결과마저 탄핵하는 것이냐."

그러자 다시 새로운 주장이 나왔다. 손 이병의 순직 처리가 불가능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손 이병이 남긴 유서 때문이라는 것이다. 손 이병은 유서를 남겼는데, 그 유서에는 '중2 때 시작, 고1 때… 대학1, 2 때도 허무했지, 게임 세트 (끝났다)... 1990년 10월 17일부터 2011년 3월 7일 손형주'라는 구절이 있다고 했다. 그 구절이 문제가 됐다는 이야기였다.

사실 이것은 정식 유서가 아닌 메모식의 기록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메모를 유서로 판단했고, 이에 따라 손 이병이 중2 때부터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도중 자살한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이는 군 복무 연관성과 상당히 떨어지는 자살이니 순직 처리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던 듯하다.

경악했다. 나는 지금까지 군 헌병대의 수사가 공정하지 않다는 주장을 수없이 해왔다. 하지만 손 이병 사망 사건에 있어 군 헌병대는 군부대 측에 많은 귀책사유가 있었음을 나름 명쾌하게 밝혀냈다. 그런데 이런 헌병대 조사 결과조차도 육군 순직 심사 심의위원들은 부정했다. 그러면서 이 몇 줄의 문장을 가지고 '순직 처리 불가'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손 이병은 입대 전까지 우울증 등 일체의 정신 병력을 앓아온 사실이 없었다. 이전에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적도 없었다. 그런 손 이병이 군에 와서 죽었다. 군 헌병대 수사 결과처럼 군 복무 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문제점이 중첩돼 목숨을 끊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밝힌다. 군 당국의 잘못은 내가 지금까지 써온 기사 내용에 전부 담겨 있지 않았다.  굳이 전부 다 쓸 필요가 있을까 생각해 지난 기사에서 모두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을 다 알려야 할 것 같다.

지난 기사에서 밝히지 못했던 것들 : 가혹행위

손 이병의 군 복무 기간은 불과 70일 정도였다. 이 짧은 기간동안 손 이병은 군부대 선임병들로부터 집중적인 괴롭힘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동료 사병이 헌병대에 제출한 진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O중대의 아무개 선임병이 손형주를 싫어했다. 그래서 밑에 애들한테 형주를 '일 많이 시키고 갈구라고' 시킨다고 하더라. 그리고 사망 전에는 형주가 학벌이 좋고 머리가 똑똑해서 군수과 행정병으로 뺀다는 얘기가 많이 나왔다. 이후 (손 이병이) 중대에서 혼자 떨어져 (왕따같이) 다니는 것을 종종 봤다."

손 이병이 행정병으로 차출될 것이라는 이야기 때문에 다른 선임병들이 손 이병을 싫어했고, 이로 인해 손 이병이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는 진술은 여러 명에게서 확인됐다.

손 이병이 겪은 고통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부대 선임병들의 내무부조리는 더욱 심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군 헌병대 조사 기록에 따르면, 자대 배치 후 손 이병은 14일 동안 무려 15번의 경계근무를 섰는데 이 중 두 번은 부대 선임병의 근무였다. 부대 선임병들은 헌병대 조사 과정에서 '몸이 안 좋아 신병인 손 이병에게 부탁해 근무(오전 1시, 오전 4시 외부 경계근무)를 대신 세웠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말이 부탁이지 이것은 신병에게 거부할 수 없는 강요라고 볼 수 있다. 손 이병은 추운 2월 날씨에 외부 경계근무를 서면서 자괴감 그리고 수면 부족으로 인한 피로를 느끼지 않았을까.

헌병대가 밝힌 조사 결과에 따르면 손 이병이 수행한 경계 근무는 그 자체로도 문제다. 통상 부대 적응 기간이라고 해서 신병에게는 자대 배치 초기 일주일 동안 근무를 세우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 이병은 이런 과정 없이 오히려 더 많은 근무에 투입됐다. 헌병대는 이를 '사단 경계 지침을 위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손 이병이 겪었던 집중적인 육체적·정신적 고통과 수면 부족 등으로 인해 당시 손 이병의 정신 건강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지고, 좌절감 역시 극대화됐을 것이다. 나는 육군 심의위원들이 이런 점을 정말 제대로 본 것인지 믿을 수 없다.

그렇다면 손 이병을 대상으로 한 또 다른 가혹행위는 정말 없었을까. 유족이 의심스럽게 여기는 점이 있다. 사망 후 손 이병의 몸 여러 곳에서 발견된 '적자색' 상처 흔적이 바로 그것이다. 유족은 이 상처들이 소위 '쪼인트 걷어차기'(정강이 걷어차기) 등 구타로 의한 것이라며 수사를 의뢰했다.

하지만 헌병대의 답변은 엉뚱했다. 맞아서 생긴 상처가 아니라 '사격 저조자'로 선정돼 팔굽혀 펴기 등 얼차려를 받다가 연병장 돌 등에 부딪혀 생긴 상처라고 답했다. 헌병대의 답변, 이게 말이 되는 해명인가. 돌을 던져 정강이에 맞지 않고서야 팔굽혀 펴기 중 멍이 든다는 것은 너무도 한심한 변명이 아닐 수 없다. 유족은 이 상처가 손 이병을 죽게 한 원인 중 하나라고 의심하고 있다.

"믿고 한 달만 기다려달라"...

따라서 나는 유서 내용 때문에 손 이병의 순직처리가 보류됐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 나는 군 헌병대 수사 결과 이미 확인된 것처럼 '무리한 체중 감량'과 '신체적 조건으로 나쁠 수밖에 없는 사격 성적을 가지고 부대 지휘관이 손 이병을 사격 저조자로 선정해 가한 조롱과 멸시 행위', 그리고 '부대 선임병들의 정신적 괴롭힘' 등이 복합적으로 얽힌 억울한 죽음을 왜 무시하느냐고 따졌다. 또 이런 식으로 책임을 회피한다면 대한민국 군대에서 순직으로 처리될 군인은 누가 있겠느냐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그때였다. 생각지도 못한 묘한 제안을 담당자가 해왔다. 담당자 제안의 요지는 이랬다. '믿고 한 달만 기다려주면 안 되겠느냐'였다. 손 이병의 순직 심사에 대해 언론에 보도하지 말고 침묵한 채 한 달만 믿고 기다려주시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노력하겠다는 말이었다. 나는 순간 고심에 빠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그때 나는 여러 언론사 기자들로부터 연락을 받고 있었다. 순직 심사 결과가 어찌 됐냐는 질문을 받았고, 이 사연을 방송과 기사로 만들고 싶다며 유족의 연락처를 알려달라는 부탁도 받았다. 하지만 나는 순직 심사 결과를 본 뒤 다시 통화하자며 이들의 요청을 미뤄뒀다. 담당자에게 이런 경위를 전하자 그는 분명한 어조로 "믿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라고 거듭 말했다. 결국 나는 그를 믿기로 했다.

고백하자면 그렇게 믿기로 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가 나를 진짜 속이려는 것이 아닐 것이라고 믿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의 말을 믿었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두 번째에 있었다. 그의 제안을 거부한다고 해서 우리가 선택할 카드가 따로 있었던 게 아니기 때문이다. 순직 심사는 그들의 권한이다. 언론을 통해 비판 보도가 나간다고 해서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믿었다. 믿고 싶었다. 나는 두 번, 세 번 그에게 당부했다. 믿고 기다리겠다고 했고, 그래서 이제 침묵한 채 다음 순직 심사 결과만 기다리겠다고 먼저 약속했다. 이후 많은 언론사 기자들이 2월 12일 순직 심의 결과가 어찌 됐느냐고 물어왔다. 하지만 나는 약속한 대로 침묵을 지켰고 기다렸다. 심지어 심사가 보류됐다는 소식에 울분이 터진 손 이병의 아버지가 홧술을 마신 뒤 한 언론사와 인터뷰를 했다는 사실을 듣고 나는 '바보처럼' 그 아버지와 방송사 PD에게 부탁해 보도를 막기도 했다.

'우리가 보도를 자제해 달라고 했는데 약속을 지키지 않아 결국 기각 처리가 됐다'며 육군 담당 부서가 핑계 삼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라도 순직 처리가 될 수 있다면 무엇을 해서라도 나는 손형주 이병이 명예회복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그렇게 약속한 한 달이 지나가던 3월 11일. 2월 12일 보류됐던 손 이병에 대한 순직심사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유족과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다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3년상 기일에 내려진 결정 : 기·각

손 이병의 억울한 죽음은 결국 '순직 기각' 처리됐다. 육군의 이런 결정은 끔찍했다.
 손 이병의 억울한 죽음은 결국 '순직 기각' 처리됐다. 육군의 이런 결정은 끔찍했다.
ⓒ 대한민국 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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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했다. 끔찍했다. 차라리 무서웠다.

심사 결과 '순직 기각' 결정이 나왔다. 손 이병의 죽음은 '군과 상관없는 죽음'이라는 최종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차마 이 사실을 그 불쌍한 어머니에게 어떻게 전할 수 있을지…. 나는 절망스러웠다. 손 이병의 재심의 사실을 알려주고, 재심의가 있던 그날 아침, 그러니까 3월 11일 손 이병의 어머니와 했던 전화통화 내용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누구보다 아들의 명예회복을 기도한 사람은 어머니다. 그래서 나는 그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형주 심의날이니 마음 단단히 먹고 기다려보자, 우리가 노력은 다했지만 심의는 그들이 하니 설령 결과가 좋지 않다고 해도 결코 절망하지 말자'며 위로하고 싶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머니는 아들의 심의가 이날 열리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군 당국이 심의 개최 여부를 유족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그제야 알았다.

여하간 심의가 열린다고 하니 마음을 단단히 먹고 결과를 기다려보자고 하는데 이내 어머니의 울음이 들려왔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심정으로 묵묵히 그 울음이 잦아들기만을 기다렸다. 이어진 어머니 말씀에 나조차도 애간장이 탔다.

"사실은 오늘이 우리 형주 죽은 지 만 3년 되는 3년상 기일이에요. 2011년 3월 11일에 사고가 나 형주가 죽었는데 오늘이 2014년 3월 11일이잖아요. 그래서 지금 형주 있는 곳에 가려고 나가려던 참이었어요. 보좌관님. 우리 형주 불쌍해서… 불쌍해서…."

아들 사망 후 3년. 어머니에게 이 세월은 살아도 사는 세월이 아니었다. 그렇게 죽은 아들도 야속했고, 또 그 아들을 데려가 죽게 만든 이 나라 현실도 야속했다. 그런데 그 아들의 3년 기일에 군은 '순직 기각' 결정을 어머니에게 통보했다. 우연이겠지만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야만적 결말이었다.

어머니는 말했다. 입대 후 아들을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고. 1월 3일 입대한 아들의 면회가 허용되지 않아 사망날까지 만날 수 없었다. 사형수로 끌려간 것도 아니고 죄를 짓고 끌려간 것도 아닌데 그런 아들을 볼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었다. 어머니는 "아들을 한 번만이라도 보고 잃었다면 이렇게 한이 맺히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울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나는 끝까지 따질 것이다

결국 손형주 이병의 명예회복은 기각됐다. 내가 이 글을 쓴다고 해도 손 이병의 죽음은 다시 순직 처리될 수 없다. 그들의 심사는 끝났고, 이 결정을 내린 그들은 다시 거대한 국방부의 숲 속으로 사라졌다. 그래서 나는 기각 결정을 알려주면서 전화를 걸어온 담당자에게 화조차 낼 수 없었다. "나를 속인 것이냐"라고 따지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다만, 결과적으로 속은 내 부끄러운 판단이 한심해서 미칠 것 같았다. 대신 내게 "한 달만 참아달라"라고 제안한 그 담당자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억울한 형주는 죽었고, 그래서 말이 없다.'

형주가 왜 죽었는지,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 항의도 해명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형주를 대신해 이 나라 국방부 높은 이들에게 따진다.

손 이병의 죽음으로 군은 그 어떤 책임도 피할 수 없다. 심의위원들의 판단처럼 원래 형주가 중 2 때부터 염세적 비관을 갖고 있었다면, 그런 형주는 징병 검사에서 '군 복무 부적응자'로 걸러져 면제돼야 마땅했다. 하지만 병무청과 군은 형주가 정상적인 대한민국 청년이라며 현역병으로 징병했다. 심의위원들 주장처럼 '형주가 원래 문제가 있다가 자살한 것'이라고 해도 군은 잘못된 징병을 한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또 '건강한 군인이라고 생각해서 형주를 현역병으로 선발했는데 사망했다'고 해도 군에 책임이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결국 멀쩡한 군인이 죽었다면, 군인이 자살하지 않도록 예방하고 관리하지 못한 군 당국에 잘못이 있는 것이다. 군인으로 징병해 데려갔다면 나라와 국방부는 그 군인을 완전히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야 국민들에게 '당신의 귀한 아들을 내놓으시오'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군 복무를 잘할 수 있다'며 국방부가 아들을 징병했다면, 그 사람의 생사는 군이 모두 책임지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부하 사병의 신체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채 가혹하게 대하고, 그 병사는 이를 견디지 못해 죽었다. 그런데 군이 그 죽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다면? 군은 더 이상 우리 아들들을 군인으로 징병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외친다. '더 이상 억울한 군인의 죽음을 만들지 말라'고.

나는 손형주 이병의 죽음을 '순직 기각' 처리한 이 나라 육군참모총장의 결론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끝까지 따질 것이다.


태그:#군 사망사고, #손형주, #순직 처리, #명예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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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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