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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고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2500년 전 공자가 <논어>에 처음으로 적은 문구입니다. 2013년 대한민국도 '배우고 익히는' 열기가 뜨겁습니다. 청년들은 취업을 위해, 아이들은 보다 나은 성적을 위해, 직장에선 살아남기 위해 공부하고 또 공부합니다. 한 마디로 공부에 빠진 대한민국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열심히 배우고 익혔는데 즐겁지 않습니다. 중요한 걸 놓쳤기 때문입니다. 함께 모여 '즐거운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이들 사례를 통해 공부가 왜 즐거운지 살펴봅니다. - 기자말

믿기지 않겠지만 대한민국 고등학생들이다. 서로 발표하려고 손을 들고 있다.
▲ "선생님. 저요. 저. 제가 할 게요." 믿기지 않겠지만 대한민국 고등학생들이다. 서로 발표하려고 손을 들고 있다.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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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제가 답할게요."

국어시간, 선생님 역할을 맡은 류수아(17) 학생이 교단에 서서 질문을 던졌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십여 명의 학생들이 서로 답하겠다며 손을 들었다. 누구를 택해야 할지 난감했다. 손을 든 학생 중 하나가 "그럼 가위, 바위, 보로 정하자"는 제안을 했다. 모두들 수긍하고 동시에 '가위, 바위, 보'를 외쳤다. 이날 물음은 '시평(時評)이란 무엇인가'였다. 고백 하나 하면, '시에 대한  비평(詩評)'이라 생각했던 기자의 판단은 여지없이 틀렸다. 답은 '시사에 관한 평론'이었다. 한자에서 차이가 났다.

지난 19일, 서울 관악구 봉천동 중턱에 자리한 인헌고등학교를 찾았다. 학교는 강감찬 장군이 태어날 때, 별이 떨어져 '낙성(落星)'이란 이름이 붙었다는 오래된 동네에 있었다. 굽이진 골목을 한참 돌고서야 교문에 다다랐다. 교실에 들어서자 한 가지 다른 점이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봐도 책상과 의자가 서른 개 안팎이었다. 이유를 물으니 학교는 2011년 '혁신학교'로 지정돼 학급당 25명 내외로 구성돼 있었다.

"특이한 국어시간? 모두가 선생님!"

전 세계 하나 뿐인 고등학생들이 만든 '탈핵 시집'
▲ 탈핵의 노래 전 세계 하나 뿐인 고등학생들이 만든 '탈핵 시집'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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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쓴 시를 감상하고 있다
▲ 시를 읽다 본인이 쓴 시를 감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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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헌고등학교 국어시간엔 모두가 선생님이 된다
▲ 모두가 선생님 인헌고등학교 국어시간엔 모두가 선생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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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인헌고등학교 에너지 수호단 단장으로 소개한 김희선(17) 학생은 국어시간을 한마디로 '특이하다'고 평했다.

"대박, 완전 특이해요. 정말 이것저것 다양하게 하고 있어요. 자서전부터 시와 소설쓰기, 지난 여름엔 영화도 만들었어요.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이런 거 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장난 아니죠?"

정말 그랬다. 수업이 시작되자 인헌고등학교 국어 담당 김은형 교사는 학생들 개개인에게 <탈핵의 노래>라 적힌 시집을 나눠줬다. 그는 시집을 건네며 "전 세계에서 하나뿐인 고등학생이 만든 탈핵시집"이라 말했다. 학생들은 조심스레 책장을 넘겼다. 이유가 있었다. 그 안엔 그간 공들여 작성한 생애 최초의 자작시가 있었다. 그것도 '탈핵'이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로 작성된 시였다. 한줄한줄 읽어 내려가는 눈빛에서 기대와 흥분이 엿보였다.

이어 서로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이어졌다. 마음에 드는 시 한 편을 골라 추천하는 방식이었다. 자연스레 추천이 몰린 시가 등장했다. 어디선가 "우리 효정이 문학소녀구만"이란 소리도 들려왔다. 여느 고등학교 교실에선 발견하기 어려운 밝은 기운이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이 모든 과정을 학생들 스스로 해냈다는 것. 무슨 의미냐, 3인 1조로 구성된 학생들은 교사 역할을 수행했고, 2시간 동안 이어진 수업을 무리없이 진행했다. 그런데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의 표정은 당연하다는 모습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들뿐 아니라 모든 학생이 예외 없이 한 학기에 최소 한 번은 선생님이 돼 수업을 책임졌다. 모든 학생이 선생님이 되고 학생이 됐다. 수업을 준비하고 참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모습이 만들어졌다. 김은형 교사는 옆에서 수업이 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조언만 해주고 있었다.

시집 발간하고, 영화 찍고, 연극하고, 소설 쓰는 아이들

학생들은 선생님을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다"고 했다
▲ 김은형 선생님이요? 학생들은 선생님을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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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은 자신의 시와 소설, 자서전을 국어노트에 적었다
▲ 전 세계 한권 뿐인 국어노트 학생들은 자신의 시와 소설, 자서전을 국어노트에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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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좀 바라봐~' 학생들의 재치가 돋보인다
▲ 특별한 국어노트 '날 좀 바라봐~' 학생들의 재치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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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헌고등학교 학생들의 국어시간은 분주했다. 국어 담당 김은형 선생은 학생들이 무언가 생각하고 창조하고 만들어 낼 수 있도록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었다. 물론 과정 속에 강압이나 강요는 없다. 자발적으로 학생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충분한 이유를 설명하고 강조할 뿐이었다.

실제로 학생 중 한 명은 김은형 교사를 쫒아 일부러 인헌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고민수(17)군의 경우인데, 고민수 학생은 사당중학교 시절, 김은형 교사를 처음 만났다. 그전까지 스스로 말하기를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존재'였다. 그런데 김 교사를 만나고 모든 것이 달라졌다. 시를 쓰고 소설을 쓰며 영화도 찍었다. 그리고 3년, 고민수 학생은 얼마 전 <시간의 길을 걷다>라는 창작시를 썼다.

<시간의 길을 걷다>

고통스럽기만 한 인생일 지라도                        
시간 지나면 익숙해지고

즐겁기만 한 인생일 지라도
시간 지나면 익숙해진다

잊고 싶기만 한 기억일 지라도
시간 지나서 돌아보게 되면

추억이라는 제목을 지닌
한편의 수필이 되어있다

고민수 학생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이 아니었다. 다들 자신만의 국어 노트 한 권씩 갖고 있었다. 50분 수업 사이 쉬는 시간이 됐는데도, 자리에 앉아 손글씨로 빼곡히 뭔가를 적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수업 때 함께 논의한 내용을 정리하거나, 자서전을 보완하는 것.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시간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 엿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방과 후엔, 제자가 선생님 인터뷰를...

방과 후 학생들은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준비했다. '궁서체로'
▲ 학생들의 인터뷰 요청 방과 후 학생들은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준비했다. '궁서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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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오후 4시 30분에 모든 정규 수업을 마쳤다. 그런데 종이 치자마자 여학생 4명이 교무실에 찾아왔다. 김은형 교사와 인터뷰 하고 싶다는 부탁 때문이었다. 흥미로웠다. 제자들이 자발적으로 김 교사의 책 <서른 일곱 명의 애인>을 읽고 저자 인터뷰를 요청한 것이다. 이들은 학교 독서모임 학생들이었다.

네 학생은 미리 준비한 질문을 쉴새 없이 던졌다. '선생님의 첫 수업', '사제지간에 가장 중요한 점', '어떻게 이런 국어 수업을 생각하게 됐냐'는 등의 질문이 나왔다. 백미는 다소 철학전인 '좋은 선생님'이란 무엇인가란 물음. 질문 자체도 훌륭했지만, 김은형 교사의 답에 울림이 가득했다.

"선생님은 기다려주는 사람이에요. 우리는 우리 내면에 뭐가 있는지 어떤 능력이 숨어있는지 모르니까요. 속 안에 숨어있는 것을 끌어내야죠. 시도 써보고, 자서전도 작성하고, 소설도 써보는 것.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에요. 일단 나를 알고 그것을 키워나가야지. 남이 하란 걸 하는 건 자기를 아는 게 아니잖아요."

그랬다. 인헌고등학교 국어수업은 한 마디로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의 표정이 진지하고 밝았던 것이다. 이 과정은 타인의 강요가 필요 없었다. 오직 자신과의 대화가 가장 중요했다. 김은형 교사는 그 과정을 지켜보고 돕는 사람이었다.

학생들은 끝으로 김은형 교사에게 추천 도서를 부탁했다. 생경했다. 기자의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문학책보다는 문제집 한 권을 푸는 게 우선이었다. 아무도 책을 먼저 읽으라는 말이 없었다. 윤동주를 말하면, '서시, 저항시인'이 자동으로 나와야 했다. 그런데 김은형 교사는 그가 '왜 그런 삶을 살았는지, 그의 작품에 왜 저항이 묻어나는지'를 고민하게 했다. 학생들에게 추천한 책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머릿속에 저자와 제목, 어렴풋한 주제만 남은 최인훈의 <광장>이었다. 기자 역시 조심스레 그의 이름 석자를 수첩에 적었다. '즐거운 공부'를 이어가는 인헌고 학생들과 김은형 교사가 부럽고 고마웠다.


태그:#김은형, #인헌고등학교, #혁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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