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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듣고 보니 마치 정말 한 마리의 백조를 보는 느낌이다.
▲ 백조다리. 이름을 듣고 보니 마치 정말 한 마리의 백조를 보는 느낌이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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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껏 들떠 있었다. 북해도의 겨울 밤하늘을 감상하며 즐기는 온천이라니. 흐린 날씨 때문에 별가루가 쏟아지진 않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혼탕은 은근하게라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노곤해진 몸에 궁극의 안락함을 선사한다던 찬사가 빗발치는 신세계를 겪어보고 싶었다. 더없이 낭만적일 것이 분명했다. 경험해 보지 않은 미지의 영역, 어쩌면 그 상상력이 본 여행보다 더 달달한 맛이 날지 모른다.

깔끔한 현대식 시설보다는 투박한 전통 방식을 경험하고 싶었다. 내가 선택한 곳은 열을 지은 붉은 전등들이 인상적인 소금 온천이었다. 사박사박 내리는 눈 위에 무명의 발자국을 남기고 들어가자 훈기 때문에 안경엔 김이 서렸다. 데스크에선 손님을 맞는 공손한 인사가 흘러나오고, 주변 상황을 재빨리 해석하려는 두 눈은 분주히 움직였다. 별 어려운 기색 없이 열쇠를 받고, 사물함에 옷을 수납한 다음 탕에 들어갈 채비를 마쳤다.

보통 남탕, 여탕, 가족탕 등 세 가지로 나뉘어져 있다.
▲ 온천입구. 보통 남탕, 여탕, 가족탕 등 세 가지로 나뉘어져 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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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여탕과도 비슷한 일본의 탕 문화다. 목욕용품과 수건을 손수 준비해야 했다. 수건 한 장으로는 돌아다닐 때 중요한 부위를 가려야 한다. 무의식 중에 서로의 알몸을 보게 되는 남자끼리도 남세스러울 수 있지만 그보다는 깨벗고 있는 남자들 틈을 무심하게 들락날락하며 청소하는 아주머니에 관한 에피소드를 익히 들었던 터다.

샤워를 하고, 우선 실내 탕들 중에 이리저리 손을 집어넣어 간을 보다가 가운데로 들어갔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온도다. 마치 알몸으로 새 홑이불을 덮는 것 같은 보드랍고 따뜻한 느낌이 좋았다. 열탕도 냉탕도 거부한 채 오롯이 중탕에만 있다고 해서 삶까지 미지근한 건 아니다. 뜨거운 열정을 좇아 이곳까지 달려오지 않았던가.

그러거나 말거나 노인들은 죄다 열탕에서 말없이 좌선 수행하고 있다. 치기가 동해도 감히 넘보지 못할 고수들의 안식처다. 괜한 호기심에 무턱대고 발을 넣었다가 고함을 힘겹게 속으로 삭이고 머리카락만 쭈뼛 서며 혼쭐만 났다.

사박사박 내리던 눈이 세상을 하얗게 뒤덮었다.
▲ 겨울밤. 사박사박 내리던 눈이 세상을 하얗게 뒤덮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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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 스프링스의 맛은 역시 야외에 있었다. 몸을 안온한 물속에 그냥 두어 놓으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수중에 잠겨 있는 돌침대 위로 아예 누워 버렸다. 이렇게 진한 남청색의 하늘은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 모질게 추웠던 겨울 밤바람도 내 얼굴에 와서는 살갑게 쓰다듬어주고는 사뿐히 지나갔다. 아까와는 다른 느낌의 파르르 떨림은 그저 이대로 잠들고 싶은 내 눈꺼풀 때문일 것이다. 황홀했고, 감격했다. 나에게 이런 행복이 찾아오다니….

온천에 몸을 푸욱 담구고 샤워하기를 반복했다. 그 사이 말로만 듣던 청소 아주머니가 실체를 드러냈다. 얼추 쉰은 되어 보이는 그녀는 손님들이 불편해 하지 않도록 동선을 바삐 그리며 성실히 바지런을 떨었다, 그녀가 하는 말이라곤 고개를 숙이고 나직이 내뱉은 '스미마셍'뿐이었다.

나에겐 하지 않아도 될 과한 액션이었지만 그녀 입장에선 손님들을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개의치 않아 했다. 나 역시 적응을 마친 뒤론 무덤덤하게 느껴졌다. 수건으로 중요 부위만 가리면, 심지어 둔부가 다 드러난다 해도 어디에서 갑작스레 나타나든 별 상관없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성적인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온천을 마치고 시원하게 한 잔 들이키는 우유 맛이 고소하다.
▲ 수분이 필요해. 온천을 마치고 시원하게 한 잔 들이키는 우유 맛이 고소하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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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한창 샤워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여직원 한 명이 남탕 실내로 들어와 일을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녀가 젊었다는 데 있다. 아무리 보수적으로 유추해도 서른은 넘어 보이지 않았다. 민감한 나의 오해였을까? 그녀는 전 근무자보다 더 위축되어 보였다. 아예 땅바닥만 보며 다니는 것이다. 어떤 연유로 험할지도 모를 이런 일을 하는 걸까?

남의 삶을 함부로 재단하는 것은 매우 경솔한 태도지만 어쩐지 나는 그녀가 조금 걱정이 되었다. 나이 든 여성이야 돌발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컨트롤이 가능한 노련함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일도 서툴러 보이는 젊은 여성에게는 예상치 못한 사고로 마음에 큰 생채기가 날 수도 있다. 탈의한 남성들이 득실대는 민감한 장소에서 그녀는 충분히 섹스어필할 만한 젊은 세대다. 그러니 질 낮은 변태를 만나지 말란 법이 없잖은가.

온천에서 실수로 내 중요 부위가 노출된다면 나로서는 꽤나 민망하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그녀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다. 만에 하나 수건을 놓치거나 위치파악을 하지 못해 무방비 상태에서 그런 상황에 맞닥뜨린다면 그녀가 더 민망해 할 것이다. 그러니 이제야 수건 한 장의 소중함을 알 것 같았다. 왜 탕 밖으로만 나오면 그렇게들 가리려고 신경 쓰는지. 그것은 여성에게 보이기 싫은 자신들의 부끄러움보다는 약자인 여성에게 보여서는 안 될 최소한의 윤리적 장치이기 때문이리라.

일본인들의 ‘등’ 사랑은 레스토랑, 술집, 마트 등 흔히 볼 수 있다.
▲ 붉은 등. 일본인들의 ‘등’ 사랑은 레스토랑, 술집, 마트 등 흔히 볼 수 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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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탕에서 나와 옷을 갈아입는 마지막까지 행여 여직원을 성가시게 하지 않을까 조심하며 민첩하게 움직였다. 홀에 나가 시원한 우유 한 잔을 원샷으로 들이켰다. 그렇게 고소할 수가 없었다. 몸이 참 편하고, 가벼워졌다. 북해도의 온천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들어가기 전에는 그렇게 추웠는데 전신을 푹 담그고 나오니 반팔만 입고 밖으로 나와도 한동안 따뜻하게 세상을 안을 수 있었다.

나오는 길에 온천의 붉은 전등을 보면서 여직원들의 노고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만약 다음번에도 동일하게 쾌적한 온천을 이용할 수 있게 된다면 그건 그들을 존중함에 대한 작은 답례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http://blog.naver.com/miracle_mate
현재 위치 : '설국'의 배경인 유자와 가는 중



태그:#일본여행, #자전거여행, #세계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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