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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이 살기에 팍팍한 세상이다. 더군다나 경력 단절 여성이 행복하게 일 할 수 있는 질 좋은 일자리는 턱 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때문에 창업으로 눈을 돌리는 여성들이 많다. 그들을 응원한다.

이은정 대표는 본인을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소극적인 건 아니다. 내면에는 열정적인 야망을 품고 있다.
▲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고백하고 있는 이은정 대표 이은정 대표는 본인을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소극적인 건 아니다. 내면에는 열정적인 야망을 품고 있다.
ⓒ 김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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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있는 남편과 속깊은 아이들 뒷바라지를 하며 평범한 가정주부로 지냈다. 행복했다. 어느날 출장을 떠난 남편은 그 길로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들이 있었기에 슬픔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아니 파도처럼 밀려오는 슬픔은 가슴 속으로 꾹꾹 밀어넣어야 했다. 살아야 했기에 무작정 창업에 도전했고 고군분투했다.

창업한 지 3년이 지난 지금은 월 매출 5000만 원을 달성하며 직원도 2명으로 늘었다. 남들은 그 정도면 성공했다고 한다. 하지만 국내 최초로 항균지퍼백을 개발해 판매하고 있는 피그비코리아의 이은정(47) 대표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3년 전 이 무렵, 해외출장중인 남편의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뇌출혈로 그만..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습니다."

남편의 빈자리는 컸다. 남겨진 아들 둘을 바라보며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했다. 친정을 포함해 아무하고도 연락하고 싶지도 않았고 딱 그냥 눈을 감았으면 했다. 지독한 우울증으로 1년여간 병원을 들락날락 거렸다. 어느날 아이들이 아침에 컵라면을 먹고 등교하는 모습을 보고는 정신이 번쩍했다.

"하지만 아이가 있잖아요. 내 마음대로 안 되더군요. 내가 이러면 아이들은 어떻게 살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엄마의 힘이라는 게 있어요. 삶의 의욕은 없었지만 아이들을 위해서 일어났어요."

이십 년 넘게 전업주부로 지냈으니 경력이 단절돼 일자리를 구하기는 어려웠다. 이제와서 직장을 구한다곤 해도 대부분 식당이나 파출부 같은 일밖에는 구할 수 없을 듯했다. 차라리 작게나마 나만의 사업에 도전하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제가 워낙 지퍼백 매니아였어요. 예전에는 지퍼락같은 제품을 마트에서 사서 쓰다 보면 일회용에 그치는 점이 불만이었죠. 세균오염의 우려 때문에 재사용하기에도 찝찝했고요. 이걸 재사용하면서 손쉽게 음식같은 것도 넣었다 먹을 수도 있고, 아이들에게도 안전한 지퍼백이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에 직접 개발하게 됐어요."

평범한 지퍼백으로는 차별화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평소 불편했던 부분을 도입한 제품을 개발하기로 마음 먹었다. 주부의 마음이었기에 어떤 부분이 불편한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항균 처리를 한 지퍼백을 개발해 상표등록을 했다. 항균지퍼백은 이은정 대표가 업계 최초로 개발한 제품인 셈이다.

항균처리가 되어 있는지라 유아용품에도 안전하게 사용할 수가 있다. 기존의 지퍼백은 그냥 종이 봉투의 개념이라 휴대용으로 들고다니기도 번거로웠다. 그 고정관념을 깨고자 밑변을 M자 형태로 만들어 바닥에 내려놓기 쉽게 했다. 손잡이까지 달아 캠핑이나 여행할 때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탄생시켰다. 우수한 항세균 효력과 항균지속력을 갖추고 FDA 및 KFDA 규정에 따른 공인시험 성적서도 획득했다.

품질을 인정받아 입소문이 퍼지면서 매출이 점점 늘어났다. 창업센터 관계자는 초보 창업자가 1~2년 안에 월 2000만 원 정도의 매출을 올리면 성공적인 시작이라 할 만하다고 했다. 우울증으로 이불속에 파묻혀 있던 이은정씨. 그 후로 3년이 지난 지금, 자신을 돌아보니 월 매출 5000만 원을 달성하는 사업체의 어엿한 대표가 되어 있었다.

"사람 앞날은 정말 모르는 것 같아요. 남편을 먼저 보낸 후 매일매일 우울하다고만 앉아 있었는데... 예전에는 안온한 온실 안에서 언제까지 골프만 치면서 살 줄 알았거든요. 남편은 삼성반도체 연구원이었어요. 첫사랑이었던 셈이지요."

갑작스럽게 남편을 저 세상으로 보내고

첫 직장이고 첫 사랑이었다. 남편은 수원에 있는 대기업 반도체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있을 때 만났다. 직장 동료였다. 22살 때 사랑을 시작해서 26살 무렵 결혼을 했다.

"학창시절부터 그냥 평범한 왈가닥이었어요. 로맨스 소설을 좋아하고 남자도 좋아하는?(웃음). 이른 나이에 결혼한 거죠. 딱히 이렇다 할 야망도 없었어요. 행복한 가정주부가 되는 것이 꿈이었을 뿐이죠. 이런 내가 사업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네요."

남편 직업이 잘나가는 반도체 연구원이다 보니 외국 지사로 발령을 받는 날이 많았다. 그러면 가족도 함께 동행해 그곳에서 얼마간 살았다. 그래서 외국에서 지낸 기간이 많았다. 대만에서도 3년간 살고, 제주도에서도 몇 년 간 살았다. 어느 나라에서든 몇 년 이상을 산 적이 거의 없다. 어디서 가장 오래 살았냐고 물으니 "지금 살고 있는 이곳 경기도 일산에서 가장 오래 사는 것 같네요. 남편 보내고 살았으니 한 5년 됐나요?"라고 말했다.

너무 튀지도 않고, 그렇다고 경제적으로 궁하게 산 것도 아니었다.

"그냥 딱 중산층 정도로 살았어요."

제주도에서 살 때였다. 외국으로 출장을 간 남편의 회사로부터 어느날 연락이 왔다. 남편이 뇌출혈로 현지에서 사망했다는 연락을 받고는 그저 하늘이 노랬다. 청천벽력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슬퍼할 겨를도 없었어요. 남겨진 아이들과 열심히 사는 것이 남편의 뜻이려니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막했죠. 할 게 없었고, 할 줄 아는 게 없었으니까요. 우울증에도 걸려서 치료를 1년 정도 받기도 했어요. 아직 완치된 건 아니고요. 요새는 조울증 같아요.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 해요.(웃음)"

직장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차라리 내가 직접 뭔가를 만드는 일에 도전해보자는 생각에 용기를 냈다.

"처음에는 음식점을 할 생각이었어요. 제가 요리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남들 다하는 건 그만큼 성공하기도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에는 무엇을 만들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어요. '내가 뭘 좋아하는지' '무엇에 관심 있는지'를 글로 쓰면서 생각을 정리해봤지요. 제가 주방에 있는 시간을 행복해한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지퍼백 마니아기도 해서 기존 지퍼백의 불편한 점을 평소에 절절히 느끼고 있었죠. 창업이란 발상의 전환을 통해 일상의 불편함을 해소해주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해볼 만하다고 했죠."

10시쯤 출근하자마자 밤새 들어온 주문을 체크하고, 거래처를 관리한다. 인터넷쇼핑몰은 이것저것 할게 많아 하루가 분주하게 지나간다.
▲ 업무를 보고 있는 이은정 대표 10시쯤 출근하자마자 밤새 들어온 주문을 체크하고, 거래처를 관리한다. 인터넷쇼핑몰은 이것저것 할게 많아 하루가 분주하게 지나간다.
ⓒ 김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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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올해 47살이다. 3년 전인, 44살에 초보 사업가로 새 인생을 시작한 셈이다. 전업주부였기에 새롭게 뭔가를 하는 것에 대해서 걱정과 두려움은 컸다. 돈이 들어가는 일이고 잘 될지 알수도 없었기에 처음에는 작게 시작하는 게 답이라고 생각했다. 제작비를 최소한으로 들이는 데에 신경을 썼다. 사무실도 어엿한 건물이 아니라 아는 사람에게 빌린 컨테이너에서 시작했다. 자본이 비교적 적게 드는 인터넷쇼핑몰 형태로 시작해 점점 확장해 나가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고 오다가 우연히 '고양시창업지원센터에서 창업을 지원한다'는 포스터를 보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신청서를 작성했다. 그 포스터의 내용은 창업자에게 저렴한 비용으로 사무실을 지원해준다는 것이었다. 오래도록 해본 적도 없는 프리젠테이션을 하던 날에는 심사관과 눈도 못 마주치고 긴장으로 오금이 다 떨렸다. 하지만 다행이 높은 경쟁률을 뚫고 사무실을 얻을 수 있었다.

제대로 모양새를 갖춘 사무실에 앉게 되니 조금 여유가 생겼다. 제품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친오빠가 공장을 운영하는 덕에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제품은 찍어 낼 수 있었지만 제품 개발은 전적으로 혼자 해야 했다. 고난의 연속이었다.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이 직접 재료를 사다 붙이고 자르며 샘플을 만들었다. 말 그대로 '고군분투'했다. 연구 개발 비용으로 돈이 줄줄이 들어갔다. 물건 만들고 도안 작업하고 포장지 제작 등에 들어간 비용이다. 수익이 나는 건 생활비로 쓰지 않고 재투자를 했다. 동시에 몇 가지 일을 하느라 몇 배로 힘들었지만 일하는 건 즐거워 밤샘한 날조차 힘든 줄 몰랐다고 한다.

"지금은 아르바이트하는 아주머니들이 도와주지만 그때는 그런 분들도 없었어요.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넓혀 왔어요. 고양시창업지원센터에서 한 1년 정도 있다가 지금의 사무실로 옮겼어요. "

지금은 일산역 근처에 있는 큰 규모의 신생 빌딩 3층에 입주해 있다. 처음에도 그랬지만 사람들한테 상품을 홍보하는 게 여전히 제일 힘들다고 한다. 지금은 인터넷 쇼핑몰 분야의 베테랑을 직원으로 둔 덕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처음에는 많이 해맸어요(웃음). 누가 무엇을 하고 싶으니 그렇게 해달라고 하면 그게 뭔 소리인지를 몰라서 당황했어요. 걱정도 많았죠. 가끔 라디오에서도 광고를 하라고 연락이 와요. 그런데 제시하는 금액이 커서 섣불리 결정하기도 어렵더라고요. 돈만 있으면 여러 가지 할 수도 있겠지만, 돈없이 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를 고민하던 중 인터넷 카페에 홍보를 하게 됐고, 박람회에도 참가하게 됐어요."

최근에 일산 킨텍스에서 개최됐던 제15회 '맘엔베이비엑스포'에선 고객과 직접 대면하면서 상품 홍보도 하고 사람들의 반응도 바로 접할 수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됐다. 박람회를 마친 후 기진맥진해서 지금도 허리가 욱신욱신하다. 하지만 예상외의 사람들 반응을 접한 건 큰 수확이라고 한다. 일부러 찾아는 사람도 많았다. 어떤 이는 사이트에서 여러 업체의 제품을 써봤는데 그중 그녀의 제품이 제일 좋았다며 치켜세워주었다. 멀리 수원에서 일부러 구매하러 온 사람도 있었다. 박람회에선 몇일 만에 천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박람회를 하면서 또 하나 발견한 건 저의 또다른 모습이었어요. 원체 내성적이라 남들 앞에서면 얼굴이 빨개지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성격이었거든요.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상품 홍보를 열정적으로 하고 있는 저의 모습을 본 것이지요. 또 사람들이 내 말을 듣고 그 상품을 사는 것을 보곤 저도 놀랐지만 학원 갔다 킨텍스에 들른 아들도 그 모습을 보곤 많이 놀랐다고 해요. 마치 신들린 사람 같았다고 하더군요.(웃음)"

아들은 "엄마가 애초에 사업을 했다면 지금은 한 자리 했겠다"는 말을 했다 한다.

아들 둘은 그녀가 일하고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이다. 큰 아들은 서울에 있는 대학 경영학과를 다니다 휴학하고 지금은 군대에 있다. 둘째 아들은 고3 수험생이다. 사업 시작할 무렵에 큰 아들이 고3이었는데 많이 챙겨주지도 못했다. 도시락도 제때 못 싸줬다. 그땐 일에 매달리느라 집안도 엉망이었다.

"아이들이 속이 깊어서 그런지 엄마한테 한번도 반항하거나 실망시키는 언동을 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키운지 자기들이 잘 아는 것 같아요. 내가 복이 있나봐요."

지금까지 묵묵히 믿어준 아들들에게 그저 고마울 뿐이다.

아들들은 지금도 바쁜 엄마를 대신해 청소나 집안일을 많이 도와주려고 하고, 항상 그녀 편이 되어주려고 한단다.

"방학 때 아르바이트로 일을 많이 해줘요. 저는 알바비를 주면서 밤 늦게까지 노동 착출을 하죠 하하. 아이들이 일을 워낙 많이 해서 지금은 지퍼백에 대해 전문가 수준이예요."

그가 조금씩 성장해 갈때마다 아이들도 자랑스러워하며 남들한테 엄마 자랑을 하고 다닌다고 한다.

"나중에 내가 떠나더라도 엄청나게 자랑스러운 엄마는 아니라도 꽤 괜찮은 엄마였다는 소리를 들었으면 좋겠어요."

그는 아침 9시 반에서 10시쯤 출근해서 업무를 시작한다. 지금은 그가 직접 물건을 만들지는 않고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일을 맡기고 있다. 인터넷 홍보하고, 거래처 관리하고, 주문 들어온 상품 발주 등의 업무를 보다가 오후 6시에 퇴근을 한다. 집에 돌아가면 아이들 봐주고 밀린 집안일을 하면 창밖은 어느새 어둠이 짙게 깔린다.

"지금은 엄마가 바쁜 것을 너무 잘 이해하니 자기가 할 일은 스스로 하려고 노력하더라고요. 현재는 아이들 학원에 데려다주는 것만 하고 있어요."

가정주부로 있을 때는 평범한 수준을 넘어서서 아이들에게 엄청나게 신경쓰는 엄마였다고 한다. 지금이야 아이들에게 그때 만큼 신경을 못 써주지만 사랑한다는 말만큼은 여전히 아끼지 않는다.

"사랑한다. 사랑해 라고 말을 하는 게 습관화되어 있어요. 아이가 사랑받는 다는 것을 아니까 엄마 속을 썩히지 않는 것 같기도 해요. 요새 북유럽교육법이 유행인데 제가 알게 모르게 그런 교육법을 실행하고 있는 것 같다고 누가 그러더군요."

아닌게 아니라 그는 원래 지퍼백 이름을 지을 때 스칸디라는 이름을 사용하려고 했다 한다. 근데 어떤 사람이 이미 상표등록을 해놓아 기회를 놓쳤다는 사연을 들려 주었다.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스트레스를 주진 않는다고 한다. 중요한 건 내가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라 믿는다.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게 되면 굳이 좋은 대학을 가라고 강요할 필욘 없다는 생각이다.

"작은 아들은 게임을 할 때 행복하다고 하더군요. 게임기획사라던가..게임해설자라던가..암튼 게임방송국에 취직해서 게임방송을 할 거래요. 큰 아들은 사업을 할 거래요. 음..그것도 좋지만 최소한 돈은 많이 들지 않는 거였으면 좋겠네요. 하하"

작은 아들은 지금 고3이다. 남들에겐 핸드폰을 뺏으려 자녀들과 씨름이 그치질 않는 시긴데 그의 아이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절제를 해줘 너무도 고맙다고 한다. 요새 아이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엄마가 너희들을 섬세하게 돌봐줄 순 없지만, 대신 열심히 살잖아?. 그러니 각자 맡은 일에 열심히 하자. 서로 부끄럽지 않게 말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무것도 몰랐던 자신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것이 신기하다는 이은정 대표. 막막해도 꾸물꾸물 움직이고 도전하니 앞길이 조금씩 보였단다. 여전히 도전하는 과정에 있고 힘은 들지만 그는 새로운 것을 개척하고, 이루어가는 지금이 무척 행복하다고 한다. 피그비코리아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키고 싶다는 원대한 목표도 세웠다.

"즐겁게 일하는 사람을 당해내지 못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 일을 하면서 새삼 깨달았다"는 그녀. 그 열정으로 미루어, 전 세계 주부들이 갖고 싶어 하는 명품 지퍼백이 한국에서 탄생할 날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우리신문' 9호(11월 8일 발간)에도 실린 기사입니다.
(우리신문은 오프라인으로만 발간되는 매체입니다)



태그:#창업, #워킹맘, #사업, #경력단절여성,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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