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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간절한 맛이 있다. 찬 바람이 스산한 요즘, 뜨신(뜨거운) 기운을 오롯이 품고도 김 하나 안 내며 시침을 뚝 떼는 남도의 매생이국 한 사발이 그립다. 

사실 전라도 음식이 좋다는 것, 전라도 살 적엔 몰랐다. 전라도에서, 전라도 사람끼리, 전라도 음식자랑 하는 꼴을 못봤다. 그저 "넘(남)들이 이짝(쪽) 음식이 맛나다고 한께 그냥 그런갑다 하제, 우덜(우리들)끼리는 맨 먹는 것인디 좋으믄 얼마나 좋겄"는가.

서울 생활 6개월, 26년을 전라도놈으로 살다가 어쩌다 마주친 서울살이, 인자(이제)서야 먹을 것 생각에 속이 헛헛하다. 아무개 선배의 "저놈 맨 전라도밥 먹다가 서울밥 먹으러 간단디, 어째야 쓰까"라는 말이 전라도의 휜 상다리를 그립게 한다.

김문심 아짐이 차린 홍어 한 상. "크~아! 홍애국. 눈, 코, 입은 물론이거니와 여기저기 막힌 감각을 펑펑 요란하게 뚫어댄다. 푸른 기운이 남아 있는 보리순과 냉이는 씹을수록 달큼한 봄나물 맛을 내고, 삭힌 홍어국물을 옴싹 뒤집어쓴 배추시래기가 입 안에서 물큰하다. 참 기적 같은 삶이요, 놀라운 삭힘의 맛이 아닌가. 심해를 너울대던 생선의 내장이 깊은 산골 아낙의 고단하고 애끓는 삶에 위안이 되었으니 말이다."
▲ 막힌 감각을 요란하게 뚫는 홍어 한 상 김문심 아짐이 차린 홍어 한 상. "크~아! 홍애국. 눈, 코, 입은 물론이거니와 여기저기 막힌 감각을 펑펑 요란하게 뚫어댄다. 푸른 기운이 남아 있는 보리순과 냉이는 씹을수록 달큼한 봄나물 맛을 내고, 삭힌 홍어국물을 옴싹 뒤집어쓴 배추시래기가 입 안에서 물큰하다. 참 기적 같은 삶이요, 놀라운 삭힘의 맛이 아닌가. 심해를 너울대던 생선의 내장이 깊은 산골 아낙의 고단하고 애끓는 삶에 위안이 되었으니 말이다."
ⓒ 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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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풍년 <월간 전라도닷컴> 편집장은 고향과 함께 문득 떠오르는 간절한 맛을 찾아 3년째 전라도 곳곳을 돌고 있다. 이를 토대로 그동안 <월간 전라도닷컴>에 연재한 맛기록을 모아 <풍년식탐>(르네상스, 2013)을 내놨다. 저자 이름을 따다 책 이름을 지으니 여간 잘 맞는 게 아니다.

'식탐'의 탐은 탐(貪)하려는 게 아닌 찾으려는(探) 시도다. 스스로도 전라도 사람인 황 편집장은 책을 통해 "영혼의 헛헛함까지 달래주는 질박하고 정직한 맛의 진수"를 선보인다.

이 마을 저 마을 기웃거리며 찾은 엄니들의 소박한 밥상

황풍년, <풍년식탐>(르네상스, 2013).
 황풍년, <풍년식탐>(르네상스,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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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년식탐>은 맛기행이다. 하지만 저자는 식당을 찾지 않는다. 대신 책에는 27가지의 음식과 함께 26명의 '아짐', 1명의 '아재'가 등장한다. "여럿의 혀끝을 얼러대고 비위를 맞춰야만 하는 대중식당에서 봄·여름·가을·겨울, 저마다 맞춤하게 식욕을 채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 저자는 "전라도 곳곳 이 마을 저 마을을 기웃거리며 엄니들의 소박한 밥상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전라도 어매들이 차린 풍성하고 개미(맛에 있어서 보통 음식맛과는 다른 특별한 맛으로 남도 음식에만 사용되는 순 우리말)진 밥상'이 저자가 탐하는 대상이다.

완도의 벗들에게 전화로 김국을 수소문했는데, 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위대한(완도 신흥사 템플스테이 담당)씨가 선선하게 어머니의 밥상으로 초대를 한다는 기별이 왔다. 그리하여 완도군 군외면 불목리 영흥마을 황성순 아짐의 집으로 달려갔다. …… "아들이 해주란디 해 줘야제"라며 기다리던 아짐은 행여 밥 때를 놓칠세라 된장물을 끓이며 요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 <풍년식탐>, 28쪽

미디어에 등장한 가공된 맛집, 그리고 식당마다 덕지덕지 붙어 있는 'TV 출연' 알림판이 우리의 눈과 코와 혀를 얼마나 흐리고 있나. 반대로 "돈 받고 팔 일도 없고, 누구한테 치사 받으려는 뜻도 없는" <풍년식탐> 아짐들의 음식엔 과장이 없다. 서로 '내가 잘났네' 떠드는 음식 프로그램의 홍수 속에서 "음마? 이름은 뭐더게(무엇하게) 물어봐싸? 넘덜한테 내 놀 만한 음석(음식)이 아니여"라며 한사코 '맛자랑'을 거부하는 아짐들, 이 책이 지닌 힘이다.

책은 계절 별로 6, 7개의 음식을 소개한다. 저자인 황 편집장이 사시사철 아짐이 사는 마을을 직접 찾아가 그곳을 대표하는 음식을 먹은 결과다. 그는 봄에 나물향을 맡았고, 가을에 전어를 맛봤다. 홍어를 먹으러 흑산도 가는 배에 올랐고 서대를 먹으러 여수를 찾았다. 저자는 관용구처럼 사용되는 '봄나물', '가을전어', '흑산 홍어', '여수 서대'와 같이 관념 속에서 노니는 음식의 형상을 직접 몸 앞에 가져다 둔다. 그리고 기온, 땅, 재료, 요리 과정, 상차림, 맛보기까지 직접 체화해 책에 담았다.

고광자 아짐의 머위전. "안 그래도 입 안에 침이 괴어 더는 못 참을 지경이다. 부추전, 머위전을 후후 불어가며 지범지범 먹는다. 입 안 가득 자근자근 씹히는 부추가 차지기도 하다. 처음 먹어보는 머위전은 이파리와 줄기 맛이 사뭇 다르다. 식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워 감쪽같이 스러져버린 이파리에 이어지는 줄기는 깨무는 순간 사근사근 쓴맛을 우려낸다. 쌉쌀한 맛이 기름기를 잡아먹어 느끼함도 덜어낸다."
 고광자 아짐의 머위전. "안 그래도 입 안에 침이 괴어 더는 못 참을 지경이다. 부추전, 머위전을 후후 불어가며 지범지범 먹는다. 입 안 가득 자근자근 씹히는 부추가 차지기도 하다. 처음 먹어보는 머위전은 이파리와 줄기 맛이 사뭇 다르다. 식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워 감쪽같이 스러져버린 이파리에 이어지는 줄기는 깨무는 순간 사근사근 쓴맛을 우려낸다. 쌉쌀한 맛이 기름기를 잡아먹어 느끼함도 덜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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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단 하나 뿐인 음식... "멋도 맛도, 암껏도 모르는 것들이"

목차의 음식 이름 앞엔 이름 세 글자가 함께 적혀 있다. 직접 음식에 손을 담근 아짐의 이름이다. 그러니까 <풍년식탐>에 담긴 음식은 유일한 것이다. 이인심 아짐의 매생이국, 김상배 아재의 된장물회, 정영희 아짐의 서대찜, 남상금 아짐의 전어구이를 어디서 맛볼 수 있겠는가. 덕분에 아짐 한 명, 한 명의 고집을 엿보는 것도 솔찬히 재미지다.

"서대는 손질해서 살짝 얼려서 회무침을 해야 돼요. 썰어서 막걸리에 주물러야 제맛이고. 또 뼈를 넣어야 고소하고 꼬득꼬득 씹혀요. 야채 안 넣어요. 양파하고 풋고추 좀 넣지. 살만 씹는 회를 옛날 어르신들은 안 좋아했어요." 부드러운 살점만 찾고, 상추며 오이며 잔뜩 넣은 식당의 회무침을 진짜로 아는 요즘 사람들은 "멋도 맛도, 암껏도 모른다"는 말씀이시다. - <풍년식탐>, 200쪽

정영희 아짐이 고른 여수 서대. "서대는 손질해서 살짝 얼려서 회무침을 해야 돼요. 썰어서 막걸리에 주물러야 제맛이고. 또 뼈를 넣어야 고소하고 꼬득꼬득 씹혀요. 야채 안 넣어요. 양파하고 풋고추 좀 넣지. 살만 씹는 회를 옛날 어르신들은 안 좋아했어요."
 정영희 아짐이 고른 여수 서대. "서대는 손질해서 살짝 얼려서 회무침을 해야 돼요. 썰어서 막걸리에 주물러야 제맛이고. 또 뼈를 넣어야 고소하고 꼬득꼬득 씹혀요. 야채 안 넣어요. 양파하고 풋고추 좀 넣지. 살만 씹는 회를 옛날 어르신들은 안 좋아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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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와 음식을 앞에 두고 내뱉는 아짐들과 저자의 표현력도 그렇게 오질 수가 없다. "(돼지고기를) 사르라니 볶아"라는 이인심 아짐과 "(죽순튀김은) 놀짱흐니 꾸워야 맛있제"라는 천인순 아짐의 말엔 정확히 알아들을 순 없지만 의미하는 바를 추리하게 하는 묘미가 있다. 말에 얼추 모양이 담긴 게 언어의 진수를 보는 듯하다.

질 좋은 홍어애를 두고 김문심 아짐의 딸 주서영씨는 "봉께로(보니까) 때깔도 노릿노릿험서 낭창낭창헌 것이 존놈(좋은 것)으로 줬드랑께"라고 말한다. 홍어애를 보고 기껏해야 '야들야들'이란 표현을 떠올리는 이들에게 '낭창낭창'이란 표현의 등장은 신세계다. 한 발 더 나아가 저자는 "(주씨의 말에서) 귄이 짝짝 흐른다"고 감탄한다. 영락없는 전라도 사람이다.

한상 떡 하니 내놓고도 "차린 게 없어서 미안시러와 어찌까"

<풍년식탐>에 등장하는 아짐들의 한 상. "아짐이 토란탕 한 그릇을 떠 주신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토란탕을 한 숟가락 떠서 호호 불다가 입에 넣는다. 고소하고 감미로운 수프처럼 고운 질감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들깨물에서 한 번 더 삶아진 알토란은 더욱 더 보드랍게 으깨어진다. 뜨뜻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지면서 후끈해진다."
 <풍년식탐>에 등장하는 아짐들의 한 상. "아짐이 토란탕 한 그릇을 떠 주신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토란탕을 한 숟가락 떠서 호호 불다가 입에 넣는다. 고소하고 감미로운 수프처럼 고운 질감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들깨물에서 한 번 더 삶아진 알토란은 더욱 더 보드랍게 으깨어진다. 뜨뜻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지면서 후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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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년식탐>이 보여주려는 것은 아짐이요, 어머니다. 전라도는 장소일 뿐 책의 주인공은 우리네 엄니의 손이다.

생판 모르는 식객을 맞으면서도 한상 떡 하니 내놓는 아짐의 마음, 그러면서도 "미안시러와 어찌까. 차린 것이 없어서"라고 말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풍년식탐>은 담고 있다. 음식 재료값이라고 건넨 저자의 손을 뿌리치며 대신 그 손에 각종 음식을 쥐어주는 모습은 <풍년식탐> 아짐들의 공통점이자 우리네 어머니의 공통점일 것이다.

배추 400포기를 밭에서 길러 따낸 뒤 혼자 절이고 씻어 김장을 담는다는 아짐이다. 그 많은 김치가 누구의 몫인지, 빤한 답이 쿵 가슴을 친다. 크고 작은 비닐봉지와 가지가지 보자기를 엽렵하게 간수했다가 사시사철 먹을 것들을 자식들에게 바리바리 싸서 보낸다. 평생 지성으로 땅을 일구고 씨를 뿌려 가꾸어 자식들을 먹이고 이웃과 나누어온 게다.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섬긴다."(삼봉 정도전) 그래! 아짐 역시 자식새끼들의 입에 들어가는 먹을 것이 기실 하늘이었으리라. - <풍년식탐>, 110쪽

<풍년식탐>의 주인공은 아짐들이다. "오메! 어찌까. 끄니(끼니) 때가 지났는디 시장흐겄네, 짜잔해도 기냥 한술 허실라?"
▲ "짜잔해도 한술 허실라?" <풍년식탐>의 주인공은 아짐들이다. "오메! 어찌까. 끄니(끼니) 때가 지났는디 시장흐겄네, 짜잔해도 기냥 한술 허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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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스스로도 책 머리말에 자신의 어머니 이름 세 글자를 적는다. 그러면서 "당신을 갉고 삭혀낸 눈물의 끼니끼니가 제 몸과 맘을 지어냈습니다"라고 고백한다. <풍년식탐>에서 누구에게나 하나쯤 있는 간절한 맛을 느껴보는 건 어떨까.


풍년 식탐 - 전라도 어매들이 차린 풍성하고 개미진 밥상

황풍년 지음, 르네상스(2013)


태그:#황풍년, #풍년식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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