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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대 대선 전인 2012년, 두 사람이 칼럼 한 편을 찍은 사진을 인터넷에 올렸다. 한 사람은 인터넷 트위터의 '트윗픽'을, 다른 한 사람은 포털 다음 아고라의 '아고라 즐보드 직찍·제보'란을 활용했다. 칼럼은 그들이 직접 쓴 게 아니었다. 전직 기자 출신의 재미교포 언론인이 현지 언론(<한겨레저널>)에 올린 글이었다.

두 사람은 평범한 대한민국 시민인 고창규씨와 박정규씨였다. 그들이 인터넷에 올린 칼럼은 재미 언론인 김현철씨가 썼다. 그는 현대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으로 유명한 김영랑 시인의 아들이라고 한다.

어떤 칼럼이었을까. 충격적이게도,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생활(?) 중 부도덕한 여자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내용이었다. 박 전 대통령의 사생활 상대이자 칼럼의 주인공인 사람은 "1960년대 후반까지 영화 두 편에 주연 여배우로 출연, 한국 영화의 톱스타로서 앞날이 촉망되던 미모의 영화배우(서울 명문대 출신)"였다.

구체적으로는 예의 여배우가 결혼 1년 만에 아이를 갖고 "행복한 신혼생활"을 하던 중, "청와대의 채홍사(연산군 때 전국의 창기 중 미인을 뽑아 왕에게 바치던 벼슬아침)"를 통해 궁정동 안가로 불려가 박 전 대통령의 '성노예'가 됐다가 한 달여 후쯤 권력의 강압으로 남편과 생이별을 당한 뒤 미국으로 보내져 현지의 육십 넘은 노인과 결혼하게 되었다는 취지의 내용이었다.

칼럼 내용과 마찬가지로 제목도 놀랍기만 하다. 바로 <박정희 승은 입은 200여 여인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칼럼의 필자는 박 전 대통령의 사생활 상대인 그 여배우와 직접 인터뷰를 하는 등 현장 취재를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박정희 승은 입은 200여 명의 여인들

<그때 그사람들>의 한 장면. 배우지망생의 품에 안긴 박정희 전대통령
 <그때 그사람들>의 한 장면. 배우지망생의 품에 안긴 박정희 전대통령
ⓒ MK픽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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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전 대통령의 '승은(承恩)'의 주인공인 200여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 나온 게 아니다. <물은 생명이다>로 유명한 다큐 작가 문영심의 최근작이 있다. 1979년 10월 26일, 박 전 대통령을 총격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중정부장)의 평전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아래 <바람 없는>)가 그것이다. 이 책 52쪽에는 박 전 대통령이 궁정동 밀실에서 여인들을 만나는 '행사' 이야기가 무미건조한 문체로 서술되어 있다.

이 행사라는 것이 사실은 술자리와 '대통령의 사적인 유희'를 가리킨다. 대통령의 '행사'는 소행사와 대행사로 나뉜다. 소행사는 대통령과 젊은 여성이 간단한 만찬 겸 술자리를 갖고 나서 잠자리를 갖는 것이고, 대행사는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 경호실장 등이 참석해서 두어 명의 여성을 데리고 술과 여흥을 즐기고, 여흥이 끝나면 대통령이 점찍은 여자와 잠자리를 갖는 걸로 마무리된다. 이런 행사가 사흘에 한 번, 한 달이면 열 번 가까이 있었다. (<바람 없는>, 52쪽)

박 전 대통령의 '행사'를 위한 '채홍사'는 청와대 의전과장 박선호가 맡았다. 박 전 과장은 10·26 관련 재판 중에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당시 변호를 맡았던 안동일 변호사는 박 전 과장의 말을 빌려 박정희가 건드린 여자들이 상당했음을 밝히기도 했다. 이에 따르면 박 전 과장은 재직 당시만도 100여 명의 여자들을 섭외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여자들까지 합치면 200명이 넘는다고 말했다. '행사'는 1주일에 한두 번씩 열렸다. 100명이니 200명이니 하는 말이 단지 '과장'으로만 들리지 않는 이유다.

김현철씨가 쓴 문제의 칼럼은 바로 그 200여 명의 여자들 중 '한 명'(칼럼에는 실명이 밝혀져 있지 않다)으로 보이는 영화배우를 중심으로 쓰였다. 2013년 8월 27일 자 <주간경향>(1040호)에 실린 기사(<'허위사실'을 밝히지 않는 이상한 재판>)에 따르면, 김씨는 칼럼 내용의 사실 여부를 물는 <주간경향> 기자에게 이메일을 통해 "내가 칼럼에 쓴 내용은 모두 사실이며, 정황을 뒷받침할 자료도 갖고 있다"고 답변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문제의 칼럼을 인터넷에 올린 예의 시민들이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검찰의 기소 근거는 공직선거법 250조였다. 낙선을 목적으로 허위 사실을 유포한 혐의가 적용된 것이다. 박씨가 2012년 9월 26일 포털 사이트 다음에 올린 글의 제목은 '박정희 대통령의 성노예가 된 슬픈 사연'이었다. 제목은 그랬지만, 재미언론인 김현철씨의 칼럼을 그대로 올린 것이었다.

고씨와 박씨를 기소한 검찰의 논리는 간단했다. 허위 내용의 칼럼을 인터넷에 올렸으니, 그것을 올린 사람도 허위사실을 유포한 죄를 저질렀다는 식이다. 고씨는 지난달 17일 있었던 2심에서 벌금 500만 원을 선고받았다. 지난해 12월 5일 검찰로부터 징역 8월 구형을 받은 박씨는, 두 차례나 되는 연기(각각 1월 16일과 28일 양 일에 연기되었다) 끝에 현재 1심 선고 공판을 기다리고 있다.

"연산군의 폭정, 못 봤지만 역사적 사실로 믿지 않나"

지난 대통령 선거 때 재미언론인 김현철씨가 쓴 '박정희 여인들' 관련 칼럼을 인터넷에 올렸다가 공직선거법(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기소되었던 박정규(오른쪽)씨가1월 16일 오전 창원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은 뒤 김형일 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 재미언론인 김현철씨가 쓴 '박정희 여인들' 관련 칼럼을 인터넷에 올렸다가 공직선거법(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기소되었던 박정규(오른쪽)씨가1월 16일 오전 창원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은 뒤 김형일 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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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씨의 1심과 2심 재판부는 어떤 근거로 그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을까. 판결문에 따르면, 고씨의 2심 재판부는 칼럼에 기술된 박 전 대통령 관련 의혹의 존재를 수긍할 만한 소명자료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어서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다.

재판부는 범행에 대한 고씨의 '고의 여부'와 관련하여, 범행 당시 고씨가 게시글의 내용이 허위임을 미필적으로나마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했다. 인터넷에 게재된 문제의 칼럼이 국내 언론에 보도된 적이 없는 바, 칼럼이 제기한 의혹이 진실인지 여부를 확인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점, 칼럼 내용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을 품을 만한데 그렇게 하지 않은 점 등이 재판부 판단의 근거들이었다.

법 문외한으로서 납득하기 어려운 의문점들이 있다. 우선 어떤 칼럼의 내용이 '의혹'처럼 보일 경우 독자가 그 의혹의 '사실'이나 '진실' 여부를 확인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논리다. 재판부의 논리대로라면, 독자들은 앞으로 칼럼과 같은 주장글이 제시하는 내용의 '사실'이나 '진실' 여부를 일일이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으로는 의문을 품을 만한 상황에서 의문을 품지 않은 점을 지적한 대목이다. 재판부가 고씨를 "의문을 품을 만한 상황"에 있다고 본 근거는 과거 공직선거법 위반죄(허위사실 공표)로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은 전력이었다. 글을 읽고 의문을 품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여부는 그때그때의 독자의 자유 선택에 따르는 게 아닐까.

2심에서마저도 500만 원 벌금형을 선고받은 고씨는, "재판부는 우리가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기에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연산군의 폭정을 보지 않았지만 우리는 왜 역사적 사실로 믿고 있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항변에 수긍이 간다. 고씨의 2심 재판부는 고씨에게 허위사실공표죄를 물었지만 정작 판결문에서 '허위사실은 이것이다'는 내용은 없다. 또 재판부는 칼럼의 허위 여부를 기소를 한 검찰이 아닌 고씨에게 입증하라고 요구하는 소위 '입증전환'을 했다. 그리고 재판부는 단지 칼럼이 제기한 의혹이 사실임을 소명하기 위해 고씨 쪽에서 제출한 자료의 구체성이나 신뢰성 여부 등만을 판단하여 그 '의혹' 내용이 '허위'라고 보고 있을 뿐이다. 적어도 현재 상태대로라면 박 전 대통령의 '여인들'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을 하거나 글로 써서는 안 될 것 같다.

'박정희의 여인들', 금기어 될 수도

예의 <주간경향> 기사 들머리에는 2013년 7월 10일 국회에서 열린 '표현의 자유와 언론탄압 공동대책위원회' 결성식 자리의 한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어지는 대목에서는 칼럼 필자인 김씨가 칼럼을 기고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MBC 기자 출신인 김현철씨는 1970년대 미국에 건너가 언론인 생활을 했다. ··· 그는 1960년대 유명 영화배우로 활동하다 미국으로 건너간 김○○씨(여·작고) '사연'을 취재했다. 하지만 당사자의 당부로 취재 내용은 그동안 꽁꽁 가슴에 숨겨 왔다. 그러다 지난해 3월, 자신이 편집발행인으로 있는 미주지역 언론의 기명 칼럼으로 그 내용을 공개했다. 한 살배기 아들을 둔 유부녀였던 김씨와 관계를 맺고 강제 이혼케 한 장본인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는 주장이었다. 김씨가 칼럼을 게재한 당시 기자도 그에게 사실 여부를 메일로 문의했다. 김씨로부터 답장이 왔다. "내가 칼럼에 쓴 내용은 모두 사실이며, 정황을 뒷받침할 자료도 갖고 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1년이 훨씬 지났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게 있다. 박 전 대통령의 사생활에 관한 칼럼이 어떻게 공직선거법상의 '낙선을 목적으로 허위사실을 유포한 죄(허위사실공표죄)'에 걸렸는가 하는 것이다. 재판부는 고씨 등이 선거에 영향을 주려는 미필적 고의 의도가 있었다고 봤다.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였던 박근혜씨가 박 전 대통령의 딸이기 때문이었을 게다. 그렇더라도 세상 물정 어두운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은 왕위가 세습되는 봉건 왕조가 아니지 않은가.

나는 지금 약간의 두려움과 함께 궁금증이 인다. <바람 없는>에서 박 대통령의 '대·소행사'와, 박 전 과장의 '여자 200여 명' 증언 관련 내용을 서술한 문영심 작가는 어떻게 되는 걸까. 문영심 작가의 책을 소개하는 서평을 <오마이뉴스>에 쓰면서 '대·소행사'와 '여자 200여 명'을 언급한 나는 대통령 선거가 끝났으니 이제 아무 죄가 없을까.

앞으로 평범한 보통 사람은 박 전 대통령의 '여자 문제'를 공개적으로 말하거나 글로 쓰지 못하게 될지 모르겠다.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으니 말이다. '박정희의 여인 200명'이 완전한 금기어가 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이 나라의 법과 법률가들이 무섭기만 하다.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박정희 전 대통령, #<박정희 승은 입은 200여 여인들>, #박근혜 대통령, #고창규, 박정규 씨, #허위사실 공표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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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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