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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억여 건에 이르는 카드사 고객 정보 유출 대란, 이 사건이 내 일상을 바꿔놓은 지 이틀째. 이번 사건으로 개인정보가 유출된 사람의 숫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으니, 그들의 일상도 예전과 같지는 않은 것 같다. 이미 21일 오후 6시 현재 카드 3사의 재발급·해지 신청 건수가 174만 건에 이르렀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해당 회사 관련부서 임원들이 연이어 전격 사퇴를 발표했지만, 피해자들은 분노를 삭일 수 없는지 대거 소송을 준비중이다.

나의 일상을 정신 없게 만든 것도 이번 사건이다. 나는 현재 관련 금융업체 중 한 곳에서 일하고 있다. 주말 사이 정보유출 확인 절차가 진행되고, 은행 업무가 시작된 월요일(20일)부터 내 근무 환경이 급격하게 바뀌었다.

업무를 위한 준비를 마친 뒤 오전 9시 셔터를 올린다. 이미 밖에는 10명에 가까운 손님들이 은행 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다. 손님들은 셔터가 올라가자마자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가 미처 끝나지도 않았는데, 우르르~ 서로 밀고 밀치며 은행 안으로 들어온다.

입구에 마련된 대기번호표 기계는 쉴 새 없이 번호표를 토해내고, 자동문이 아닌 출입문도 마치 자동문인 것처럼 계속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한다. 사람이 늘고, 횟수가 늘어날수록 숫자가 높은 번호표를 손에 쥔 사람들의 한숨도 땅이 꺼질듯 길어진다. 시계를 바라보고, 직원과 줄을 바라보고, 다시 시계를 바라보고... 그렇게 사람들이 꼬리를 물고 계속 줄을 섰다.

쉼 없이 번호표를 토해내는 기계

대규모 개인정보유출 사태로 인해 2차 피해 우려가 커지고 있는 21일 오전 서울 중구 국민은행 소공동지점에서 고객들이 카드를 해지하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 롯데카드 "사과 드립니다" 대규모 개인정보유출 사태로 인해 2차 피해 우려가 커지고 있는 21일 오전 서울 중구 국민은행 소공동지점에서 고객들이 카드를 해지하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 양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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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손님의 숫자도 평소보다 2배, 아니 3배 이상 많아졌다. 이건 평균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사람들이 몰리는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은행 내 인구밀도가 절정에 이른다. 마침내 대기인원이 50명을 넘어서고, 길게 늘어선 줄의 끝자락에 위치한 사람들 사이에선 자못 불편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겁니까? 업무 인원이 왜 이거 밖에 안 되는 거죠?"

기다리던 고객들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를 즈음, 누군가는 결국 크게 소리를 지른다. 고함에 욕설이 섞여있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언성이 높아지다보면 "에라이, 망할 놈들아!"하고 욕설이 섞여나오는 경우도 생긴다. 더러는 뜬금없이 "금감원 이 XXX들!"이라고 금융감독원을 욕하는 사람도 있다.

"이딴 식으로 고객 헛고생 시키고도 수수료를 받아먹겠다는 얘기야? 금감원도 똑같아. 과징금 걷어서 피해자를 보상해줘야지, 왜 정부랑 나눠먹고 XX이야?"

흥분한 한 사람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있을 즈음, 다른 쪽에서 또 분노의 고함이 이어진다.

"도대체 불안해서 살 수가 있어야지! 카드만 바꾸란 거예요, 통장도 바꾸란 거예요? 이럴거면 아예 다 해지해줘요!"

마치 영화 <300>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상황. 고객들이 계속 고함을 지르고 굳은 표정으로 전진하며 창구 앞에 와서 자리를 잡는다. 그 너머에는 발 디딜 공간이 부족할만큼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들어온다. 끝내 월요일(20일)과 화요일(21일) 이틀 내내 창구 직원들은 점심도 못 먹었다.

끝없이 반복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폭발적으로 늘어난 업무량과 고객들의 항의. 문제를 일으킨 업체이니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겠지만, 직원이라는 이유만으로 감당해야만 하는 것들 중 어떤 것은 송곳처럼 마음을 파고들기도 하고 바위처럼 무겁게 짓누르기도 한다. 욕설이 섞인 항의, 혹은 기다리다가 끝내 업무를 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의 체념한 표정 같은 것 말이다.

길게 늘어선 줄과 그로 인해서 늘어난 대기시간은, 보는 입장에서 안타깝지만 직원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근무하는 입장에서도 최대한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들의 업무를 처리해주고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서로에게 좋은 방향이니 당연히 더 빨리 일을 처리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사태에도 더 많은 직원을 늘리지 않고 뭐한 거냐"는 항의에는, 이런 상황은 예전에 한 번도 없었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 아니냐고 반문하고 싶을 정도다. 거기다 직원의 추가배치가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결정으로 간단히 이루어질 리도 없다.

물론, 이런 말들은 입밖으로 내지 못하고 꾹 삼켜야만 한다. 끝없이 반복해야 하는 말은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일 따름이다.

입으로만 되뇌이는 빈말이 아니다. 찾아오는 고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 목적인 서비스직의 일원으로서 진심으로 죄송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루에 수십 번 넘게 '죄송합니다'를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다수 직원들이 하루종일 고객에게 사과와 설명을 반복하느라 입에서 단내가 난다고 호소할 정도였다.

나도 털렸다... 난 어디다 하소연해야 할까?

카드사 개인정보 유출로 인해 카드 재발급 및 해지를 원하는 사람들이 은행에 밀려들고 있다. 22일 낮 찾은 국민은행에서 뽑은 대기표에 적힌 대기인수는 186명이나 됐다.
 카드사 개인정보 유출로 인해 카드 재발급 및 해지를 원하는 사람들이 은행에 밀려들고 있다. 22일 낮 찾은 국민은행에서 뽑은 대기표에 적힌 대기인수는 186명이나 됐다.
ⓒ 최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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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포함한 직원들 역시 개인정보가 '털린' 국민들 중 한 사람이다. 또한 평소보다 몇 배가 넘는 업무량과 스트레스, 그리고 초과근무의 괴로움은 어디에 하소연해야 하는 걸까? 이쯤 되면 관련 직종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그야말로 피해자인 셈 아닐까.

300m 정도 떨어진 다른 금융업체에선 21일 하루 동안 대기인원이 100명 가까이 쌓이는 신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내가 근무하는 지점에서 "40명이나 기다려야 하다니, 다른 곳부터 다녀올게요!" 하고 나간 사람이 10분 만에 돌아와서 "저긴 80명이나 기다려야 해서, 여기부터 일 봐야겠네요"하고 말했다.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얼굴은 우리보다 더 하얗게 질려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측은해졌다.

타사 카드에 관해서 문의하려고 콜센터에 전화를 하자, 상담원이 바짝 긴장한 목소리로 "네, 고객님" 하며 응답한다. "다른게 아니고요, 저도 다른 회사 직원인데요. 힘드시죠? 제가 사용 중인 카드 때문에 물어볼게 있어서요"라고 말을 걸자, 울먹일 듯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소리가 들린다. 하루종일 이 사람도 얼마나 시달린 걸까? 동병상련이라는 말이 떠올라 더 차분하게 말하게 된다. 얼굴이 보이지는 않지만, 마치 거울을 보는 느낌이다.

개인정보 유출 대란이 몰고온 파장 너머에는 금융업계 이용자의 불안과 폭풍같은 카드 해지 신청뿐만 아니라 직원들의 말못할 고통도 숨어있다. 이런 노고를 알아달라고 투정부리려는 것이 아니다. 힘들다고 징징거리고 싶은 건 더더욱 아니다. 다만 직원들도 화풀이를 위한 허수아비가 아니라 인격을 가진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실, 그것 하나만큼은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태그:#금융사 개인정보 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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