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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Dear 엘라

진짜 오랜만이다. 미안해. 그동안 바빴어. 아니 까먹고 있었어. 너한테 소식을 전한다는 걸. 실은 내가 너에게 마지막 편지를 쓴 게 2년 전이야. 너에게 단말마의 비명 같은 괴로운 소식만 전해놓고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말하지 않은 내가 밉지?

나는 잘 지내고 있어.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우선, 내 눈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해야겠지? 나 이제 눈 잘 보여. 아니 그때도 잘 보이긴 했었지. 나 읽을 수도 있어. 책도 읽고 컴퓨터도 할 수 있고 텔레비전도 잘 봐.

작년까지는 시험이나 뭔가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 건 꽤 힘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아. 두 시간짜리 토익시험정도는 볼 수 있어. 작년까지는 모의고사 시험지 붙들고 있다가 글자가 흐릿하게 보이고 아파서 눈물도 펑펑 쏟았었는데. 참 필요할 때는 눈물이 안 나와서 고생이더니 울 때는 상관없는지 잘 나온다.

지금은 마음도 많이 괜찮아졌어. 실은 나 눈이 그렇게 되고 나서 우연한 기회에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거든. 아랫집에 미술전공한 선생님이 사시는데 기회가 어떻게 닿아서 조금씩 배우게 되었어. 나 그림은 정말 생각도 안 해봤는데 좋은 것 같아. 처음에는 선생님이 눈 감고 그려도 된다고 하셔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나 감정 같은 걸 물감을 찍어 쓱쓱 발랐어. 물론 작품이라고 할 수도 없었지. 남들이 생각하는 정교한 스케치 말고 말 그대로 추상화를 그리기 시작했어. 그러고 나니까 많이 좋아졌어. 가벼워졌다고 할까? 머릿속에 그리고 마음속에 있는 분노와 화 같은 걸 몽땅 쏟아내고 나니까 가벼워졌어. 그리고 내 그림을 보니까 그런 무시무시한 슬픔이나 괴로움이 내 속에 있었다는 게 참 마음 아팠어. 내가 많이 힘들었구나. 내가 나를 너무 힘들게 했구나. 세상에 모든 것들이 나를 참 아프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지.

아직도 그 그림은 가지고 있어. 힘들 때마다 한번 씩 꺼내보면 위로가 되기도 하고 내가 이런 적도 있었구나 하기도 해. 좋은 것 같아. 지금은 새로운 꿈이랄까? 목표 같은 게 생겼어. 내 개인전 같은 걸 하고 싶어. 언젠가는. 물론 거창하게 말고 진짜 쪼그마한 갤러리 빌려서 해보고 싶어. 아는 사람들에게 연락 돌리고 파티 하는 것처럼 조촐하게 모여 같이 보고 싶어. 언젠간 그렇게 될까? 뭐 내가 맘먹기에 따라 다르지. 프로화가가 되겠다는 것도 아닌데.

암튼 너에게 진즉에 이 이야기를 했어야 했는데 많이 늦어져서 미안해. 너한테도 내 그림을 한 번 보여주고 싶어.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너가 내 그림을 먼저 보면 내 편지를 읽지 않아도 내가 나아졌다는 걸 이제는 괜찮다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엘라, 고마워. 그동안 내 이야기를 들어줘서. 사실은 너밖에 이야기 할 사람이 없었어. 너랑은 고작 일 년을 함께 했던 사이일 뿐인데 너에게 편지를 쓰면 꼭 품에 안겨 엉엉 울면서 하소연하는 것 같아서 좋았어. 고맙다. 친구야. 그리고 언젠가는 정말 용기 내어서 내 그림도 내 편지도 부칠 수 있기를.

너는 나를 아직도 기억할까? 잘 지내. 정말 다시는 너에게 힘든 이야기를 꺼내는 날이 오지 않기를. 그리고 그런 날이 와도 내가 이제는 잘 헤쳐 나갈 수 있기를. 너한테만은 좋은 일만 항상 있기를.

2006년의 엘라에게

2010년의 내가.



태그:#취업준비, #백수, #취업, #퇴사, #면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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