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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살갗이 뜯어질 만큼의 차가운 온도쯤이야 겨울의 트레이드마크라 치부하면 그만이지만, 따뜻한 피로 이뤄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삭막함과 잔인함이 얼굴을 드러낸 그 해 겨울은 소름끼치도록 춥고 무서웠다.

8살 여아에게 추악한 성폭행을 저질러 평생 불구로 살아가야 하는 비극을 안긴 이른바 '조두순 사건'이 이준익 감독의 신작 <소원>과 소재원 작가의 <소원>으로 각각 극장가와 서점가를 강타하고 있다. '들춰내기보단 피해자를 보듬는 쪽에 초점을 맞췄다'는 두 사람의 의도가 고스란히 담긴 <소원>이라는 작품을 먼저 책으로 만나봤다.

그 어떤 표현으로도 아이의 상처 그려내지 않은 작가

이준익 감독의 영화 <소원>의 한 장면.
 이준익 감독의 영화 <소원>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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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두순 사건'의 피해자 아이의 아버지와 충분한 논의 끝에 책을 펴내기로 한 소재원 작가. 직접 피해 아동도 만나고, 그의 아버지를 통해 '이같은 더러운 일이 다시 생기지 않도록 꼭 도움을 주고 싶다'는 강렬한 의지도 받아냈다. '왜 이런 사건이 이뤄졌나'가 아닌 '사건 이후'의 아동 상태와 한 가정이 파괴되고 재기하는 과정을 느릿느릿하게 풀어낸 이 책은 '숲이 아닌 나무를 봐달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시종일관 주장하고 있는 듯 했다.

지윤이라는 이름의 아이가 사라졌다. 경찰과 가족들이 아이를 찾는 장면부터 시작되는 책. '제발 나쁜 사람 만난 게 아니기'를 바랐던 경찰과 가족의 기대는 지윤이의 발견과 함께 처참하게 무너졌다.

소재원 작가의 소설 <소원> 표지.
 소재원 작가의 소설 <소원> 표지.
ⓒ 네오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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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사건 당시, 뉴스를 통해 피해 아동이 얼마만큼의 큰 피해를 입었는지는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알고 있기에 작가는 그 어떤 표현으로도 책 속에서 지윤이의 상처를 그려내지 않았다. '어디는 얼만큼 다쳤고, 앞으로는 어떻게 될 거예요' 식의 직접적인 언급은 부러 피했던 것이다.

다만 지윤이의 상처에 가정의 단란함이 파괴되고, 부모가 이혼 위기를 겪고, 아버지가 자살 결심을 하게 된다는 소설의 구조만을 강하게 표현할 뿐이다.

범인을 향한 분노는 지윤이의 가정에 감정을 열심히 이입한 독자들이라도 그 부모만큼 깊지는 않을 터. 작가는 그런 부모의 분노를 소설에서 주로 다루지는 않았다. 지윤이의 상처는 너무나도 아프지만, 살아온 시간보다 앞으로 함께 살아갈 날들이 무수히 많이 남았기에 어떻게든 일어나려는 가족의 의지를 그려냈다.

사건 이후 이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지윤 엄마의 모습. 남들은 '자식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한 나쁜 엄마'라고 손가락질 할 때도 '더 잘 할 거다. 무조건 우리 가정을 지켜낼 거다'라는 다짐을 통해 스스로 강인해지는 길을 택한 그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조두순 사건이라는 틀만 가져온 채, 피해 아동의 가정환경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그려내는 걸 택한 소재원 작가. 생활 환경이 어려웠던 실제 피해 아동의 가정 환경과는 다르게 일반적인 형편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던 가정을 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못살고 열악한 환경에서만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려던 게 아니었을까.

가난해서 만만한 사람들에게만 슬픈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잘 살고 행복하게 살아오던 사람들도 악마같은 사람들이 어느 순간 그 행복을 뺏어갈 수 있으며, 그러니 우리는 모두의 아픔을 제 것 마냥 보듬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싶었던 것 같다.

'○○○ 사건' 자동 필터링 안 되나요


이준익 감독의 영화 <소원>의 한 장면.
 이준익 감독의 영화 <소원>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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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두순 사건'은 처음에는 피해 아동의 가명을 따 '나영이 사건'으로 조명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피해 아동의 가명이라 할지라도 피해자에게 초점이 맞춰진 사건명은 옳지 않다는 주장 아래 '조두순 사건'으로 명칭이 수정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인터넷 등에서는 '나영이 사건'으로 이 아동 성폭행 사건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들이 많다.

이제 사건 자체에 집착하기보다는, <소원>이라는 두 장르의 작품에서 감독과 작가가 의도한 것처럼 피해자와 그 가족을 향한 배려 그리고 이들이 재기할 수 있도록 돕는 사회적 인식제고가 시급하다. 이를 위해 인터넷 포털에서 '나영이 사건', '은지 사건' 등 피해 아동의 이름을 딴 검색어를 입력할 경우 자동으로 필터링해서 '조두순 사건', '김길태 사건' 등과 같이 뜰 수 있도록 시스템을 정비하는 데 조금의 성의를 보여준다면 좋을 것 같다.

아이의 몸에 남은 상처는 영원하지만 그 영원한 기억마저도 상쇄시킬 만큼의 넘치는 사랑을 주는 일. 이제는 그 일을 열심을 해야 할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나도, 당신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전부 말이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태그:#조두순 사건, #영화 소원, #소설 소원, #아동성폭행, #집행유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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